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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영애의 시네마 크리티크] 영화 <영웅>이 소환한 1946년 한국영화
[송영애의 시네마 크리티크] 영화 <영웅>이 소환한 1946년 한국영화
  • 송영애(영화평론가)
  • 승인 2022.12.30 17:4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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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윤제균, 2022) 포스터

윤제균 감독의 영화 <영웅>이 촬영을 끝낸 지 3년 만인 지난 12월 21일에 개봉했다. ‘국내 최초 오리지널 뮤지컬영화’로 재구성된 안중근 의사의 마지막 2년의 삶을 통해 수많은 영웅을 만나게 된다.

안중근 의사와 가족, 동료를 비롯해 이름 모를 영웅 중에는 실존 인물도 있고, 가상 인물도 있다. 영화적 상상이 추가되었지만, 그 시기 각자의 위치에서 나름의 모습으로 영웅이었던 이들을 통해 우리의 과거와 현재 모두를 돌아보게 된다. ‘누가 죄인인가?’ ‘우리는 잘살고 있는가?’

그리고 영화 <영웅>을 보며 여러 다른 영화를 떠올리게 된다. 안중근 의사가 나오는 영화와 뮤지컬영화를 비롯해 뮤지컬 공연까지 생각나는 게 많다. 오늘은 그중 1946년 영화 두 편을 소개하며, 그 시기 한국영화 역사를 살짝 살펴볼까 한다.

 

- 1946년 이구영의 <안중근 사기>

한국영화데이터베이스(KMDb)에서 ‘안중근’을 검색하면, 22편의 영화, 방송 다큐멘터리 등이 검색된다. 그중 가장 오래된 영화는 1946년 이구영 감독의 영화 <안중근 사기>이다. 1946년에 개봉된 우리 극영화는 3월 25일에 개봉한 <안중근 사기>), 9월 7일에 개봉한 이규환 감독의 <똘똘이의 모험>, 10월 22일에 개봉한 최인규 감독의 <자유만세>까지 총 세 편이었다.

국내에서 영화 제작이 시작된 것은 1919년이었는데, 이후 서서히 제작 편수가 증가했다. 그래도 요즘처럼 연간 수백 편의 영화가 제작되는 수준은 아니었고, 20여 편 안팎으로 제작됐다. 1943년부터는 사실상 민간 차원의 영화 제작은 중단됐다. 조선총독부는 영화사를 통폐합했고, 전쟁 동원을 위한 친일 영화만을 제작했다.

1945년 광복 후, 우리 영화인들의 창작 욕구는 불탔지만, 영화를 제작하기가 쉽지 않았다. 일제강점기 국내 영화계의 자본과 기자재, 인력을 사실상 장악하고 있던 일본인들이 돌아가면서, 자본과 장비도 공백이 발생했다.

힘들게 완성된 영화는 영화관에서도 어려움을 만났다. 미군정 시기, 연간 200편이 넘는 미국영화가 수입되면서, 미국영화와 더더욱 비교될 수밖에 없었다. 제작과 개봉 모두 극복할 게 많았던 광복 후 한국 영화계였다.

광복 후 첫 개봉작 <안중근 사기>는 같은 제목의 공연을 원작으로 한 무성영화로 알려졌다. 같은 해 개봉된 다른 영화보다는 완성도가 높지 않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남아있는 자료도 많지 않은데, 필름도 유실되어 영화를 볼 수도 없다.

 

재개봉 신문 광고로 보인다. 동아일보 1948년 2월 29일 4면
재개봉 당시 신문 광고로 보인다. <동아일보> 1948.02.29 4면

연출과 편집을 당당한 이구영 감독은 일제강점기 국내 영화 역사에서 종종 등장하는 인물이다. 1923년 일간지에 영화 관련 글을 기고하던 이구영은 1924년 ‘조선배우학교’를 설립한 인물이기도 하다. 1924년 모든 제작인력이 처음으로 한국인이었던 영화, 그래서 ‘진정한 의미의 최초의 한국영화’라는 평가받기도 하는 <장화홍련전>(김영환)의 각본을 쓰며 영화계에 데뷔했다. 이후 영화사를 설립하기도 했고, 영화 제작도 시작한 극장 단성사에 선전부장으로서 나운규의 <아리랑>(1926), <금붕어>(1927) 등의 홍보에도 참여했다. 1930년대에는 <아리랑 그 후 이야기>, <수일과 순애> 등의 각본을 쓰고 연출도 직접 하기 시작했다.

이구영은 유성영화 제작이 시작되고, 조선총독부의 통제가 강화되면서, 작품 활동이 뜸하다가, 광복 후 <안중근 사기> 연극과 영화로 돌아왔다. 이후, 1947년에는 영화 <삼일혁명기>를 각색하고 감독했고, 1948년에는 윤봉춘 감독의 영화 <유관순> 각본을 썼다. 이후 50년대 중반까지 각본 작업을 좀 더 이어갔다.

 

- 1946년 최인규의 <자유만세>

1946년 개봉 영화 중에 현재 우리가 볼 수 있는 영화는 <자유만세>뿐이다. <안중근 사기>처럼 <자유만세>도 독립운동가가 주인공인데, 가상의 인물이지만 독립운동가와 조력자, 그리고 배신자의 모습을 담았다.

 

<자유만세> 스틸

흥행도 했고, 대만으로 수출도 됐다고 알려진 <자유만세>는 최인규 감독에게 면죄부를 주었다는 비판도 받았다. 최인규 감독은 광복 직전까지 참전을 독려하는 친일 어용 영화 <신풍의 아들들>(1945), <사랑의 맹세>(1945) 등을 연출했었다. <자유만세> 이후 최인규 감독은 <독립전야>(1948), <죄없는 죄인>(1948)을 더 연출했는데, ‘최인규의 광복영화 3부작’으로 불리기도 한다.

친일영화와 광복영화를 연달아 연출한 최인규 감독의 영화 중에는 <수업료>(1940), <집없는 천사>(1941), <사랑의 맹세>, <자유만세>, <독립전야> 등은 필름이 보존되어 있어, 같은 감독의 전혀 다른 세계관의 영화를 보며, 그 시기 우리의 역사를 새삼 돌아볼 수 있다.

한편 <자유만세>는 다른 차원의 역사적 증거로 평가할 수 있다. 현재 남아있는 필름은 개봉 이후 재편집된 것으로 추정되는 버전이다. 등장인물 중 월북한 배우가 나오는 장면이 삭제되어있는데, 덕분에 결론을 포함한 주요 장면이 사라졌다. 전쟁과 냉전 시기를 거쳐 정부의 표현의 자유 억압 역사 속에 영화는 변형됐다.

 

<영웅> 스틸

2022년 겨울, 안중근 의사는 스케일 큰 뮤지컬영화의 주인공으로 돌아왔다. 광복 직후 영화화된 안중근 의사와는 여러모로 다를 것이다. 일제강점기를 겪어낸 당시 관객의 반응도 요즘 관객과는 분명 다른 지점이 있을 것이다.

기록과 기억은 전승되고 있다. 여러 해석과 소설화, 연극화, 뮤지컬화, 영화화도 이루어져 왔다. 앞으로도 우리 역사와 더불어 영화 역사에 대한 관심, 그리고 관련한 다양한 시선의 창작물을 기대해 본다.

 

이미지 출처: 네이버 영화

 

 

글·송영애
영화평론가. 서일대학교 영화방송공연예술학과 교수. 한국영화 역사와 문화, 교육 관련 연구를 지속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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