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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문영의 시네마 크리티크] 포스트모던 소비문화 시대 상류층의 스펙터클과 하녀들: <하녀>(임상수 2010)
[정문영의 시네마 크리티크] 포스트모던 소비문화 시대 상류층의 스펙터클과 하녀들: <하녀>(임상수 2010)
  • 정문영(영화평론가)
  • 승인 2022.11.22 1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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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김기영의 <하녀>의 리메이크로서의 임상수의 <하녀>

 

임상수 감독의 <하녀>(2010)는 한국의 부뉴엘(Luis Buñuel) 또는 히치콕(Alfred Hitchcock)으로 불리며 최근 한국영화에 미친 영향력을 새롭게 평가받고 있는 김기영 감독의 최고 흥행작 <하녀>(1960)를 원작으로 한 리메이크 영화이다. 김기영의 <하녀>는 어떤 면에서는 부뉴엘의 <어느 하녀의 일기>(1964)보다 더 먼저 그리고 더 성공적인 자연주의 하녀 영화로 그 탁월성을 국제적으로 인정받는 한국영화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원작에 비해 임상수의 리메이크 <하녀>는 원작의 “정치적 전복성”, 특히 하녀의 성정치적 전복성을 떨어뜨린 “퇴행”한 영화라는 평가를 받는다. 이러한 혹평은 오히려 비슷한 시기에 나온 박찬욱의 <박쥐>(2009)가 리메이크 <하녀>보다 스타일 뿐 아니라 주제 면에 있어서도 김기영의 <하녀>에 더 근접해있다는 주장을 동반한다. “난 이 짓을 좋아해요”라고 말하는 임상수의 하녀 은이(전도연)보다 “난 하녀가 되기보단 뱀파이어가 되겠어!”(김소영)라고 선언하는 것처럼 보이는 태주(김옥빈)가 김기영의 하녀가 행사하는 성정치적 전복성을 더 강화하고 있다는 것이다.

<처녀들의 저녁식사>(1998)로 데뷔한 임상수는 <하녀>에 앞서 <눈물>(2000), <바람난 가족>(2003), <그때 그사람들>(2005), <오래된 정원>(2006) 등, 일련의 작품들을 통해 아이러니와 블랙 유머, 도덕적 애매함을 풍기면서, 우리 사회 현실과 그 심연을 파헤쳐 사회 전체를 시니컬하게 해부하고 공격하는 자연주의 영화를 만들 수 있는 기량과 가능성을 보여 왔다. 그러나 이러한 일관된 관심과 지향성에도 불구하고, 결국 리메이크 영화 <하녀>에 이르러 그는 우리 사회의 현실 환경의 심연에 존속하고 있는 자연주의적인 본원적 세계로의 진입에 실패하고 말았다는 평가를 받게 된다. 임상수에 대한 이러한 부정적 평가는 서구의 대표적인 하녀 영화 시리즈인 르누아르(Jean Renoir)의 <어느 하녀의 일기>(The Dairy of a Chambermaid, 1946)와 부뉴엘의 동명의 리메이크 영화(1964)에 대한 들뢰즈(Gilles Deleuze)의 상호 비교와 평가와 같은 맥락에서 설명될 수 있다.

들뢰즈가 르누아르와 부뉴엘을 비교 평가할 때 우선시 하는 기준은 자연주의 영화로서의 성과이다. 이러한 들뢰즈의 기준에 따르면, 르누아르의 원작은 자연주의 영화의 경계 안으로 들어오는데 실패했고, 반면에 부뉴엘의 리메이크가 자연주의 영화로 진입하는데 성공했다는 평가를 할 수 있다. 말하자면, 부뉴엘이 리메이크를 통해 원작을 퇴행이 아니라 더욱 진화시켰다는 것이다. 바쟁(André Bazin) 역시 르누아르가 헐리웃으로 와서 처음 만든 영화가 자연주의적 색채를 띠고는 있지만 당시 프랑스 영화의 우수성을 증명해 보인 “쓸쓸하고 암울한 리얼리즘” 또는 “시적 리얼리즘” 영화의 기준으로는 주제와 스타일에 있어서 실패한 것으로 평가했다. 그러나 후일 바쟁과 들뢰즈 모두 르누아르의 관심사가 부뉴엘의 그것과는 다르다는 것을 인정함으로써 르누아르에 대한 그들의 평가를 각각 재고하기도 했다.

들뢰즈와 바쟁의 르누아르에 대한 평가와 재평가가 보여주듯이, 르누아르와 부뉴엘의 하녀 영화의 상호읽기의 기준으로 자연주의 영화로서의 성과만을 고려한다면 각각의 영화가 지향하고 있는 다른 관심사, 즉 차이를 제대로 읽어낼 수는 없는 것이다. 김기영의 원작과 임상수의 리메이크가 김기영의 원작의 “정치적 전복성”을 떨어뜨린 “퇴행”으로 평가하는 상호읽기 또한 같은 지적을 받을 수 있다. 동료 영화감독들 가운데 박찬욱과 봉준호는 김기영의 <하녀>로부터 받은 영감과 영향을 밝히며 그에 대한 오마주를 강력하게 표하고 있다. 반면에 김기영의 <하녀>를 리메이크한 임상수는 그의 영화의 소재만 빌려왔을 뿐이지 자신은 김기영 유령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노력했다고 말한다. 다시 말해, 그가 원작의 1960년대 사회적 배경을 반세기가 지난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 시대로 옮겨와 원작에 대한 다시 보기를 한 의도는 새로운 관심사와 이슈를 제기함으로써 다른 것을 지향하는 차이의 반복을 시도한 것임을 주장한 것이다.

들뢰즈가 르누아르를 재평가하면서 인정한 사실은 르누아르의 관심사가 자연주의 영화로의 진입, 즉 상류사회 세계의 심연 탐구보다는, 그 세계의 파사드(façade), 스펙터클 구축에 있다는 것이다. 임상수의 <하녀> 또한 원작의 자연주의적 세계로의 진입보다는 신자유주의적 후기자본주의가 탄생시킨 수퍼리치 훈(이정재)의 대저택의 화려하고 세련된 인공적인 세계의 스펙터클을 구축하는데, 즉 연극성에 더 치중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물론 들뢰즈의 르누아르에 대한 재평가는 그의 기존 평가에 대한 근거를 설명할 뿐이지 긍정적인 평가는 아니다. 르누아르의 관심사가 자족적인 귀족적 세계의 스펙터클을 구축하는데 더 집중되었기 때문에 자연주의 세계로 진입하는데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부연 설명할 뿐이다.

들뢰즈의 논리에 따르면, 자연주의 영화로의 진입과 더불어 스펙터클과 연극성을 추구한다는 것은 서로 상반되는 방향을 동시에 지향하는 것이며, 따라서 스펙터클에 대한 집중된 관심은 자연주의 영화로의 진입에 장애가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임상수의 리메이크 <하녀>는 상반되는 두 방향을 동시에 추구하여, 둘의 상호작용이 만들어내는 “사이”에서 각각의 한계를 벗어날 수 있는 새로운 영화의 창조를 시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시도 자체가 영화의 실패를 자초할 수밖에 없다는 혹평과는 달리, 한국영화의 새로운 지향점을 제시하는데 공헌할 수 있는 성과를 인정받을 여지도 있을 수 있다.

 

2. 닫힌 인공적인 세계의 스펙터클 구축

한국영화사상 최대 규모 세트로 제작된 수퍼리치 훈(이정재)의 대저택은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이 영화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막강한 비중의 캐릭터로 등장한다. 임상수는 가구와 소품 하나하나 신경을 써서 화려하면서 건조하고 차가운 느낌을 강조하는 다양한 블루와 그레이의 채도로 캐릭터의 특성을 부각시켜 세련된 스펙터클로 구축하는데 주력했다. 김재관 작가의 20여종 회화, 배영환 작가가 특별 제작한 샹들리에를 비롯하여 수십억원을 호가하는 작품들을 전시한 고품격의 절제와 비움의 미학이 만들어낸 미술로 완성시킨 갤러리와 같은 훈의 2층 대저택의 공간은 원작에서의 동식(주진규)의 2층집 공간과는 달라도 너무 다르다. 동식의 2층집은 스펙터클 자체를 위한 것이 아니라 자연주의적인 본원적 세계로 진입하기 위한 매개체로서의 공간이다. 반면에 훈의 대저택은 그 자체로 “역사와 자연의 바깥에 위치하는“ 인위적인 세계, 이 영화가 총력을 기울여 구축한 초상류사회의 스펙터클, 즉 “합성된 결정체”를 구축한다.

 

이 영화는 원작에서 충동과 파편의 페티시와 하녀와 동식 가정 사이의 간극을 상징했던 유리와 거울을 훈의 대저택 공간을 열고 확장시켜주는 수단으로 사용한다. 이렇게 열려 있는 공간은 욕망하는 능동적인 시선의 소유자인 집주인 훈의 시점에서 자유롭고 제한을 받지 않는 카메라 앵글로 장면을 담는 것을 가능하게 만든다. 훈이 새로 온 하녀 은이에게 욕정이 담긴 시선을 던지는 장면에서 그가 파우더룸에서 와인을 마시고 있는 해라(서우)와 욕조를 닦고 있는 은이를 동시에 보는 것이 가능하도록 공간 확장이 설정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공간과 카메라 시점 설정은 어떤 제약도 받지 않는 모든 것을 다 가진 남자, 절대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훈의 욕구 충족을 위해 이 영화의 스펙터클이 구축되었다는 것을 시사한다. 강렬한 에로티시즘을 불러일으키는 은이의 하녀 의상도 훈이 보는 뒷모습에 포인트를 두고 그의 관음증적 쾌락의 만족을 위해 제작되었다.

김기영의 원작과 임상수의 리메이크에 있어서 가장 차이가 두드러진 공간은 계단이다. 원작에서 계단은 매우 중요한 장소로, 현실 세계와 연결된 다른 세계, 즉 자연주의적 세계로 떨어지게 되는 비탈진 경사면으로, 전락을 표출하는 도착과 타락의 폭력이 일어나는 상징적 공간이다. 반면에 이 영화에서 계단은 하나가 아니라, 집이 넓기도 하지만 주인과 하녀가 각각 이용하는 두 개의 계단으로 신분의 차이를 분명하게 구별 짓는 공간으로 설정되어 있다. 그리고 층계참이 있는 나선형의 웅장한 계단은 미술품들이 걸려 있는 벽으로 연결되고, 세련되고 품격 있는 스펙터클의 중심이 되는 핵심 요소이다. 바로 이 계단과 연결되는 2층 난간에서 은이가 천장에 매달린 샹들리에에 목을 매는 시도를 한다.

 

배영환 작가의 샹들리에는 “아주 럭셔리하고 궁상맞은” <불면증> 시리즈 중 <디오니소스의 노래>(2008)를 모티브로 해서 특수 제작한 작품이다. 찬란하게 빛나는 샹들리에는 깨진 날카로운 술병 조각들로 이루어진 것으로 그 위에 초록색 유리로 만든 야행성 맹금류 부엉이들이 앉아 있다. 엔딩 부분에서 샹들리에에 매달린 은이는 문득 시아(Sia)의 노래에 등장하는 위태롭게 샹들리에를 타고 있는 디오니소스적 파티를 위해 고용된 콜걸을 떠올리게 한다. 사실 이 샹들리에는 작가의 말대로 “럭셔리”해보이지만 오프닝 시퀀스에 등장하는 화려함과는 거리가 먼 생존을 위해 불면의 밤을 지새우는 은이와 그녀의 친구와 같은 하층계급의 “궁상맞은” 고달픈 실상을 감추고 있는 현대 도시의 불면을 표출하는 작품이다.

이 영화의 스펙터클의 중심이 되는 샹들리에는 자연주의 영화의 충동-이미지를 표현하는 징후와 페티시의 기호, 즉 매개물로서가 아니라 도시 밤문화의 부산물인 깨진 술병의 파편들을 가져와 불면증을 표제로 한 럭셔리한 예술품이다. 샹들리에 뒤로 보이는 벽을 장식하고 있는 김재관 작가의 반복되는 기이한 패턴의 기하학적 추상회화 또한 “환영적 일루전과 평면성을 동시에 대립시켜 시각적 긴장감을 유발”하여 “무의식을 파고드는 서스펜스”를 즉각적으로 표출하는 작품이다. 이처럼 훈의 저택은 리오타르(Jean-François Lyotard)의 “숭고”(the sublime)(칸트의 『판단력 비판』에서 나온 개념으로 어떤 개념에 적합한 대상을 표상하지 못하는 경우에 일어나는 미적 현상, 매우 강력하지만 동시에 모호한 감정이고, 즐거운 동시에 고통을 수반하는 감정)의 개념으로 정의되는 모던 예술품이 아니라 표상할 수 없는 어떤 본질을 떠올리려는 시도에서 벗어나 삶 자체를 예술로 만드는 포스트모던 예술품들을 전시한 갤러리이다. 즉 “표상할 수 없는 것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이 보여주고자 하는” 모던 예술의 숭고함 대신에 포스트모던 예술, 특히 앤디 워홀(Andy Warhol)로 그리고 나미(안서현)의 생일선물로 공수되어온 <마릴린>의 작가 로버트 인디애나(Robert Indiana)가 대표하는 팝아트(pop art)는 일상 현실 속에서 발견되는 평범함을 주장한다. 대중들이 소비하는 캠벨 수프 캔, 코카콜라 병, 햄버거, 마릴린 먼로의 핀업 사진, 만화처럼 일상적 현실을 그 환경으로부터 떼어내어 캔버스 위에 놓기만 하면 예술품이 될 수 있다는 것이 팝아티스트들의 예술관이다. 따라서 팝아트는 상품화된 세계 속에 전적으로 편입된 예술이라고 볼 수 있다. 이 영화 또한 자연주의 영화에서처럼 훈의 저택이라는 현실 환경을 본원적 세계로의 진입을 위한 매개물로 다루는 대신에, 귀중한 미술품들을 마치 판매대의 고가 상품들처럼 진열한 갤러리의 스펙터클로 구축하고 있다.

오늘날 팝아트 작품들을 천문학적 가격에 거래하는 아트페어와 옥션에서 볼 수 있듯이, 포스트모던 예술품들은 상류층 소비자들이 저택을 일종의 성공과 쾌락의 기념 갤러리로 꾸밀 수 있는 재력과 고급스러운 취향의 기호들로 거래된다. 따라서 보드리야르(Jean Baudrillard)가 지적하듯이, 팝아티스트들이 주장하는 평범함과 일상성은 또 다른 범접할 수 없는 숭고함의 포스트모던 버전이 되는 역설에 빠지고 만다. 훈의 대저택 또한 재벌의 갤러리처럼 고도의 세련미와 숭고미를 더해가는 포스트모던 대중문화와 소비 시스템의 사회에서 기호의 소비 또는 차이화를 확인할 수 있는 닫힌 위계적인 인공적 공간의 스펙터클을 구축하고 있다.

 

3. 포스모던 남성성과 (비)과시적 소비문화의 아비투스

태어날 때부터 모든 것을 다 가진 듯 한 훈은 포스트모던 시대의 헤게모니적 남성성, 메트로섹슈얼리티(metrosexuality)을 구현한 대표적인 메트로섹슈얼(”도시적이고 성공적이고 세련되며 외모도 잘 다듬어진 현대적 남성 이성애자“)이다. 은이와의 정사 장면에서 다빈치(Leonardo da Vinci)의 인체 비례도의 황금비율의 몸을 패로디하듯 당당하게 팔을 벌리고 서있는 훈의 잘 가꾸어진 몸은 그 자체로 특정한 계급이나 계층의 표시가 된다. 이렇게 잘 다듬어진 몸과 최신 감각의 패션으로 외모를 가꾸는 감각적 스타일뿐 아니라 고급 와인을 식별하여 즐기고 베토벤을 피아노 연주로 즐길 수 있는 세련된 취향과 감수성을 갖춘 훈은 “스타일의 미학”을 추구하는 메트로섹슈얼이다. 최근 영국여왕 장례식에서 다시 한번 메트로섹슈얼의 진면목을 보인 데이비드 베컴처럼 훈은 세련된 외모의 소유자일 뿐 아니라 남다른 매너, 재력과 성공, 행복한 결혼, 모범적인 아버지 역할 등, 이성애적 남성의 모든 성취를 다 가진 것처럼 보이는 남자이다.

사실 훈의 매너(manner), 그리고 상류층의 풍습(manners)은 사회적 충돌을 줄이고, 상대에 대한 배려로 서로를 편하게 해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의 역할을 한다. 그들의 매너와 풍습은 열등한 계급은 성취할 수 없는 상류층의 신분을 과시하는 차별화의 수단으로 사용된다. 훈이 기분 내킬 때 병식(윤여정)을 여사님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나미에게 친절한 태도를 강조하는 것도 사실은 근본 없는 천한 것들에 대한 우위를 과시하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매너를 가르치는 것이다.

이 영화의 스펙터클은 부르디외(Pierre Bourdieu)의 아비투스(habitus) 개념이 설명하는 문화적 취향과 자본에 의한 암묵적 지배/피지배 관계와 구별짓기로 통제되는 닫힌 세계를 이룬다. 고도의 세련미를 강조한 재벌의 갤러리 같은 훈의 저택은 돈이 바로 권력인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사회의 포스트모던 소비문화가 만들어낸 상품화된 세계에서 기호의 소비 또는 차이화의 기술을, 즉 아비투스를 가장 잘 확인할 수 있는 공간이다. 사실 재벌과 상류층의 미술관 경영 및 미술품 수집은 경영에 대한 큰 부담 없이 고상함을, 계급의 표식으로 기능하는 문화적 취향을 과시할 수 있고, 상속과 증여가 쉽기 때문에 재테크 측면에서도 그들의 적절한 문화 사업이 되기도 한다.

 

문화적 상징 및 생활양식을 대변하는 취향과 계급 사이의 밀접한 연관성을 설명하는 아비투스 개념에 따르면, 특정 계급의 구성원들이 가지는 취향은 선천적인 어떤 것이 아니라 경험과 생활 속에서 획득한 "구분하고 평가하는 후천적 성향“이다. 따라서 취향은 결국 소유하고 있는 물적·비물적 '자산'에 의존한다는 것이다. 훈이 마시는 VVIP를 위한 와인처럼 우리가 소비하는 모든 상품들 내에는 계급과 취향과 위계가 있으며, 그것을 소비한다는 것은 하나의 “기호”로서 드러내고 과시하면서 소비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푸드스타일리스트 수준의 병식이 꼼꼼하게 챙겨 대령하는 훈의 와인과 음식의 취향은 차별화의 논리에 따라 상품들에 의해 개인의 개성과 취향, 욕구가 만들어지는 것임을 보여준다.

특정한 계급이나 사회적 지위를 표시하는 것으로서의 소비는 상류층을 선망하는 “천한 것 들”인 하위 계층의 모방과 허위의식의 도전을 받을 수 있다. 상품을 매개로 욕망을 생성하고 소비습관을 통해 구별짓기를 하는 부르주아들은 명품 브랜드 속에 자신의 욕망을 투사함으로써 현실적으로 도달할 수 없는 어떤 계급 혹은 계층에 대한 욕망을 상상 속에서 해소한다. 그들이 명품을 구입하는 데 지불하는 돈은 상품 그 자체에 대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신체를 장식하고 있는 브랜드에 시선을 주는 익명의 타자들의 선망을 이끌어내는 데 대한 대가로 지불하는 것이다. 이러한 욕망의 메커니즘 속에서 부르주아들의 과시적 소비는 혼란을 겪게 된다. 따라서 다른 계급에 의해 모방되는 과시적 소비의 형태로부터 자신들의 계급적 표시를 보호하기 위해 훈과 그의 가족과 같은 초상류층이 취하는 태도는 역설적으로 비과시적 소비를 통해서 드러나기도 한다. 흔히 예의바름과 겸손함으로 자신을 나타내는 품격있는 태도 속에서 발견되는 비과시적 소비 행동은 결국 한층 더한 사치 혹은 과시의 증거이자 보다 교묘한 계급적 차별과 다르지 않다. 왜냐하면 그러한 비과시적 소비는, 덜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가격에 대한 흔적을 지우는 것이기 때문이다. 비과시적 소비에서 중요한 것은 일반인들은 그것의 가치를 알아차릴 수 없게 한다는 것, 그래서 모방할 수 없게 한다는 데에 의미가 있다. 예컨대, 해라의 패션과 머리는 일종의 청담동 며느리룩같은 계급의 문화지수로서의 역할을 하며, 언뜻 심플하게 보이는 디자인의 옷과 그녀의 단정한 머리는 비과시적 소비를 통한 차별적인 소비의 예로 간주될 수 있다. 훈이가 마시는 와인, 은이에게 성은과 함께 내리는 와인, 그리고 해라에게 마셔보라고 권하는 와인(VVIP 대상 판촉 와인) 등은 비과시적으로 볼 수도 있지만, 차이를 두드러지게 나타내는 기호가 된다.

 

4. 비정규직 하녀들의 노동과 섹슈얼리티

 

이 영화가 구축한 스펙터클은 집주인 훈의 욕구 충족을 위해 최적화된 인위적인 닫힌 세계로 엄격한 위계질서와 구별짓기의 원칙이 작동하고 있는 시스템이다. 병식과 은이는 집주인이 만족할 수 있는 최고 수준의 서비스를 제공하고 유지하는 근로관계를 맺은 비조직화된 고용 형태, 즉 언제든 쫓겨날 수 있는 비정규직 하녀이다. 특히 선배 하녀 병식은 그와 그의 가족에게 꼭 필요한 존재가 될 만큼 그 역할을 잘 수행해내는, 신물 나는 “아더메치한 짓“을 지속적으로 해낼 수 있는 뼛속까지 하녀 근성이 충만한 프로페셔널한 하녀이다. 따라서 병식은 주인집에서 일어나는 일에 철저하게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며, 냉담한 “보는 자”의 입지를 유지할 수 있다. 마지막에도 당당하게 그 집을 떠날 수가 있다. 반면에 젊은 하녀 은이는 훈의 유혹에 “부적절한” 개입을 하고 싶은 욕망에 빠지고 만다. 그러나 병식과 은이 뿐 아니라, 훈이 군림하는 대저택에서 여왕처럼 살고자 하는 마님 해라 또한 다산을 다짐하면서 재생산 기계로서의 자신의 존재감을 확인하고자 하는 정규직 하녀일 뿐이다. 물론 유산을 강요당한 비정규직 하녀와는 차별성이 두드러지지만, 해라와 은이 모두 훈에게는 하녀일 뿐이다. 이러한 사실은 앞서 언급한 훈이 와인을 마시는 해라와 욕조를 청소하는 은이를 동시에 동일선 상에서 보고 있는 장면에서도 확인될 수 있다.

원작과 50년의 시차를 두고 있지만 리메이크의 하녀는 오히려 원작보다 더 시대적으로 거슬러 가 전근대적인 시대의 “천민”(노예)의 반열로 전락한 것처럼 보인다. 1960년대 근대화 시기에 가장으로서의 책임과 근대성의 다양한 욕망 사이에서 갈등을 했던 동식과는 달리 21세기 후기자본주의 사회에 경제위기 따위는 전혀 상관없는 특권을 갖고 태어난 신흥귀족 훈은 그의 대저택에서의 귀족놀이를 위해 천민으로 전락한 하녀들이 필요하다. 이 “천한” 하녀들이 타자로서 제 자리에 있지 않고 기존 사회 질서를 교란하게 되면 크리스테바(Julia Kristeva)가 일컫는 비체(abject)가 되어 쫓겨난다. 일상의 가사 노동을 전문적으로 대신해주고 때론 성적 환상의 파트너까지 되어줄 수 있는 마님의 대용물로 하녀는 시대를 막론하고 누구나 소유하고 싶어 하는 부의 상징이다. 그러나 신분상승을 위해 자신의 성을 이용하려는 순간 하녀는 괴물, 팜므파탈로 몰려 비체가 되어 밀려나와 버려지고 만다.

마님이지만 훈에게는 정규직 하녀일 뿐인 해라는 자신의 입지를 확고하게 지키고자 비정규직 하녀 은이의 뱃속에 있는 훈의 아이를 유산시키는 잔인한 짓을 감행한다. 해라가 몰래 바꿔친 독약을 보약으로 먹은 은이는, 해라의 부재를 틈타 그녀의 욕조에서 마님 놀이를 하다 뱃속의 아이를 핏덩어리의 “비체”로 유산하게 된다. 그 집에서 자신에게 일어난 무서운 일들로 폐인이 된 은이는 원작의 하녀처럼 복수를 결심하지만, 순진하고 맹한 그녀의 복수는 원작의 악녀 하녀의 복수만큼 강한 전복성을 발휘하지 못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러나 이 영화의 엔딩은 그녀의 복수가 이제 시작이라는 것을 시사한다.

원작의 하녀는 에로틱한 “유혹녀”로서의 하녀 역할을 수행함으로써 동식을 거세시키고 타락을 가속화시켜 중산층 가정의 닫힌 시스템을 깨뜨리는 전복성을 발휘한다. 반면에 훈의 유혹을 거부하지 않고 피아노를 치는 훈이를 근사하게 생각하는 은이에게는 그러한 폭력적인 힘이 부재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역설적이지만 이러한 부재가 오히려 그녀로 하여금 훈의 돈이 권력을 행사하는 또한 돈의 맛에 중독된 그와 그의 가족을 감금하고 있는 닫힌 세계로부터 탈주할 수 있는 구원을 가능하게 만든다.

 

5. 은이의 복수와 “보는 자”로서의 나미

 

이 영화는 휘황찬란한 불야성의 도시 뒷골목의 분주한 식당에서 힘들게 일하는 여자들의 모습, 그 가운데 한 건물에서 유흥업소 여자인 듯 보이는 여자가 술병을 던져 버리듯 몸을 밤거리 바닥으로 날려 떨어지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소비와 향락의 도시 밤거리에 쓰레기처럼, “비체”가 되어 떨어져 자살한 여자는 버리기 위해 생산하는 자본주의 소비 사회에서 버려진 쓰레기 같은 존재임을 보여주는 광경을 연출한다. 미처 다 소비되지 못한 음식물 쓰레기를 양산하는 훈의 대저택에서 그 쓰레기를 먹어 치우든 버리든 어쨌든 깨끗하게 치우는 역할을 맡은 하녀 병식과 은이 역시 언젠가는 쓸모가 없어지면 또는 아직 쓸만해도 냉정하게 버려지는 쓰레기, 비체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길바닥에 떨어져 시신이 된 그 비체는 곧 지워질 흔적만 남기고 치워지지만, 그 흔적을 본 은이는 그 죽은 여자와 동일시하는 자신을 본다. 이렇게 시작한 이 영화는 은이의 자살과 그것을 불안한 시선으로 지켜보는 나미, 그리고 정원에서의 그녀의 생일파티로 끝난다.

 

사실 이 영화에서 일어나는 중요한 일들은 스펙터클의 이면에 위치한 하녀용 계단과 복도, 그리고 주방과 병식의 방, 은이의 방에서, 즉 막후에서 일어난다. 우리는 거기서 그 집에서 일어나는 아더메치한 짓에 대한 병식의 분노와 밑바닥까지 파헤쳐진 가진 자들의 무서운 본성과 야만이 주는 서스펜스를 감지한다. 따라서 이 영화의 세련된 스펙터클은 그 막후에 이러한 서스펜스를 억압하고 있으며, 이미 해체의 실마리를 내포한 채 구축되었음을 주목할 수 있다. 마침내 은이가 화려한 샹들리에를 타고 스펙터클을 가로질러 활공하는 장면을 연출하는 연극성을 통해 닫힌 세계의 스펙터클의 해체와 전복 그리고 그것으로부터의 탈주의 가능성을 보여주게 된다. 이러한 엔딩은 이 영화가 자연주의적 세계의 블랙홀과 같은 심연으로 부터의 탈주보다는 스펙터클의 막후에서 나와 그것을 가로지르는, 마치 스크린을 가로지르는듯한 활공을 통해 해체와 탈주를 보여주는데 더 관심을 두고 있음을 보여준다.

은이가 할 수 있는 복수는 병식에게 한 말처럼 “찍소리라도 내는 것' 뿐, 그저 자신의 죽음을 스펙터클화하여 그들에게 보여주고 나미에게 기억할 것을 부탁하는 것뿐이라고 말할 수 있다. 샹들리에에 매달려 비상하는 불새처럼 춤추며 소실되어가는 은이의 몸은 마치 소신공양을 하는 화녀처럼 보인다. 그녀가 목격했던 투신자살한 여자처럼 자신을 날려 비체화하는 스펙터클을 연출한 장면은 이 영화에서 연극성이 가장 두드러진 부분이자, 지금까지 구축해온 스펙터클 속에 갇힐 수 있는 영화를 해방시킬 수 있는 전복성을 발휘하는 엔딩을 제공한다.

들뢰즈의 논지에 따르면, 이 영화의 연극성은 영화가 자연주의로 진입하는 것을 방해하는 요인이 된다고 한다. 은이가 연출한 스펙터클의 연극성 또한 이 영화가 자연주의로 진입하는 것을 방해한다는 것이다. 샹들리에에 매달린 은이의 검은 옷에 불이 붙어 타오르자 스프링클러가 물을 쏟아내고 훈과 가족들은 무사히 밖으로 피하며 창문을 통해 그 장면을 흘깃 본다. 그 와중에 훈이는 그 장면을 못 보게 나미의 눈을 가리지만, 나미는 물이 흘러내리는 창유리를 통해 그 장면을 바라보며 똑똑하게 기억한다. 들뢰즈의 논지로 설명한다면, 이 장면의 연극성은 영화가 다루고자 한 훈과 그의 가족의 도착적이고 잔인한 충동을 보여주는 장면을 창유리를 통해서 또는 연극 무대 위에 벌어지는 것을 보는 것처럼 보이게 만들어 외관만 자연주의에 머물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오히려 이 장면의 연극성과 그것을 “보는 여성”(woman seer)으로서의 나미의 역할, 즉 “여성 관객성”을 통해 지금까지 집중해서 구축해온 닫힌 스펙터클을 해체시키고 벗어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준다는 해석이 더 설득력이 있다.

은이의 복수는 찍소리 내기의 소극적 저항만은 아니다. 그녀를 타자화된 비체로 만들어 내쫓은 훈과 그의 가족 앞에서 자신의 비체화를 스펙터클로 연출한 그녀의 의도는 그녀가 받은 모욕을 그들에게 되돌려주는 저항의 역량을 발휘하기 위한 것이다. 비체로서 가질 수 있는 유머와 조롱의 기술로 자신에게 투사한 그들의 불안과 공포를 되돌려줌으로써 모욕을 주는 보복을 하기 위한 것이다. 아버지의 돈에 굴복하지 않는 은이라는 여자에 대한 기억을 당부하는 유언(“나미야, 너한테 정말 고마웠는데 이렇게 돼서 정말 미안해. 네 동생들한테도 아줌마 꼭 기억하게 해줘야 돼.”)은 그녀의 또 다른 의도를 말해준다. 은이가 그녀의 죽음을 스펙터클화함으로써 나미로 하여금 보고 기억하도록 유도한 것은 나미가 살고 있는 우아하고 세련된 세계의 스펙터클의 이면에 있는 야만과 공포의 세계이다. 그리고 바로 이 세계가 자연주의 영화가 탐구하여 드러내 보이고자 한 세계인 것이며, 나미에게 이러한 세계를 볼 수 있는 “보는 자”(seer)로서의 역할을 은이가 요구한 것이다.

따라서 이 영화는 스펙터클, 연극성의 전복성과 보는 자로서의 여성 관객성을 통해 자연주의 영화의 한계를 넘어 보다 긍정적인 결과를 가져다 줄 수 있는 전복성을 구현하는 현대 영화를 지향하고 있다는 평가에 이를 수 있다. 그러나 아직 은이의 복수는 끝나지 않았고 다만 시작일 뿐이다. 이에 임상수의 차기작 <돈의 맛>(2012)에 “어렸을 때 우리 집에서 자살한 하녀”를 기억하는 성장한 나미를 등장시킨 것은 은이의 복수와 유언을 실천하기 위해서라고 볼 수 있다. 이 영화는 은이에 대한 기억을 간직한 나미가 그녀의 유산한 아이를 대신하여, 자기 가족들이 사는 방식이 아닌 다른 삶을 살 수도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시사하는 것으로 엔딩을 맺고 있다.

 

6. 나미의 생일파티

나미의 생일파티로 끝나는 이 영화의 엔딩은 은이의 자살에도 불구하고, 훈의 저택은 아무런 “존재론적 파국”도 없이 “정상적인” 운영을 하고 있는 후기 자본주의 사회가 직면하고 있는 “관리되는 세계”의 궁극적 파국을 보여준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그러나 지젝(Slavoj Žižek)도 설명하듯이, 이러한 “관리되는 세계”는 진보된 문명사회가 아니라, 오히려 야만주의 문명으로 돌아간 사회이며, 이 파티는 바로 이러한 지적을 입증해 보인다.

나미의 생일파티는 은이의 스펙터클의 전복성을 상징하는 화재가 가져온 엔트로피 상태의 저택 공간이 아니라 정원에서 열린다. 영어 사용, 샴페인, 생일선물로 준비된 고가의 팝아트 판화 등, 과도하게 양식화된 의식으로 진행되는 파티는 술에 취해 흐트러진 모습의 해라와 훈, 병식과 은이를 대체한 새 하녀들의 어색한 모습, 갑자기 어른이 된 것 같은 무표정한 파티의 주인공 나미의 모습 등으로 상당히 그로테스크한 장면으로 연출된다. 훈의 화려하고 세련된 인공적인 세계의 스펙터클을 구성하는 최고급 취향과 구별짓기의 지표들을 클리셰로 패로디하는 나미의 생일파티에서 발견하게 되는 것은 상류층의 아비투스의 진부성, 즉 “일상의 진부성”과 환멸뿐이다.

나미는 파티의 주인공이지만 관객, “보는 자”의 역할을 하고 있다. 여기서 “보는 자”란 클리셰 속에서 그 너머에 있는 본질의 세계를 볼 수 있는 자를 의미한다. 그러나 그러한 역할을 수행하기엔 아직 어린 나미가 보여주는 파티에 온 다른 누군가를 찾는 듯한 불안하고 슬픈 시선은 관객에게 그리고 <돈의 맛>의 성장한 나미에게 잊혀지지 않는 잔영을 남긴다.

 

출처: 『시장과 인문학』(경북대학교 출판부, 2012)에 실린 「시장과 인문학 열 번째 강의: 비정규직 하녀의 노동과 섹슈얼리티」(160-179)의 강의 내용 일부를 참고로 한 임상수의 <하녀>에 대한 새로운 글쓰기이다.

사진출처: 네이버 영화

 

 

글·정문영
영화평론가, 계명대학교 영어영문학과 명예교수. 국제영화비평가연맹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다양한 매체와 장르의 텍스트들을 상호텍스트(intertext)와 팔림세스트(palimpsest)로 읽는 각색연구가 주요 관심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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