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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승의 시네마 크리티크]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더 퍼스트 슬램덩크> & <레디 플레이어 원>
[김현승의 시네마 크리티크]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더 퍼스트 슬램덩크> & <레디 플레이어 원>
  • 김현승(영화평론가)
  • 승인 2023.01.09 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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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네이버 영화
출처 : 네이버 영화

토요일 밤 11시 40분, 심야 영화관 안에 관객이 가득 찼다. 대부분 30대 이상으로 보이는 관객들의 눈은 어린 시절 첫사랑과 재회한다는 설렘으로 반짝인다. 수많은 명장면과 명대사로 90년대를 풍미했던 스포츠 만화계의 전설, <슬램덩크>가 30년 만에 귀환했기 때문이다.

관객의 기대에 부응하듯 <더 퍼스트 슬램덩크>는 ‘북산고등학교’ 주전 다섯 명의 스케치로 막이 올랐다. 영화의 목표는 분명하다. 30년 전 흰 종이에 멈춰 있는 그들에게 움직임과 생명을 부여해야 한다. 무엇보다 원작의 작화 스타일을 그대로 보존하면서도, 만화의 분절된 컷을 연속적인 움직임으로 변환하는 것이 기술적으로 우선시 되었을 것이다. 다행히 원작 작가인 이노우에 다케히코 감독을 필두로 농구 특유의 다이나믹함과 <슬램덩크>만의 극적인 액션 구도가 뛰어나게 구현되었다. 빈번히 활용되는 만화적인 화면 구성조차 애니메이션이 빚어낸 빠른 템포의 리듬감에 거슬리지 않았다.

세월이 흐른 뒤 다시 만난 첫사랑의 얼굴에 주름이 생겼다고 해서 얼굴을 찡그릴 사람은 없다. 하지만 30년 만의 복귀에 아쉬운 부분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더 퍼스트 슬램덩크>는 원작과 달리 송태섭을 주인공으로 설정했다. 농구 경기 사이사이에 주인공의 개인사를 플래시백 형태로 삽입하는 연출 자체는 무난했지만, 원작에서 벗어나 새로이 추가된 분량 자체가 전형적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다만 ‘소년의 성장’, ‘세대교체’ 등의 클리셰는 원작뿐만이 아닌 많은 소년 만화에서 끝없이 반복된 모티브이다. 오히려 90년대의 정서를 잔뜩 머금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과거를 환기하는 많은 작품이 그러하듯, <더 퍼스트 슬램덩크>가 선사하는 즐거움은 원작에 크게 의존한다. 전체적인 서사가 원작의 반복인 점도 그렇지만, 예상 관객을 팬층으로 설정한 과감한 생략이 눈에 띄었다. 가령 강백호가 서태웅에게 공을 패스하지 않자 약속이라도 한 듯 객석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영화는 두 사람의 관계에 대한 어떠한 설명도 제공하지 않지만, 모두가 두 사람의 라이벌 관계를 알고 있기 때문이다. 반대로 말하면 원작을 보지 않은 관객은 철저히 배제될 것이 뻔하다. 물론 <슬램덩크> 팬들에게는 명장면들을 커다란 스크린으로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아깝지 않은 시간이 될 것이다. 플롯의 전체적인 전형성에도 하이라이트인 경기 장면만큼은 훌륭했고, 강백호와 채치수 등 주요 캐릭터의 비중은 거의 생략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의 기억, 우리의 기억

<더 퍼스트 슬램덩크>가 선보인 30년 만의 귀환은 2023년의 관객에게 더 이상 낯선 경험이 아니다. 바로 작년에도 톰 크루즈라는 걸출한 스타를 탄생시킨 <탑건>이 37년 만의 후속작으로 박스오피스를 점령했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영화가 새로운 모습으로 극장을 방문할 때 관객은 스크린 이상의 것을 경험한다. 애정이 깃든 작품의 변화한 모습을 마주하며 함께 환기되는 것은 특정 공간에서 특정 누군가와 함께 영화를 관람했던 과거 자기 자신이다. “기억은 음악을 좋아한다.”는 <마담 프루스트의 비밀 정원>(2013)의 대사를 인용하자면, 기억은 음악만큼이나 영화도 좋아한다. 스크린이 거울이 되어 우리의 과거를 비추기 때문이다.

 

탑건 : 매버릭 OST 유튜브 영상의 댓글
탑건 : 매버릭 OST 유튜브 영상의 댓글

“관객은 영화의 과거와 현재를 잇는 시도에 힘을 보탠다. <탑건 : 매버릭>은 거의 모든 시퀀스가 전작의 오마주로 가득하다. 모든 반복은 철저히 전작과 대응하며 36년 전의 순간을 상기한다. 이번 후속작의 관객 중 누군가는 1986년에 극장에서 <탑건>을 보았을 것이다. 오프닝 시퀀스에 36년 전과 같은 폰트로 톰 크루즈의 이름이 나타날 때, 그 사람은 영화관에서 스크린을 올려다보던 어린 시절의 자신을 떠올린다. 함께 영화를 관람한 친구, 연인, 가족 심지어는 앞줄의 누군가를 떠올릴 수도 있다.”

『영화평론』 제34호 中

 

이처럼 대중문화가 지닌 ‘시간적인 힘’을 적극적으로 활용해 문화 콘텐츠를 즐기는 모든 이에게 찬사를 보낸 영화가 있다.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레디 플레이어 원>(2018)이다. 영화와 게임의 역사를 뒤흔들며 열렬한 사랑을 받은 수많은 캐릭터가 스크린에 등장했다. 그러나 스필버그 감독의 야심은 단순히 등장하는 캐릭터의 수나 지불한 로열티의 규모에 그치지 않았다. 1987년에 제작된 ‘스트리트 파이터’의 춘리와 2016년에 제작된 ‘오버워치’의 트레이서가 한 프레임에 등장하고, DC코믹스의 ‘배트카’와 <아키라>의 오토바이가 나란히 경기장을 질주한다. 각 시대를 대표하는 캐릭터들의 만남으로 선명해지는 것은 대중문화가 지닌 역사성이다. ‘건담’이 사건의 해결사로 등장할 때 최신 슈퍼히어로들에 비해 빈약한 모습은 웃음을 자아낸다. 하지만 이전 세대의 누군가에게는 건담이 아이언맨이자 배트맨이지 않았을까. 관객 각각은 다른 추억을 가지고 있지만, 그들 각자의 추억은 똑같이 소중하다. 스크린을 매개로 과거와 현재의 ‘덕후’는 시공간을 넘어서는 경험을 공유한다.

관객 각각에게 공평한 즐거움을 선사한 <레디 플레이어 원>은 전형적이면서도 동시에 인상적인 결말을 맞이한다. 거대 권력 집단(IOI)이 야욕을 펼치는 서사에서 주인공이 동료들과 함께 기지를 발휘해 세계를 구하는 서사는 흔하다. 그런데, <레디 플레이어 원>은 이와 더불어 “사람들은 현실 세계에서 시간을 더 보내야 한다.”는 대사로 마무리된다. 흥미롭게도 영화에 등장하는 다양한 캐릭터, 심지어 감독 자신의 작품(<킹콩>, <쥬라기 공원>) 또한 주인공이 지향하는 현실 세계의 대척점에 위치한다.

 

출처 : IMDB
출처 : IMDB

대중문화를 제작하면서도, 또 적절히 거리를 유지하는 태도는 거장의 모순일까? <쉰들러 리스트>(1993), <라이언 일병 구하기>(1998), <더 포스트>(2017) 등 현실 세계를 직시하려는 시도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스필버그가 수많은 관객에게 환상 세계의 문을 열어준 장본인이라는 사실은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 ‘할리데이’ 캐릭터를 통해 “나의 작품을 사랑해줘서 고맙다.”고 말하는 스필버그의 진심은 무엇일까?

스필버그는 결코 <레디 플레이어 원>의 환상 세계를 무너뜨리지 않았다. 웨이드(타이 셰리던)가 대항한 것은 대중문화의 허점을 악용해 부정한 이익을 취하려던 거대 기업이다. 악의 세력이 무너진 뒤 대중 낙원 ‘오아시스’는 가장 열렬한 팬들의 품으로 돌아온다. 대중문화를 순수하게 사랑하는 사람들이 주도권을 잡아야 한다는 발상은 문화가 거대 산업의 형태로 유지되는 현대에 지나치게 순진한 생각일 수도 있다. 그러나 대중문화를 소비하는 대다수가 순수한 즐거움을 추구한다는 것 또한 간과해선 안 된다. 한 사람이 느낀 즐거움이 다른 사람과 공유될 때 문화 컨텐츠는 시대성을 얻는다. 즐거움을 공유하는 집단은 대중이라는 이름으로 자신의 순수성을 보존할 힘을 얻는다.

유사한 경험이 <더 퍼스트 슬램덩크>의 상영관에서도 벌어졌다. 긴장감이 절정을 이루는 마지막 ‘24.1초’는 대사 없이 슬로우 모션으로 전개된다. 관객들은 정적 속에서 움직임 하나하나에 집중하며 경기 종료까지 함부로 숨을 내뱉지 않았다. 과거 각자의 집에서, 혹은 만화방에서 <슬램덩크>를 읽은 팬들은 이제 극장에서 하나의 숨을 공유한다. 같은 시대를 살아온 개개인의 추억이 공동의 대중문화로 확장되는 순간이다.

 

 

글·김현승
영화평론가. 2022 영평상 신인평론상으로 등단하였다. 현재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이론과 예술전문사에 재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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