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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재의 시네마 크리티크] 붕괴의 파레시아 혹은 묵시적인 괴력, 한가람의 〈아워 바디〉
[이현재의 시네마 크리티크] 붕괴의 파레시아 혹은 묵시적인 괴력, 한가람의 〈아워 바디〉
  • 이현재(영화평론가)
  • 승인 2022.11.14 1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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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워바디〉 포스터 (출처 : 네이버 영화)
〈아워바디〉 포스터 (출처 : 네이버 영화)

붕괴하는 인물들

현주(안지혜)의 교통사고에서 미셸 프랑코의 <크로닉>(2015)의 마지막 장면을 떠올리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다. 일상 속에서 죽음과 마주해야 했던 호스피스 데이비드(팀 로스 분)가 육체를 통해 쌓아 올렸던 리듬과 흐름은 마지막의 둔탁한 충돌음과 함께 붕괴한다. 데이비드가 환자들을 지나오며 리듬과 흐름을 쌓아나갔듯, 현주는 자영(최희서)을 돌보며 리듬과 흐름을 직조해간다. 그들이 쌓아 올렸던 몸의 리듬과 흐름은 곧 현주의 교통사고로 한순간에 붕괴한다. 현주는 매일 죽음을 마주하는 환자와 사실상 다를 바가 자영을 돌보고 있었다. 8년간의 행정고시 끝에 자영이 확인한 것은 모든 가능성을 소진하고 시험조차 볼 수 없는 본인이었다. 죽음과 마주한 자영의 곁에서 싸워주는 존재는 현주(안지혜)였으며, 그들은 도시의 삶이 낳은 죽음과 싸우기 위해 함께 몸의 리듬을 쌓아간다. 밝을 줄 알았던 영화의 분위기는 현주의 충돌과 함께 사라진다. 데이비드가 쌓은 모든 것이 충돌로 인해 가루가 되어 사라지고 충돌과 충격만 남겨놓듯, 현주는 자영에게 충돌과 충격을 남겨놓고 사라진다.

<크로닉>은 충돌과 충격의 현장만을 남겨놓은 체, 붕괴에 대해 뚜렷한 답을 내리지 않았다. 대신 현장을 물끄러미 바라봄으로써 성급한 해답 대신 도시 속의 노동이 낳은 피로를 충돌의 현장을 통하여 지목한다. 관조의 끝에 충돌과 충격이 빚어낸 붕괴의 현장. <크로닉>은 도시가 낳은 파국의 현장에서 달리기를 멈춘다. 파국의 자리를 마주한 관객은 <크로닉>이 남겨놓은 에너지가 매일 죽음을 마주하던 이의 마지막 선택이자 답변인지 판단하기 어렵다. 심지어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데이비드의 달리기가 죽음에 저항하기 위한 행위였는지, 육중하고 연로한 몸을 재확인하는 자리였는지는 조차 정확하지 않다. <크로닉>은 데이비드가 쌓아 올린 노동의 현장에 겹겹이 포개어진 모호한 피로를 하나씩 드러내다가, 그 끝에 모습을 드러낸 충격과 충돌을 통해 붕괴가 강림한 자리에 도착한다. 그는 붕괴의 현장에서 노동이 문명과 결탁하여 산출한 피로를 바라보는 것으로, 카를로스 레이가다스나 아마스 에스칼란테와 같은 선배들이 마련했던 ‘문명과 존재의 장소’에 도착한 셈이다.

같은 충돌과 붕괴를 맞이했지만, <아워 바디>의 관심은 미셸 프랑코를 비롯한 일렬의 멕시코 독립영화 기수들이 주목했던 관념이나 추상에 있지 않다. 미셸 프랑코가 레이가다스나 에스칼란테를 따라 죽음을 관념의 통로로 사용할 때, <아워 바디>는 죽음과 소멸의 과정을 보다 상세하게 묘사하는 데 공을 들인다. 가령, <아워 바디>에서 현주의 죽음은 <크로닉>에 비해 그 자리가 꽤 명확한 편이다. 현주의 과거는 데이비드와 마찬가지로 선명하지 않지만, 교통사고 직전의 현주는 오랫동안 공을 들인 소설이 계약에 실패했다. 문명으로부터 거부당한 이후, 현주는 처음으로 자영의 뒤에서 뛰겠다고 이야기한 뒤 교통사고를 당한다. 맥락만 두고 보면 현주는 그럴듯한 동기에 의해 자살을 택한 것처럼 보인다. 현주에게 소설의 실패란 자영이 8년간의 시도 끝에 확인한, 모든 가능성을 소진한 상태와 크게 다를 바가 없어 보인다. 단지, 현주에게는 자영이 과거의 자신에게서 발견했던 그 모습을 발견할 수 없었을 뿐이다.

그렇다면 현주는 어째서 지금의 자영이에게서 자영이 발견했던 것을 찾지 못했나? 현주와 자영의 차이는 바로 이 지점에 있는데, 자영이 현주로부터 삶을 되찾자마자 시도했던 것은 문명사회로의 복귀였다는 점에 그 차이가 있다. 현주는 달리기 모임에서 몸의 리듬을 가꾸며 하며 소설을 쓰지만, 자영은 몸의 리듬을 타고 문명사회로의 진출을 꿈꾼다. 친구의 도움으로 얻은 아르바이트를 넘어, 정규직으로 향하는 그의 발걸음에는 현주가 품었던 방향이 없다. 현주의 죽음이 자살로 보이는 까닭에는 자신이 꿈꾸던 문명과의 접합이 실패했고, 자영에게는 그 실패에 대한 답변이 없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현주는 홀로 시작해서 혼자 죽는다. 자영의 발걸음과 생명에는 딱히 방향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현주를 방향으로 삼았던 자영의 시도 또한 현주와 똑같은 방식으로 실패한다. 그러나 자영은 마지막 장면에서 관객에게 한가지 내기를 건다. 그것이 본인의 선택이었는지, 아니면 운명이라고 믿을 것인지를 결정하는 게임에서 영화는 끝난다. 자영은 붕괴한 것인가, 자발적으로 소멸한 것인가. 그것도 아니라면 문명에 속한 모든 이들을 비웃는 것인가.

 

〈아워바디〉 스틸컷 (출처: 네이버 영화)
〈아워바디〉 스틸컷 (출처: 네이버 영화)

자연 없는 문명, 예정된 파국

레이가다스와 에스칼란테, 미셸 프랑코까지 멕시코의 독립영화 기수들은 문명과 자연 사이의 파열에서 폭력과 피로를 발견했다. 그들에게 있어 문명과 자연은 공존할 수 없는 개념이며, 동시에 충돌하는 개념이기에 그들의 세계에는 폭력과 피로가 넘친다. 그들의 세계에서 문명으로부터의 구원은 오직 자연의 신비만으로 가능하다. 자연의 신비로부터 멀어진 이들은 어김없이 타락하고 죽음을 맞이한다. 죽음을 구원할 사랑은 오직 자연과 화합하는 목가적 삶의 신비 속에 있으며(<침묵의 빛>), 악마가 기거하는 장소는 중산층 가정집이고(<어둠 뒤에 빛이 있으라>), 사랑의 파국을 도시 위를 지나는 비행기를 통하여 은유(<우리의 시간>)한다. 또는 딸을 검은 봉지에 묶은 체 도시 속을 방황하거나(<상그레>), 노골적으로 전시된 폭력으로부터 구원을 얻는 장소는 문명 따위 들어올 수 없는 사막(<헬리>)이다. 그런가 하면, 학교라는 문명의 교육이 자행한 폭력으로부터 도피하기 위해 주인공이 향하는 장소는 어떠한 인공물에도 자신의 지반을 내어주지 않는 바다(<애프터 루시아>)다.

<아워 바디>는 문명 속에서 인간은 구원을 찾을 수 없으리라는 멕시코 독립영화가 형상한 독특한 이원적 세계관과 같지만, 그보다 잔혹하다. <아워 바디>에서는 자연을 찾을 수 없다. 애초에 구원의 가능성을 소거해놓은 것이다. 그리고 구원의 빈자리를 육체라는 이름의 스펙터클로 채워놓는다. 자연으로부터 멀어져 파국에 이르거나, 구원을 찾아 자연으로 향하던 인물들은 <아워 바디>에서 예정된 파국에 맞서 육체를 단련하는 일종의 수도승이 된다. 그들이 문명의 삶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출구는 몸의 단련이다. 그러나 <아워 바디>는 그들이 결코 자연에 가닿지 못하리라는 것을 일찍이 선언한다. <아워 바디>에 등장하는 현주와 자영의 단련된 육체는 신선할지언정, 자연적이고 건강하다고 보기에는 어렵다. <아워 바디>가 달리기를 하는 현주와 자영을 비출 때마다, 카메라는 관음적 시선을 결코 포기하지 않는다. 그들의 육체에 깃들게 된 스펙터클이라는 문명의 그림자는 카메라 앞에서 어떠한 주저함도 없이 노골적으로 그 모습을 드러낸다. 그들은 예정된 문명의 파국 속에 있다. 스펙터클이 그들을 결국 붕괴시킬 것이며, 문명 아래 던져진 그들의 육신은 카메라라는 기계의 시선 앞에서 속절없이 대상화된다.

그렇다면 그들의 수행과 단련을 문명의 내면화로 받아들여야 하는가. <아워 바디>의 영화적 태도는 이 지점에서 분명해진다. 멕시코 독립영화가 쌓은 세계관과는 다르게, <아워 바디>는 인물을 구원할 생각이 추호도 없다. 가능성이 소진된 상태에서 등장했던 자영은 다시 가능성이 사라진 상태로 돌아가고, 새로운 대안으로 보였던 현주는 실패와 함께 붕괴한다. <아워 바디>는 문명에 포획된 육체의 묵시록이지, 건강과 생명을 예찬하고 자기 자신을 되찾는 데에 실패한 수난기가 아니다. 문명에 포획된 이상, 파국은 예정된 결말이다. 예정된 파국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달리고, 육체에는 스펙터클이 깃든다. 그들은 자연을 본 적 없기에 어떠한 행동도 구원을 내포하지 못한다. 그들의 예정된 파국 앞에서 할 수 있는 일이란 그들에게 주어진 최후의 자연, 육체를 단련하는 일뿐이다. 그나마 가능한 저항이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최후의 자연, 자신의 몸을 위한 달리기를 하는 것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도 그들을 구원하지는 못한다. 그들의 존재 자체는 이미 문명에 포획되었기 때문이다. <아어 바디>에서 문명은 자연 위에 군림하고 있다.

현주는 문명을 피해 자신의 성찰과 노동을 글쓰기 안에 담았지만, 그것이 노력으로 인정받고 문명 위에 올라서기 위해서는 어떤 방식으로든 문명이 필요로 하는 것을 내어주어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현주에게 그 가능성은 오직 단번에 계약을 성사하는 일뿐이다. 만약 어딘가에서는 응답이 오고, 어딘가에서는 오지 않는다면 그것은 보편적인 가치라고 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여전히 문명은 자연 위에 군림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현주에게 그의 소설은 시장가치를 포함할 수 있는 보편타당한 노동이어야 했다. 문명 앞에서 현주의 소설은 노동이 완전히 배제된, 시장가치가 있냐 없냐의 문제일 뿐이다. 시장가치를 포함하지 못했다는 평가 아래서 현주의 소설은 계약에 실패한다. 쓰고 싶은 글은 그저 쓰고 싶은 글일 뿐, 세상에 통용되지 않다. 이 평가는 현주를 죽음으로 몰고 간다. 달리기와 단련된 육체는 그저 조화할 수 없는 자신에 매몰된 베타성이었을 뿐이다. 현주는 계약에 실패한 다음, 자영을 앞세워 놓고 붕괴한다. 그것이 현주가 할 수 있는 마지막 배려였기 때문이다.

현주는 어쩌면 자영의 뒷모습에서 자신이 자영을 찾았을 때의 모습을 발견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현주는 자영의 뒷모습에서 자신이 가졌던 희망을 찾을 리 없다. 삶의 활력을 회복한 자영은 빠르게 문명으로의 복귀를 꿈꾸고 있고, 그리고 자영은 복귀로부터 멀지 않는 곳에 자리하고 있다. 현주가 자영의 뒷모습에서 찾을 수 있던 것은 결국 본인의 의지가 어떠했든지와 전혀 관계없이 스펙터클을 내면화한, 신선하지만 건강하다고 볼 수 없는 몸이었을 것이다. 현주는 자영의 뒤에서 죽는다. <아워 바디>는 <크로닉>과 다르게 붕괴의 현장에 자리하지 않는다. 정확히 말하면 현주는 붕괴했지만, 그 흔적조차 기계의 시선이라는 문명 속에 남지 못했다. 흔적을 공유하는 이들은 달리기를 종교적으로 수행하던 달리기 모임의 구성원들뿐이다. 현주가 문명과 조화하지 못하여 흔적조차 남기지 못하고 사라질 때, 달리기 모임의 구성원들에게 현주의 죽음은 수용되지 못한다. 문명의 입장에서는 현주의 존재로 인해 변한 게 없을 뿐이며, 달리기 구성원들의 단련으로 그들의 육체에 깃든 것은 고작해야 스펙터클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현주는 어째서 문명에 진입조차 하지 못하고 붕괴했는지 물을 필요가 있어 보인다. 그토록 매달렸던 소설과 달리기가 어째서 문명 앞에서 아무것도 아닐 수 있는지 안다면, 현주의 파국을 이해하고 다른 시도를 해볼 수 있을 터이다. 달리기 구성원들은 그것을 물었어야 했으나, 안타깝게도 현주의 죽음을 이해하는 이들은 아무도 없다. 종교적으로 달리기를 수행하던 이들은 그나마 현주의 죽음을 수용할 능력이 없다. 그리고 달리기 모임은 빠르게 문명 속으로 편입된다. 그 속에는 자영 또한 속해있다. 자영은 현주의 죽음이 문명 속에서 붕괴하는 광경, 그 붕괴가 문명을 통해 해결되는 광경을 모두 목격한 유일한 인물이다. 현주가 사라진 자리에 남은 것은 문명의 귀환뿐이라는 사실을 아는 이도 자영뿐이다. 이제 닥쳐오는 파국을 막는 일은 불가능하다. 예정된 결말에도 불구하고 자영은 달리기를 계속한다. 할 수 있는 것이 그것뿐이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대신 자영은 현주와는 다른 방식으로 문명과 조화를 이루어보고자 한다. 자영이 생각하기에 성관계는 문명과 조화를 이룰 수 있는 마지막 거래이자 대화이다. 그것이 자영이 현주의 죽음을 수용하는 방식이다.

 

〈아워바디〉 스틸컷 (출처 : 네이버 영화)
〈아워바디〉 스틸컷 (출처 : 네이버 영화)

묵시적 냉소, 붕괴의 파레시아

그 뒤부터 영화는 이상하게 흐르기 시작한다. 그 이유는 이제 자영이 할 일은 문명이 원하는 답을 주고, 자신은 문명 밖으로 향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문명의 시선으로는 결코 현주를 이해할 수 없으며, 우리는 카메라가 여전히 문명에 포획된 시선이라는 점을 상기해야 한다. 현주가 죽은 뒤에도 카메라는 여전히 자영의 몸을 관음했으며, 동시에 보이는 것을 보는 기계로서 냉혹한 복제를 지속했다. 현주가 죽은 뒤, 자영에게 성(Sex)은 마치 현주의 소설 같은 것이 된다. 자영은 문명으로 향하던 자신을 발을 돌려 성을 통해 현주가 행하고자 했던 일을 이어받는다. 그럼 왜 하필이면 성이었어야 했을까. 그 이유는 단순하다. 성은 몸을 이용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문명이 포획한 세계에서 몸은 마지막 남은 유일한 자연이다. 현주가 소설을 통해 문명을 극복하려 했듯, 자영은 몸을 통해 문명을 극복하고자 한다. 현주가 죽은 뒤 이어지는 세 번의 성관계에서 자영은, 현주가 그러했듯이 문명에 포획된 자신의 몸을 확인한다.

현주가 죽은 (혹은 소멸한) 뒤, 자영은 달리기 모임의 남성 구성원과 성관계를 갖는다. 그들이 갖는 관계의 동기에는 현주의 죽음을 수용하지 못하겠다는 자백에 있다. 그들은 그 자백을 한 뒤에 추도인지 위안인지 뭔지 모를 성관계 갖는다. 이를 현주를 위한 추도로 이해하든, 구성원 간의 위안으로 이해하든 그들의 성관계는 상당히 괴이하다. 괴이함의 중심에는 현주라는 존재가 여전히 일렁이고 있다. 죽은 현주 때문에 자영과 달리기 모임의 남성 구성원은 성관계를 갖는다. 이들의 성관계는 추모나 위안으로 해석할 수 없다. 오히려 그들의 성관계는 오히려 현주의 존재를 강제로 연장하기 위한 종교적 시도로 보인다. 자영은 현주로부터 현주가 가진 내밀한 욕망을 건네받은 상황이었고, 달리기 모임은 현주 없이 영속할 수 없을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것이 동기인지는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는다.

자영이 품었던 동기는 오히려 달리기 모임을 벗어난 뒤에야 확실해진다. 자영이 정규직을 향한 시도를 지속하던 친구의 직장에서 중년의 직장 상사와 관계를 갖는 순간에는 명확한 동기가 있다. 현주는 본인의 의지로, 현주가 발화했던 중년 남성에 대한 성적 판타지를 실현한다. 이 순간 카메라는 잔혹하리만큼 그 현장의 스펙터클을 관음한다. 카메라는 현실을 복제하는 기계로서, 이 순간 자영이 어떤 존재인지 냉혹하게 판단한다. 이 순간, 자영은 현주의 이상을 실현하는 존재도 아니요, 그저 문명에 포획되어 달리기를 통해 스펙터클을 내면화하게 된 육체에 불과하다. 이를 피하는 것은 처음부터 불가능했으며, 그게 자영의 의지가 아니었다고 한들 문명의 공고한 군림에는 일말의 영향조차 미칠 수 없다. 자영이 친구에게 본인의 의지로 성관계를 가진 것이라 설명한들, 그 설명이 어떤 효력도 미치지 못하는 이유는 이 때문이다. 파국은 처음부터 마련되어져 있었고, 지금도 그 자리에 있으며, 앞으로도 있을 것이다. <아워 바디>의 카메라는 이 순간 붕괴가 강림한 자리를 복제하는 중이다.

현주가 겪었을 붕괴의 자리를 경험한 자영은, 현주가 느꼈을 무기력을 체현한다. 자영은 이제 문명이 원하는 대답을 줄 수밖에 없다. 자영은 이제 염치를 버리고 가족에게 정규직이 되어 문명의 한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는 거짓을 고하고 자신에게 주어진 마지막 임무를 수행하러 간다. 현주가 소멸했듯, 자영도 이제 소멸할 것이다. 자영은 친구에게서도 염치를 거둔다. 친구가 마련한 정규직이 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를 스스로 버리고, 현주가 이야기했던 ‘좋은 호텔에서 하는 것’을 실행하러 간다. 이제 자영의 곁에는 아무도 없다. 따라서 호텔에 가는 순간에도 자영의 곁에는 아무도 없다. 문명이 포획한 세상에서 마지막 남은 자연은 몸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영은 혼자 한다. 다만, 자영은 혼자 하는 순간이 지난 뒤, 카메라를 정면으로 쳐다본다. 자영은 이제 붕괴하여 소멸하겠지만, 마지막으로 세상을 냉소한다. 스스로 그러할 수 있는 것은 이제 혼자 밖에 없다. 그 냉소가 <아워 바디>의 파레시아이며, 스스로 그러한 것에게 주어진 마지막 자리이다. 자연이 문명에 포획된 세계에서 가질 수 있는 마지막 확신이자 도덕. 그리고 스스로 그러한 모든 것이 붕괴할 것이라는 예언. <아워 바디>는 그 묵시적 괴력을 내뿜는 영화다.

 

 

글·이현재
평론가. 2020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등단. 2021년 한국만화영상진흥원 만화 평론 신인상.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이현재의 시네마크리티크」에서 글을 쓰고, STRABASE에서 일하며, 경희대학교 K컬쳐・스토리콘텐츠연구소에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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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재(영화평론가)
이현재(영화평론가) blueparanchung@gmail.com  다른기사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