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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필립의 시네마 크리티크] 이 땅에 없던 타자들의 로맨스, <오아시스>
[윤필립의 시네마 크리티크] 이 땅에 없던 타자들의 로맨스, <오아시스>
  • 윤필립(영화평론가)
  • 승인 2023.01.02 0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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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네이버 영화

멜로드라마는 연애담 즉, 로맨스를 통해 그것을 둘러싼 억압과 금기를 재현하며, 그럴 때 과잉된 에너지가 동원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산업적으로 이 장르에서는 주로 아름다운 남녀의 있을 법한 사랑 이야기가 선호된다. 그래서 멜로드라마 속 주요 캐릭터들은 뛰어난 외모와 특수 신분의 여성과 남성들이 차지하기 일쑤였다. 이것이 멜로드라마의 내용적, 형식적 클리셰라 할 수 있겠다.

멜로드라마는 이렇게 멋들어진 외피를 전면에 내세우며 관객들을 유혹하지만 어떻게 보면 그것은 사실 지금, 여기에서 일어나는 '우리'의 이야기라고 하기에는 다소 거리감이 있다. 사랑 이야기라는 점에서 공상과학을 대동하지 않아도 되는, 현실에 깊이 뿌리를 박은 이야기를 끌어올릴 것 같지만 사실 멜로드라마의 형식적 클리셰 자체가 이미 이 세상의 보편적인 사랑 이야기와는 거리가 먼 환상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멜로드라마는 결국 그러한 사랑이 세상 어딘가에는 분명 존재할 것이라 믿는 관객들의 그 '믿음'을 자극하는 것이라 볼 수 있으며, 그 점에서 시나리오 작가와 연출자는  '아름다운' 연애담 안에 핍진성을 부여하기 위해 적잖이 공을 들여야 한다. 그래야만 사랑과 결혼의 문제는 환상이 아니라 현실임을 이미 터득하여 잘 알고 있는 관객들을 설득할 수 있기 때문이다. 

멜로드라마를 향한 이러한 프레임은 한국영화에서도 유효하며 한국 관객들의 '멜로'에 대한 믿음 또한 여전히 강력하다. 적어도 이창동 감독이 <오아시스>(2002)를 통해 이 프레임에 균열을 가하기 전까지는 그것이 유일신 신앙과도 같은 것이었으니, 돌아보면 <오아시스>의 경이로움은 현재까지도 지속되는 듯하다.

 

출처: 네이버 영화

<오아시스> 직전까지만 해도 한국영화의 멜로드라마 속 주인공들은 관객들과 동일시가 쉽게 이루어졌다. 그래서 <접속>(1997, 장윤현 감독), <8월의 크리스마스>(1998), <봄날은 간다>(2001, 이상 허진호 감) 등에서 보여준 주인공들의 연애담은 ‘너’의 이야기지만 ‘나’의 이야기이기도 했고, 동시에 아프지만 아름다우면서도 아주 현실적인 이야기일 수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마주한 홍종두와 한공주의 연애담, <오아시스>

 

출처: 네이버 영화

전과 3범 홍종두(설경구)는 우연히 중증지체장애인 한공주(문소리)를 본 날 묘한 감정을 느낀다. 그런 종두를 통해 난생처음 이성을 알게 된 공주는 격한 혼란을 경험하지만 이내 종두를 향한 자신의 감정을 느끼게 된다. 서로의 감정을 확인한 두 사람은 일상을 나누며 관계가 더욱 깊어지나 이들을 둘러싼 현실은 가혹하기만 하다. 두 사람의 연애를 사랑으로 보기를 거부하는 사람들로 인해 둘은 결국 잠시 떨어지게 되지만 그 사랑은 여전히 변함이 없다.

이렇게 <오아시스>는 이전에 들은 적도, 본 적도, 심지어 상상해본 적도 없는 타자들의 연애담을 은막 너머의 세상 안에 펼쳐놓는다. 서로에게 백마 탄 왕자였고, 잠자는 숲속의 미녀였을 종두와 공주의 통속적 로맨스는 누구나 알 법한 지극히 일상적이고도 평범한 연애담임에도 관객들에게는 오히려 낯설고 불편하다.

 

출처: 네이버 영화

이 익숙함과 낯섦 혹은 불편함 사이의 줄타기는 영화 속에서 현실과 환상을 오가는 종두와 공주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 속에서 두 사람은 자신들을 외면한 세상과 싸우며 둘만의 사랑을 이루어나간다.

사랑이라는 감정 혹은 그 행위의 주관성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그래서 그것의 객관화를 시도하는 순간 불편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종두와 공주의 사랑 또한 그것과 별반 차이가 없다. 그들의 주관성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순간 은막 너머 ‘타자’로서의 종두와 공주는 은막을 넘고 나와 결국 ‘나’ 혹은 ‘너’가 된다.

이렇게 본다면 <오아시스>의 익숙함과 낯섦 혹은 불편함의 경계는 다시 동일시의 문제로 귀결된다. 그 점에서, 영화를 통해 진실을 담아내고자 하는 이창동의 연출 철학과 이 작품을 통해 연기파 배우로 굳어진 설경구와 문소리의 경이로운 연기는 또다시 관객과 줄타기를 시도한다.

 

출처: 네이버 영화

*본 기사는 <한겨레신문> '한국 영화 100년, 한국영화 100선'에 기고한 글을 깁고 더한 것이다.

 

 

글·윤필립
영화평론가. 대학에서 연구하고 강의하며 공연기획 '최영주의 in클래식' 상임이사, 한국영화평론가협회 정회원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 담화분석 및 스토리 문법과 문학/서사치료 연구, 한국문화교육 연구에 집중하고 있다. 서울국제사랑영화제에서 영화비평 대상을 수상했고, 동아일보 신춘문예 영화평론 부문 당선으로 등단했다. 만화평론상, 대종상, 서울국제프라이드영화제의 심사위원 및 영평상 집행부 등을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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