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록이 넘쳐나는 시대이다. 이제 기록은 쉽게 지워지고 복제되고 대체로 복원도 가능하다. 나아가 기록은 사료나 증거로서의 절대 무게에서 벗어나 질료로도 활용 변주된다. 여기 과거 기록을 가지고 기록에 대해 질문하고 기록끼리 불협화음을 이루면서 또 하나의 기록을 만든 작품이 있다. <멜팅 아이스크림>은 손실되어 버려졌거나 더 이상 보존되지 않고 지워진 자료들의 “복원” 과정을 담는다. 영화는 수해로 손실되어 버려졌다 알려진 민족사진연구회의 민주화 투쟁의 현장 사진과 어느날 온라인 상에서 사라진 미디어 참세상의 노동자 투쟁 현장 기록 영상을 축으로 "사라진 기록"의 물질적 복원 과정과 영화적 재활용의 과정을 다룬다.
기록은 기록 그 자체의 의미만이 아니라 기록하는 자, 보관하는 자, 기록을 재활용하는 자와 같이 기록을 둘러싼 다양한 맥락이 존재한다. 기록의 복원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 복원에 대한 각자 다른 상에서부터 복원을 둘러싼 다양한 욕망과 힘들이 작동한다. 영화는 기록과 복원을 내용적 차원만이 아니라 질료로 까지 확장해 기록과 복원에 대해 다층적 질문을 던진다. 그리고 이 질문들은 자료를 수집하고 복원하는 것만이 아니라 그들을 향해 질문을 던지는 순간 또한 역사임을 보여준다.

영화는 복원 과정을 다루지만 복원 과정을 따라가지 않는다. 영화는 크게 네 축의 서사가 병렬적 혹은 대립적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수해를 입어 사라진 사진 필름의 물리적 복원 과정, 당시 민주화 투쟁 현장을 기록한 사진가들의 인터뷰, 온라인상에서 지워진 2000년대 노동자 투쟁 기록 영상, 그리고 현재 풍경과 동상 이미지가 그들이다. 각기 다른 시공간을 품은 사진과 영상과 사람(인터뷰)과 사물(이미지)은 자료로서 “민주화”를 표상한다. 영화는 이들의 존재이자 자료를 교차하고 미끄러트리고 충돌하는 방식으로 선형성에서 일탈하여 엇갈리는 그 틈새에서 새로운 의미를 획득한다.
예를 들어 80년대 민주화 투쟁을 기록한 사진 필름은 “멜팅”되어 흐르는 유동적 이미지로 담겨지고, 2000년대 비정규직 노동자 투쟁을 다룬 참세상 미디어 영상은 멈춰진 사진처럼 정적으로 가시화된다. 인터뷰 영상은 당대를 기억하고 논평하는 기록이지만 2000년대 기록 영상 속 목소리에 묻히거나 반박되곤 한다. 복원 진행 중인 사진은 점점 식별불가하다 결국 원하는 필름이 아님에 영원히 사라지고, 지워진 영상 기록은 점점 더 선명하고 또렷해지면서 영화로 복원되어 비정규직 노동자 투쟁이 현재 진행형임을 알린다.


이처럼 영화는 삭제되어 사라진 세계를 복원하되 사진은 움직이게, 영상은 고정되게, 복원은 사라짐으로, 사라짐은 현시로, 찍는 자의 목소리와 찍히는 대상의 목소리가 침범하도록 자료 자체를 질료로 삼아 낯선 리듬과 질감을 생성한다. 거기에 이를 이어내며 불쑥불쑥 틈입하는 현재는 식별불가능한 장소와 동상을 파편적으로 그러나 흐르듯 모호하게 포착한다. 80년대와 90년대와 지금의 세계, 어디에도 안주하지 않고 유연하게 넘나들며 다른 세계로 탈출을 시도하는 것이다.
따라서 <멜팅 아이스크림>은 기록의 속성에 내재된 역사의 선택에서 벗어난, 역사 속에서 제대로 주목받거나 고려의 대상이 된 적이 없었던 손실되고 지워진 수많은 노동자들의 형상과 목소리를 기록한다. 동시에 영화는 과거의 잃어버린 시간과 세계를 되찾겠다는 이상에 대해서도 함께 질문한다. 영화가 핵심적으로 다루는 “복원”의 의미가 다층적으로 발동하고 있는 것이다. “복원”은 기록의 원형을 되찾겠다는 시도 뿐 아니라 역사의 복구 혹은 회귀를 꿈꾸는 자들에게 “민주화”라는 “좋은 말”을 비판적으로 곱씹게 한다. 필름 복원의 여정을 담은 영화는 민주화 투쟁이나 촛불-이후 비정규직 노동자 집회들의 기록을 활용해 역설적으로 복구의 환상을 꼬집는 셈이다.

<멜팅 아이스크림>의 제목 또한 다중적이다. 멜팅은 수해로 손상되어 녹아내린 필름의 질감을 형상화하지만, 흘러내리는 이미지는 이 영화를 관통하는 ‘민주화’의 녹아내림을 의미하기도 한다. 멜팅에 아이스크림이 붙어 녹아내린 아이스크림처럼 마치 뜨거웠던 민주화 열기 이후에 비정규직 노동자 시대를 열어버린 현 사태를 일컫는 듯도 하다. 멜팅 아이스크림은 달콤하기도 하고 안타깝기도 하고 따뜻하기도 하고 차갑기도 한 그 무엇이다. 영화는 기록의 형상들, 사진과 영상, 스틸과 무빙, 카메라를 든 자와 카메라에 담긴 자, 사라짐과 복원을 경합하여 이달콤 찐득한 아이스크림이 때때로 아이-스크림 (I scream)으로 읽히기도 한다. 자료들의 아우성이자 역사의 아우성으로 읽히기 때문이다. 이 아우성은 뒤섞여 할퀴는 외침이 아니라 서로 연루되고 연동되어 발산하는 에너지 같은 그 무엇이다. 그런 의미에서 카운트다운으로 끝나는 영화가 의미심장하다.
사진출처: 구글
글·이승민
영화 연구자, 평론가, 기획자, 강연자로 활동 중이다. 독립영화와 다큐멘터리영화 연구에 집중하고 있다. 저서로 <한국다큐멘터리의 오늘>(공저), <아시아 다큐멘터리의 오늘>(공저), <영화와 공간> 등의 저서와 다수의 논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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