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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 디플로’의 한국식 번안
‘르 디플로’의 한국식 번안
  • 안영춘
  • 승인 2012.02.13 15:1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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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의 ‘르 디플로’ 읽기

대회전을 앞둔 제도권 정치의 징후적 전경은 바로 ‘신장개업’이다. 크든 작든, 원내 진출이 점쳐지는 정당들은 이번에도 예외 없이 간판을 바꿔 달았다. 그러나 ‘정치 상가’에 아무리 풍선인형이 너울대도, 사람들의 눈길이 그곳으로만 쏠리는 것은 아니다. 그 와중에 영화 <부러진 화살>과 ‘나꼼수 비키니 시위’라는 노점 좌판은 문전성시를 이뤘다. 우리 사회의 다양성을 보여주는 사례로 해석할 수 있다. 하지만 그 다양성도 대중이 자신의 관심, 나아가 유희와 쾌락을 주체화했을 때 따라오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정치의 공급자 독점 시대가 저문 건 확실하다. 간판 교체 따위로 돌이킬 수 없다.

주류 언론들도 <부러진 화살>과 ‘나꼼수 비키니 시위’ 현상을 호들갑스럽게 보도했지만, 핵심적인 것 하나를 빠뜨렸다. 정작 그들 자신에게 던져진 메시지에는 무관심했거나, 무지했던 것이다. 이 현상들은 주류 언론에도 복잡한 생각거리를 던진다. 지난해 <도가니>에 이어 <부러진 화살>은 극영화의 메타저널리즘 가능성을 보여준다. 기성 언론들이 외면했거나 소홀히 했던, 심지어 열 올리고도 충분히 사회적 관심을 환기하지 못한 사안들을 영화는 탁월하게 의제화했다. ‘나꼼수’ 현상이야 두말할 나위 없다. 일개 팟캐스트 라디오 해적방송은 기존 저널리즘 문법을 낙후시키다시피 했다.

그러나 잡음도 들린다. <부러진 화살>은 사실관계 왜곡 논란에 휩싸였고, ‘나꼼수 비키니 시위’는 일대 페미니즘 논쟁으로 번졌다. 우리는 생각을 한 단계 더 밀고 나아가봐야 할지 모른다. <부러진 화살> 논란에 대해 ‘영화는 영화일 뿐’이라고 쿨하게 반응하는 것은 영화미학적으로 타당하다. 하지만 그것이야말로 공급자 중심의 태도가 아닐까. 수용자가 플롯을 ‘사실’로 받아들이는 한, 영화는 사실 재현의 규범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부러진 화살>은 사실 자체를 왜곡하거나 없는 사실을 끼워넣지 않았지만, 다중적 모순을 선악 이분법으로 단순화한 측면이 없지 않다. 기성 언론이 애용해온 문법이다.

‘나꼼수 비키니 시위’는 자기 몸의 결정권과 관련해 복잡한 논쟁 지점들을 낳았다. 일부 주류 언론도 지면을 통해 논쟁에 가담했다. 주로 문제시된 것은 나꼼수 사람들의 언어적 태도였다. 그러나 여기서도 결정적으로 빠진 게 있다. 나꼼수 사람들을 비롯해 정상성의 범주에 드는 남성, 그리고 그들의 시선을 주로 대변하는 주류 언론의 공범 관계다. 이들은 여성의 몸에 대해 대량소비와 유통을 각각 담당한다. 문화방송 여성 기자의 퍼포먼스는 그 본질을 폭로한다. ‘가슴이 터지도록’과 ‘가슴이 쪼그라들도록’은 두 여성 사이에서 개별성을 이루지만, 남성의 시선을 만나 상품으로 등급화된다.

두 사례의 주체들은 모두 이분법적 정치윤리의 경향성을 보인다. 그것이 좋은지 나쁜지는 논쟁적이지만, 충분치 못한 것만큼은 분명하다. 주류적 비평도 끝까지 나아갔는지 의문이다.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월호에서는 이와 관련해 적잖은 시사점을 찾을 수 있다. 이를테면 이집트 혁명에서 결정적 역할을 한 것은 인터넷과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가 아니라, 이에 대한 정권의 차단 조처였다는 사실 앞에서 공포영화의 반전 같은 느낌을 받게 된다(6면 ‘인터넷 차단, 무바라크의 부메랑’). 우리는 최저임금 투쟁을 벌이면서도 왜 최고소득 상한제를 한 번도 상상해보지 못했을까(1, 12~13면 ‘최고소득 상한을 정하라’).

<르 디플로>를 읽는 재미 가운데 가장 솔솔한 것은 외국 텍스트를 한국 사회의 이슈로 번안해 대입해보는 재미가 아닐까 한다. 이번호는 그렇게 읽어보길 권한다.


/ 안영춘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한국판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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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영춘 editor@ilemond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