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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재의 시네마 크리티크] Shoot and Dead, 오손 웰즈의 〈바람의 저편〉
[이현재의 시네마 크리티크] Shoot and Dead, 오손 웰즈의 〈바람의 저편〉
  • 이현재(영화평론가)
  • 승인 2022.10.27 18:1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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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포드와 피터 보그다노비치, 그리고 존 휴스턴의 유령
〈바람의 저편〉 포스터 (출처: 네이버 영화)
〈바람의 저편〉 포스터 (출처: 네이버 영화)

재미있는 것은 이 영화가 묘사하고 있는 영화 감독의 상황이 똑같다는 것이다. 영화는 <바람의 저편>이라는 미완성 영화를 만드는 영화 감독 제이크 한나포드(존 휴스턴)의 죽음을 그리고 있다. 미완성 영화의 소재가 미완성 영화라는 절묘한 액자식 구성을 가진 이 영화는 꼭 오손 웰즈 자신의 죽음을 예감하고 있는 듯하며, 더욱이 그 사실을 즐기는 것처럼 보인다. 이왕 죽을 것이라면 "찍고, 죽을 것이다(Shoot for Dead)". Shoot이란 단어는 영화 현장에서 촬영이 시작된다는 뜻이기도 하고, 총을 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서부극의 화신 존 휴스턴이 감독의 사망을 연기한다는 점은 얼마나 절묘한가. 존 휴스턴은 서부극의 몰락 뿐만 아니라, 오손 웰즈의 몰락마저 한 몸에 표현했다. 그러나 예견된 비극에도 불구하고 총잡이는 총쏘기를 멈추지 않는다. <바람의 저편>의 쾌감은 바로 그 멈추지 않는 총질에 있다.

"그녀는 화면 안에 있지." (She's on the screen. 자막에서는 시사회에 있다고 다소 무미건조하게 번역됐다) 주연 여배우의 행방을 찾는 질문에 대한 답. 영화는 때로 영화 안의 영화로 들어간다. 포카혼타스와 존 데일의 조합은 꼭 아담과 이브의 조합같다. 그곳 안에서는 언어조차 필요 없다. 그런 점에서 제이크 한나포드가 초기에 무성영화를 만들었다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스크린 너머에서 환청처럼 울려퍼지는 존 휴스턴의 목소리는 신처럼 들린다. 그러나 에덴동산은 두 사람이 머무는 것을 원치 않는다. 신은 추방당하고, 이젠 오직 돈만이 낙원을 건설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독은 끝내 영화를 완성한다. 감독은 죽었지만 영화는 살아 있는 이 아이러니. 다시 감독은 죽음으로 불멸성을 획득한다.

 

〈바람의 저편〉 스틸컷 (출처: 다음 영화)
〈바람의 저편〉 스틸컷 (출처: 다음 영화)

영화의 세부를 완성하는 것은 영화계의 피라미드를 구성하는 인간군상들에 대한 촌평이다. 물론 평론가는 착하게 나오지 않는다. <8과 1/2>, <버드맨>에 등장한 평론가들과 마찬가지로 평론가는 파티에서조차 겉돌며 호시탐탐 언어로 감독을 박제할 기회를 찾고 있다. 감독이 비평가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본에 의해서 사망하는 것은 그러므로 불행 중 다행이랄까. "줌과 달리의 미학적인 차이는 뭔가요?"라고 묻는 씨네필, 늘 해고당하는 분장사, 자신이 뭔가 대단한 사람이 된 것처럼 착각하는 기자, 어디서든 나타나는 카메라맨과 붐 오퍼레이터, 그리고 영화의 도덕성을 걱정하지만 혀를 낼름거리면서 영화를 훔쳐보는 노회한 교사까지. 트뤼포의 <아메리카의 밤>, 지가 베르토프의 <카메라를 든 사나이>, 근래에는 <카메라를 멈추면 안 돼!>까지 메타시네마는 줄곧 있었지만 이만한 총질은 찾아보기 힘들다.

장면은 페이크 다큐멘터리의 기법을 활용하면서도, 이미지 하나 하나에는 (때로는 지나치게 느껴질정도로)힘이 들어가 있다. 그런데 <바람의 저편>은 오손 웰즈의 잘 알려지지 않은 재능 하나를 더 보여준다. 오손 웰즈는 <악의 손길>의 후반부에서 녹음기를 들고 필사의 추적을 벌이는 장면을 연출한 적 있다. 라디오 드라마 연출가 출신답게 영화는 불을 끄고 듣기만 해도 이야기가 느껴질 정도로 섬세한 사운드의 리듬을 들려준다.

존 휴스턴의 과시적인 연기는 어딘가 모르게 시민 케인을 닮았다. 만약 인간 대 인간으로서 오손 웰즈를 만났다면 저 멀리로 도망가지 않았을까. 거장의 죽음을 담고 있지만 어쩐지 거장을 둘러싼 파티 자체가 과대포장된 느낌이 들기도 한다. 그러나 감독이 자기 자신을 사랑해달라고 애걸한 것도 아니잖은가. 그러므로 바람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 오로지 엉망진창이 된 흔적으로서만 남는 파티의 흔적을 즐겁게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족할 것 같다. 더욱이 감독 자신은 이상향을 우스꽝스럽게 모방하는 영화를 한편 남겨 놓았을 뿐이다. 이 거대한 농담을 이제는 넷플릭스로 감상할 수 있게 됐다. 손안에서 우리는 영화의 실패를 관람하고, 그럼으로써 이 영화의 잃어버린 숏과 씬이 완성된다. 그렇다. 영화는 스크린 밖의 관객을 위해 엉터리 케이크 한조각을 남겨 놓았고, 그것이 영화가 완전성을 획득하는 방법이다.

 

 

글·이현재
평론가. 2020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등단. 2021년 한국만화영상진흥원 만화 평론 신인상.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이현재의 시네마크리티크」에서 글을 쓰고, STRABASE에서 일하며, 경희대학교 K컬쳐・스토리콘텐츠연구소에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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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재(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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