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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희의 문화톡톡] 세계유산 조선왕릉 가는 길- 영조Ⅱ
[김정희의 문화톡톡] 세계유산 조선왕릉 가는 길- 영조Ⅱ
  • 김정희(문화평론가)
  • 승인 2022.12.30 11:4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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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를 사랑하는 자는 감히 남을 미워하지 않고

부모를 공경하는 자는 감히 남을 깔보지 않는다.

사랑과 공경을 부모 섬김에 극진히 하면

덕교(德敎)가 백성들에게 입혀져 사해(四海)에

본보기가 될 것이니, 이는 천자(天子)의 효도이다.
 

- <효경> 천자장

 

소령원  ©김정희
소령원 ©김정희

영조와 조선왕릉 이야기 – 소령원과 육상궁 

영조의 어머니 숙빈 최씨와 소령원  
숙빈 최씨(1670~1718)는 7세에 궁녀로 입궁하여 1693년(숙종19)에 아들을 낳았는데 아이는 두 달 만에 세상을 떠났다. 1694년(숙종20) 갑술환국으로 인현왕후가 왕비로 복위되었고, 숙빈 최씨는 영조(연잉군)을 낳고 숙의가 되었다. 1695년(숙종21)에 귀인이 되었고, 1699년(숙종25) 숙빈으로 봉해졌다. 1716년(숙종42)에 병이 들어 사가로 나가 치료하던 중  1718년(숙종44) 49세로 세상을 떠났다. 영조는 묘소 근처에 시묘막을 지어 어머니의 죽음을 애도하였다. 지금도 숙빈 최씨의 무덤인 소령원에 영조가 시묘살이하던 흔적이 남아 있다고 한다. 영조는 즉위 후 어머니에 대한 추숭 작업을 계속하였는데 어머니의 묘와 사당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숙빈의 아버지(영조의 외할아버지)를 영의정에 추증하였다. 영조실록에 숙빈의 아버지를 추증하고 눈물을 흘리는 장면이 상세히 나와 있다. 

 

소령원  ©김정희
소령원 ©김정희

임금이 해숭위(海崇尉) 윤신지(尹新之)의 문집(文集)을 열람하다가 비로소 창빈(昌嬪)ㆍ인빈(仁嬪)의 아버지에게 모두 의정(議政)을 추증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드디어 이조 참의(吏曹參議) 서종옥(徐宗玉)을 불러 하교하기를,
“나는 선왕(先王)의 측실(側室)의 아들로서 외람되이 감히 감당할 수 없는 자리를 더럽히고 있는데, 외가(外家)가 한미하여 친속(親屬) 가운데 태복시(太僕寺)에서 복역(服役)하다가 그 일신을 마친 사람이 있으니, 내가 외가(外家)를 대우한 것이 너무 야박했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사친(私親)에 대한 겸공(謙恭)하는 뜻을 본받으려고 한 때문이다. 그리고 사친의 아버지를 증직(贈職)시키는 일은 이미 선조(先朝)의 구례(舊例)가 있으니, 마땅히 따라서 행해야 할 것이다.” 하고, 인빈(仁嬪)의 아버지 김한우(金漢祐)의 예(例)에 의거하여 영의정에 추증하게 하고 나서 이어 조보(朝報)에는 내지 말게 하였으니, 이는 더 크게 떠벌리고 싶지 않아서였다. 이날 임금이 서종옥을 면대하여 목이 메어 눈물을 흘리면서 한참동안 말을 하지 못하였다. 말을 마치고 나서 또 눈물을 흘리면서 이르기를,
“조금 전에는 마음이 편치 못하여 즉시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엊그제 능상(陵上)에서 함원(咸原)을 대하였을 적에도 슬퍼서 말소리를 제대로 낼 수가 없었다. 나도 또한 그러는 것이 지나친 것인 줄 알고 있으면서도 금할 수가 없었다.” 하였다.

대개 임금이 자인(慈仁)은 여유가 있으나 강단(剛斷)은 아주 부족했기 때문에 말이 선고(先故)에 미치게 되면 반드시 눈물을 흘렸고, 말이 시사(時事)에 미치게 되어도 반드시 눈물을 흘렸으며, 심지어 대신(大臣)에게 출사(出仕)할 것을 면려할 때에도 눈물을 흘렸다. 
- <영조실록> 1734년(영조10 2월18일 ) 

조보(朝報)에 알리지 말라는 장면에서 영조의 복잡한 마음이 전해지는 듯하고 임금의 눈물에 대한 부분이 인상적이다. 

 

소령원비  ©김정희
소령원비 ©김정희

 

영조는 어머니의 묘소를 1744년(영조20)에 소령묘라고 올렸다가 1753년 (영조29년)숙빈에 봉직된 지 60년이 되는 해를 기념하여 소령원으로 고쳤다. 

숙빈 최씨에게 화경이라고 추시하고 묘(廟)는 궁(宮), 묘(墓)는 원(園)이라 하다 
- <영조실록> 1753년(영조29 6월25일 ) 

소령원에는 숙종 때 세운 묘표, 영조가 세운 신도비와 소령묘갈, 소령원표 4개의 비석이 있다. 영조가 친히 지은 묘갈문을 읽어보면 영조의 어머니에 대한 사랑이 얼마나 깊었는지 가늠해 볼 수 있다.


“...지금 비문을 짓는데 문임의 신하를 두고 내가 직접 소략하게 쓰는 것은 또한 자식으로서 사친의 삼가는 마음을 체득한다는 의미이다. 붓을 잡고 글을 쓰려고 하니 눈물과 콧물이 얼굴을 가린다. 돌이켜 생각해보니 옛날의 감회가 더한층 깊어진다.” 1744년 7월 15일
 

25년 동안 길러주시고 무술년 봄에 떠나셨습니다. 
효성을 바치고자 하지만 어머님이 기다리지 못하심이 
나무가 바람에 고요할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비록 제 심정을 억누르려 하나 이 마음 더 없이 무겁습니다.
지난날 곁에서 모시던 일이 아득히 꿈만 같습니다.
매번 사당에 절할 대마다 목이 메이고 눈물이 쏟아집니다. 
- <육상묘고유제문초>

 

숙빈최씨사우제문원고
숙빈최씨사우제문원고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아아! 소자가 어리고 선반께서 살아계실 때에는
잠시 떨어지는 일도 오히려 차마 하지 못했는데
지금은 계절별 제사도 또한 몸소 올리지 못했습니다. 
소자의 섭섭한 심정이야 비록 돌아볼 겨를이 없더라도 
하늘에 계시는 선빈의 혼령께서는 
틀림없이 아득한 저 세상에서 섭섭해 하실 것입니다. 
이런 생각이 들 때마다 늘 한밤중에도 울음을 삼키게 됩니다. 
아아! 소자는 무술년 이후부터 세상에 대한 관심이 모두 사라져 
항상 아버지의 건강이 회복된 뒤에는 
묘를 지켜서 평소에 다하지 못한 정성을 다하리라 생각했습니다. 
- <숙빈최씨궤연급정빈이씨사우치제문> 1726년영조2

임금이 최숙빈과 효장세자의 묘(廟)에 거동하였다. 이날 비가 심하게 내리므로 여러 승지들이 이를 정지하도록 청하려고 청대(請對)하기를 요구하였는데, 임금이 여가(輿駕)를 타고 나오면서 말하기를, “경들은 날씨가 궂은지 맑은지를 가려가면서 어버이를 뵙는가?” 하고 아울러 이들을 추고하라고 명하였다.

- <영조실록> 40권, 영조 11년 3월 11일 

 

보물 숙빈최씨 소령원도(화소정계도)  한국학중앙연구원
소령원화소정계도
능원에 산불이 번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일정한 거리까지
초목을 불살라 제거하는 화소(火巢)를 표시한 것이다.      
출처 : 한국학중앙연구원

 

영조는 1740년(영조16) 보광사를 소령원의 능침 사찰로 삼았다. 대웅보전 바로 옆에 숙빈 최씨의 신위를 모신 어실각이 있다. 영조가 심었다고 전해지는 향나무도 있다. 

육상궁 
영조는 즉위한 해인 1724년 어머니를 위한 사당을 지어 숙빈묘(淑嬪廟)라 했고, 1744년(영조20)에는 육상묘(毓祥廟)라고 올렸다. 1753년(영조29) 궁원제(왕을 낳은 후궁(사친)의 사당과 무덤을 궁과 원으로 높이는 제도)를 제도화면서 육상묘를 육상궁(毓祥宮)으로 승격시켰다. 

육상궁은 현재 청와대 내에 있다. 고종과 순종대에 연호궁, 저경궁, 대빈궁, 선희궁, 경우궁이 육상궁 경내로 옮겨졌고, 1929년 덕안궁이 옮겨지면서 칠궁이라 부르게 되었다. 
연호궁은 추존 진종(효장세자)의 사친 정빈 이씨의 사당인데, 1778년(정조2) 정빈묘를 연호궁으로 승격시킨 것이다. 선희궁은 추존 장조(사도세자)의 사친 영빈 이씨의 사당으로 1788년 (정조12) 의열궁이었던 사당을 선희궁으로 이름을 변경하였다. 옛 선희궁이 있던 곳에 빈 건물이 남아있는데  현재 국립서울 농학교 안에 있다. 대빈궁은 경종의 사친 옥산부대빈 장씨의 사당이다.  

소령원은 비공개지역이지만 궁능유적본부에서 시행하는 조선왕릉길 여행 프로그램을 통해 방문해볼 수 있다. 신청 경쟁이 매우 치열하지만 그런 절차쯤은 잊게 만드는 좋은 시간이 될 것이다. 왕릉을 다니면서 드는 느낌은 우리나라 자연이 가진 힘이다. 왕릉이 보존해온 자연으로 해서 세계유산이 될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고, 한편으로 등재된 세계유산은 ‘위험에 처한 세계유산’(World Heritagein Danger)목록에 들어갈 수도 있고, 등재가 삭제될 수도 있다는 점을 늘 기억해야 할 것이다.  

 

신도비각  ©김정희
신도비 ©김정희

조선왕릉을 찾아갈때 왕과 능의 이름이  쉽게 연결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헌릉은 태종과 원경왕후의 능이고, 헌종의 능은 경릉인데, 경종의 능은 의릉이다.세종과 효종, 추존 진종의 능은 모두 영릉이다. 그리고 서오릉, 동구릉, 서삼릉에  무슨 능이 있는지  검색을 하면 되겠지만,  능들이 그곳에 있게된 이유를 알기에는 한계가 있다. 우선 다음에 소개되어있는 숙종과 경종, 영조와 관련된 장소를 하나씩 따라가다 보면 역사속으로 조금은  더 가까이 갈 수 있을 것 같다. 

[19대 숙종] 
  명릉(숙종과 인현왕후, 인원왕후), 익릉(숙종의 첫 번째 왕비 인경왕후)
  대빈묘(옥산부대빈 장씨) - 고양 서오릉 
  소령원(숙빈최씨)   - 파주 소령원, 보광사 
                      
 [20대 경종] 
   의릉(경종과 선의왕후 )- 서울 의릉  
   혜릉(경종의 첫 번째 왕비 단의왕후) - 구리 동구릉
[21대 영조] 
   원릉(영조와 계비 정순왕후) - 구리 동구릉
   홍릉(영조의 첫 번째 왕비 정성왕후), 수경원(사도세자의 어머니 영빈이씨)

    -고양 서오릉 
    수길원(정빈이씨)- 파주 수길원 
    수경원터 – 연세대학교 박물관과 루스채플 
    영릉(효장세자(추존진종)와 효순왕후 조씨)- 파주 삼릉
    왕자·왕녀묘(화억 옹주묘)  - 고양 서삼릉 
    융릉 (사도세자(추존 장조) 와 헌경왕후 (혜경궁 홍씨)) - 화성 융건릉 
    육상궁-칠궁 

 

 

글 · 김정희(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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