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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윤미의 문화톡톡] 공부 안하면 큰일 난다는 경고
[장윤미의 문화톡톡] 공부 안하면 큰일 난다는 경고
  • 장윤미(문화평론가)
  • 승인 2022.11.14 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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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 앞에서 무기력해지는 이유

학생이었을 때 가장 받기 싫은 질문 중 하나는 “그래서 넌 앞으로 뭐 할 거니?”라는 말이었다. 내가 무엇을 할지 모를 뿐 아니라 안다고 해도 내가 가진 실력이나 조건 등과 일치하지 않는다면 철없는 상상에 불과한 것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복잡한 생각을 제대로 전달하기란 쉽지 않아 “잘 모르겠어요.”라고 꾸역꾸역 대꾸라도 하면 돌아오는 건 “아직까지 모르면 어떻게 해. 공부 열심히 안 했나 보네.”와 같은 정해진 답이다.

그러나 기준도 근거도 없는 타인의 평가에 비관하여 ‘정말 나는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은 걸까?’, ‘좀 더 열심히 했다면 지금의 나보다 훨씬 나은 내가 되었을까?’로 귀결되는 반성은 굉장히 위험하다. 모든 문제의 원인도, 그리고 그 결과에 대한 책임도 오로지 나에게 돌리도록 하여 스스로를 비난하도록 몰기 때문이다. 한 사람이 개별성은 뭉개버리고 ‘공부 열심히 안 했나 보네.’ 몰가치한 결론이 ‘내가 문제였어.’ ‘나는 쓸모없는 인간이구나.’라는 수치와 자기 혐오감으로 치닫게 되지 않는다고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

 

나는 무엇을 위해 공부하는가

엄기호의 <공부, 공부>(따비, 2017)은 부제처럼 ‘자기를 돌보는 방법을 어떻게 배울 것인가’에 대해 질문하고 있는 책이다. 엄기호는 우리 사회가 공부에 매달리는 이유에 대해 분석하며 진정한 공부의 시작과 끝은 자신을 돌보는 방법이라고 설명한다.

 

엄기호, [공부 공부](따비, 2017)
엄기호, [공부 공부](따비, 2017)

공부 안 하는 자식에게, 공부하기 싫어하는 아이들에게 어른들은 흔히 말한다. “공부해서 남 주니?” 틀린 말은 아니다. 그 어려운 공부를 고작 남을 주기 위해서 하는 사람은 없으니까. 하지만 남을 위해서 우리는 공부한다. 어려서는 부모님을 위해서, 성인이 되어서는 타인(의 인정)을 위해서, 그리고 부를 위해서. 결과적으로 이 모든 게 인생에 도움이 되는 것들 아니냐고 반문할 수 있지만 오롯한 나를 위한 것들인지는 곰곰이 생각해볼 일이다.

공부만 잘하면 누구나 성공할 수 있는 시대는 끝났다고들 말하지만, 여전히 우리는 공부만이 성공할 수 있는 유일하고 가장 확실한 수단이라고 생각한다. 사회적으로 인정받고 성공한 직종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공부를 잘한 엘리트들이 대부분이라는 건 확실하다. 공부를 못하면 결국 그렇고 그런 사람밖에 될 수 없다는 현실은 사실을 넘어 진실이 된다. 그리고 이 말은 내 아이에게 가장 강력한 경고 내지 협박으로 작용한다. 그저 그런 사람이 되기 싫으면 지금보다 더 치열하게 공부하라고. 안 그러며 넌 실패하고 말 거라고.

이쯤 되면 성공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실패하지 않기 위해서 공부해야만 한다. 성공과 실패는 운이라지만 우리 사회에서 능력이다. 능력이 없는 사람이 실패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능력은 누가, 무엇이 판단하는 것일까.

경제가 어려워지고 취업 문이 좁아지면서 개인의 능력을 객관적으로 평가하고 등락을 결정한다는 것이 쉽지 않을뿐더러 그 과정을 수긍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늘어나자 다른 방법을 찾아야 했다. 이른바 ‘더’ 공정한 평가 방법 말이다. 공정을 명분으로 제시된 방법이 점수화, 등급화에 따른 줄 세우기다. 줄세우기식 평가가 가진 가장 큰 장점은 가장 간편한 방법이자 논란이 없다는 점이다.

이 평가를 치르는 사람의 목표는 한 문제라도 더 맞혀야 하는 것이 된다. 나의 공부 목적은 지식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시험에 붙기 위해서이며, 이를 위해서는 한 문제라도 더 맞혀야 한다. 남들이 외우지 않은 것만 같은 하찮은 부분까지도 집중하려면 숨돌린 시간, 잠자는 시간도 아껴야 한다.

다시 질문해본다. 나는 무엇을 위해 공부하는가. 차라리 부모를 위해서, 다른 사람의 부러움을 위해서 공부했던 그때가 나았고 해야 할까. 무엇이 나은지 선택하는 건 무의미하지만 확실한 건 하나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더 나은 삶을 위해 하는 것이 공부인 것은 변함이 없지만, 공부는 더 어려워졌고 지금보다 더 나은 삶을 안겨줄 확률 역시 훨씬 낮아졌다는 것. 그리고 그 배경에는 공부의 본질에서 점점 멀어지게 만드는 기형적인 현실이 놓여 있다.

 

배움을 미끼로 삼는 사회

한때 열정페이는 청년들 패기의 상징이자 기성세대의 시혜로 이해되었다. 청년들은 공짜로 능력과 시술을 배울 기회를 얻고 기성세대는 돈 주고도 못 살 비법을 제공한다는 것이 열정페이의 명분이었다. 말이 아예 되지 않는 건 아니었다. 젊은 세대는 배움의 기회는 많았을지 몰라도 그것을 익힐 기회는 얻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동안 기성세대는 청년들이 능숙하지 못하다는 이유로, 그들의 시행착오를 책임지고 싶지 않다는 이유로, 무엇보다 그들에게 나의 생계 수단을 뺏기고 싶지 않다는 이유로 경험의 기회조차 쉽게 내주지 않았다. 누군가 나서서 그 실손을 떠안겠다고 담보하면 또 모를까.

이런 분위기에서 이제 막 사회 구성원으로 첫발을 내디딘 청년들이 할 수 있는 거라곤 자신의 값을 내리는 것이 유일하다. 임금을 적게 받는 것, 같은 임금으로 더 많이 일하는 것. 이 정도는 되어야 배움을 익힐 기회를 얻을 수 있다. 그러나 이게 끝이 아니다. 그 과정에서 능력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받는 모욕, 멸시, 비난은 피할 수 없는 노동 중 하나다. 이른바 감정동. 하지만 기성세대는 말한다. 나는 이것보다 더했다고, 너는 그래도 운이 좋은 거라고. 억울하면 공부해서 성공하라는 말은 조언인지 비아냥인지 알 수 없다.

배움을 익힐 시기가 점점 늦어질수록, 그리고 기회가 적어질수록 사회의 발전 역시 더딜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손을 놓을 수도 없는 일이라 결국 할 수 있는 건 언제든지 뛰어나갈 것을 대비해 준비하는 것이다. 그러나 운동화 끈을 풀었다, 맸다 하는 것도 한두 번이고, 허리를 숙이고 앞을 바라보는 것도 한계가 있다. 이 시가니 길면 길수록 마음은 조급해지고, 불안은 늘어간다.

사람들은 으레 미래를 준비하기 위해서 공부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 공부는 대개 시험을 위한 것, 자격증을 따기 위한 것이 대부분이다. 시험에 통과하는 것, 자격증을 따는 것은 게임으로 말하면 ‘넥스트 레벨’이지만 우리는 이 수없이 기다리고 있는 넥스트 레벨 중 하나에 너무 많은 에너지를 갈아 넣는 건 아닌지 생각해 볼 일이다. 게다가 경제가 어려워지고 취업난이 계속되면서 레벨의 단계는 더 잘게 쪼개졌고, 통과 기준은 더 좁아졌다. 이것에 부합하기라도 하듯이 사회와 기업은 자기 계발하는 사람만이 성공할 수 있다는 명분으로 아이들은 물론 어른들까지 각종 사교육 시장으로 내몬다.

주변을 둘러보면 듣기만 해도 대단한 자격증을 가진 사람부터 이런 자격증이 있었나 싶을 만큼 생소한 자격증을 따기 위해 돈과 시간을 투자하는 사람들이 많다. 미래에 유망한 자격증이라며 당장 필요하진 않더라도 언젠가는 써먹을 수 있다는 기대도 있다. 그러나 막상 그 사람의 진짜 ‘자격’과 손에 쥔 ‘증’ 사이에 놓인 괴리감을 발견하는 순간 씁쓸함을 감출 수 없다.

 

(이 글은 격월간 교육지 <민들레>142호에 실린 글을 수정 , 요약한 것입니다.) 

 

 

글 · 장윤미(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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