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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문영의 시네마 크리티크] 보존된 과거 속에 새긴 사랑의 열정: <단순한 열정>(Passion Simple, 2020) 다니엘 아르비드
[정문영의 시네마 크리티크] 보존된 과거 속에 새긴 사랑의 열정: <단순한 열정>(Passion Simple, 2020) 다니엘 아르비드
  • 정문영(영화평론가)
  • 승인 2023.02.20 0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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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각색영화로서 아르비드의 <단순한 열정>

최근 2월에 개봉한 다니엘 아르비드(Danielle Arbid)의 <단순한 열정>(2020)은 2022년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아니 에르노(Annie Ernaux)의 동명 소설(1991)을 원작으로 한 각색영화이다. "사적인 기억의 근원과 소외, 집단적 억압을 용기와 임상적 예리함을 통해 탐구한 작가"로서 그 성과와 업적을 인정받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에르노가 쓴 원작 소설은 작가의 지극히 사적인 불륜의 단순한 열정을 과감하게 탐구한 글쓰기의 산물이다. 작가 자신은 거부하지만 오토픽션(자서전+픽션)이라는 모순어법의 모호한 장르로도 명명되는 이 소설은 허구를 배제한 자전적 글쓰기, “판단, 은유, 소설적 비유가 배제된” 객관적인 “평평한 문체”의 글쓰기로 기억과 과거를 탐구하는 반소설적 소설이다. 물론 에르노의 소설은 아방가르드를 고집하는 반소설로서의 누보로망(nouveau roman)과는 다른 방향을 추구하는 글쓰기의 산물이긴 하다.

그러나 이 소설을 각색한 영화를 비롯하여 아르비드의 대부분의 작품들은 누보로망 작가들과의 협업으로 시간과 기억이라는 주제를 일관되게 다뤘던 알랭 레네(Alain Resnais)의 영화들과의 상호연관성을 현저하게 드러내 보인다. 특히 프랑스 여자 교수와 연하의 유부남 러시아 외교관이 등장하는 이 영화는 마르그리트 뒤라스(Marguerite Duras)와 함께 만든 프랑스 여자 배우와 일본 남자 건축가의 짧은 불륜의 사랑을 다룬 레네의 <히로시마 내 사랑>( Hiroshima mon amour, 1959)을 곧바로 연상시킨다. 아르비드는 이 영화를 영화 속 영화로 사용할 정도로 레네의 영화에 대한 오마주를 확실하게 표한다.

레바논 태생 아르비드가 감독으로서 가능성을 인정받은 첫 단편 <파괴>(Demolition, 1998)는 베이루트 폐허의 집터에서 사진을 찾아 헤매는 여자에 관한 영화이다. 첫 영화부터 시작하여 대부분의 아르비드의 영화는 레네의 첫 장편영화 <히로시마 내 사랑> 뿐 아니라 알랭 로브그리예(Alain Robbe-Grillet)와 함께 만든 <지난해 마리앙바드에서>(L'Année Derniere à Marienbad, 1961)와 같은 레네의 유명한 영화를 연상시키는 많은 지점들을 포함한다.

이 영화에 대한 심층적 리뷰를 위해 우선 각색영화로서 원작 소설의 반복과 차이를, 그리고 시네로망(ciné-roman)을 유행시킨 누보로망 작가들과의 협업으로 만든 레네의 영화와의 연관성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레네는 들뢰즈(Gilles Deleuze)가 “모던 시네마”(modern cinema)의 선두 주자들 중 한 사람으로 선정한 감독이다. 따라서 이 영화가 원작을 각색함에 있어서 모던 시네마를 어느 정도 지향하고 있는가를 또한 살펴볼 필요가 있다. 물론 에르노의 원작 소설은 영화제작을 염두에 두고 쓴 시네로망은 아니긴 하다.

 

2. 원작소설과 각색영화의 차이

각색영화로서 이 영화는 원작을 영화 매체로 그리고 새로운 사회적•문화적 맥락으로 전환하여 다시-보기를 시도한 것으로, 아마도 원작에 대한 오마주를 표하기 위한 또는 원작에서 억압되거나 주변화된 것을 가시화하여 차이를 부각하기 위한 의도에서 각색 동기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이 영화는 원작의 90년대초와 걸프전쟁 배경을 현재 프랑스로 그 배경을 옮겨오고, 밀회의 장소가 되는 주인공 엘렌(라에티샤 도슈)의 집으로 무대를 한정시킴으로써 탈역사화된 상황에서 개인적인 삶에 있어서 전환적인 사건에 집중한다. 스마트폰과 데이트 앱이 트렌드인 현재 시점의 프랑스에서 역사적 사건과의 연계성보다는 개인적 체험으로서 사랑의 열정과 사회적, 문화적 위계, 그리고 젠더 이슈에 관심을 더 집중할 뿐, 원작에 대한 전면적인 다시-보기의 수정은 없는 것으로 파악된다. 따라서 각색 동기는 아마도 원작에 대한 충실성을 고수하여 오마주를 표하기 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각색은 단순히 원작을 반복하기보다는 차이들을 기입하며, 그 차이들로 각색의 성과가 평가된다고 볼 수 있다.

들뢰즈는 역사적으로 인간과 세계 사이의 커다란 단절을 초래한 세계2차대전을 기점으로 고전 시네마에서 모던 시네마로 전환하게 되었다고 단언한다. 이 영화에서 주인공 엘렌(라에티샤 도슈)이 극장에 가서 본 영화로 삽입된 레네의 <히로시마 내 사랑>의 배경이 바로 전후로 20세기의 거대한 역사적 사건인 세계2차대전과 결부된 프랑스 여자와 일본인 남자의 상흔을 다루고 있다. 사실 원작은 1990년대 주요 역사적 사건인 걸프전쟁이 주요한 전환점이 될 뿐 아니라, 걸프전쟁과 사랑의 열정이 초래하는 불가능한 욕망과 고뇌 사이의 유사성이 언급되고 있다. 그러나 현재를 배경으로 한 아르비드의 영화에서는 전환점이 되는 역사적 사건이 발생하지 않고 언급되지도 않는다. 사실 이것이 원작과 각색영화의 가장 중요한 차이라고 할 수 있다.

에르노는 부르디외(Pierre Bourdieu)에게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밝힌다. 상징적 폭력, 사회적 위계를 폭로하는 그의 “구별짓기”(habitus) 개념을 비롯하여 그의 이론에서 그녀는 “사회적으로 억압된 것”이란 표현을 가져왔다고 한다. 원작에서 교수이자 작가인 주인공은 A의 저속한 소비주의가 문학적 지성인의 상류사회가 요구하는 세련된 외적인 취향을 습득하기 이전 노르망디 시골 고향에서 보낸 고통과 수치의 근원이 되는 자신의 과거로 돌아가게 만든다고 한다. 그녀는 또한 이제 클래식 대신 세련된 취향을 가진 중산층의 위선과 가식에 대한 거부로 대중가요를 즐겨듣게 되었고, 점을 보는 것도 관심을 갖게 되었다. 엘렌 또한 친구에게 알렉산드르가 대형차, 푸틴, 그리고 헐리웃을 좋아하는 저급한 취향을 가지고 있다는 걸 싫어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나 알렉산드르의 저급한 취향에 대한 엘렌의 수용 태도는 젠더 이슈에 대한 그녀의 입장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이 원작과의 차이점이기도 하다.

 

원작에서 주인공은 연상의 유부녀와 지속적인 육체관계가 자신을 남자다워지게 한다는 친구의 고백에 A도 그런 기분이었을꺼라는 생각에 행복해한다. 반면에 여성작가 아프라 벤(Aphra Behn)을 연구하는 엘렌은 사랑에 빠지면 “순종적인 페미니스트”가 된다는 생각에 알렉산드르와 헤어질 결심으로 일방적인 이별 선언을 한다. 물론 곧 그의 저돌적 접근에 무너지고 만다. 그러나 그녀에게 알렉산드르의 마초적인 성향은 그의 저속한 취향처럼 그녀를 매혹시키면서도 젠더 이슈에 민감하게 반응하도록 유도한다. 불어를 잘 못하는 알렉산드르가 영어로 엘렌에게 전한 프랑스인에 대한 두려움과 남자는 약한 것을 혐오해야한다는 러시아식 교육에 대한 언급은 러시아 남자로서의 열등감과 이에 대한 방어기제로서의 그의 마초적 성향을 설명해준다. 그 사례로 그가 엘렌이 짧고 몸에 딱 붙는 스커트를 입고 외출하려고 하자, 창녀 같다며, 그녀에게 당장 벗으라고 명령하는 장면을 들 수 있다. 완강하게 그녀가 거부하자, 둘은 몸싸움까지 벌이게 되지만, “난 창녀들을 존경한다”는 당당한 발언에 둘은 갑자기 화해를 한다. 그녀의 창녀에 대한 발언은 에로틱하면서도 도전적으로 들리지만, 우린 등을 돌리고 알렉산드르에게 안긴 그녀의 표정을 읽을 수는 없다.

 

3. 에르노와 엘렌의 스토리텔링

 

“2월 극장가에 부는 관능 로맨스 열풍!”, “치명적 사랑에 매혹당한 여성의 민낯”과 같은 홍보 문구가 시사하듯이, 이 영화는 엘렌의 거부할 수 없는 육체적 욕망과 탐닉에 대한 이야기로 한줄 요약 소개된다. 에르노는 이 소설을 쓰기 시작하면서 쓰는 내내 그해 처음 본 포르노 영화의 정사 장면이 불러일으키는 “어떤 인상, 또는 고통, 당혹스러움, 그리고 도덕적 판단이 유보된 상태”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고 서문에서 밝힌다. 나 역시 시사회에서 나체의 두 남녀, 특히 남자의 몸에 새겨진 타투와 성기가 클로즈업된 첫 정사 장면을 보면서, 에르노의 예감이 틀리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물론 원작도 이 영화도 포르노가 아니다.

이 영화는 카메라 테스트를 하듯 직접 카메라를 향해 말하는 엘렌의 독백으로 시작한다. 자신의 이야기를 관객에게 숨김없이 털어놓지만 엘렌은 수치심 없이 치부를 다 드러내 보이는 노출증 환자가 아니다. 에르노가 말하듯이, 노출증은 같은 시간대에 남들에게 자신을 드러내 보이고 싶어 하는 병적인 욕망이다. 그러나 시차를 두고 자신의 체험을 이야기하는 엘렌의 스토리텔링은 통제되지 않은 자신의 열정을 노출하고 싶은 욕망을 만족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다. 원작과 영화의 엔딩에 이르러 주인공이 “세상과 더욱 굳게” 관계가 맺어진 것을 깨닫게 되듯이, 그녀의 스토리텔링은 점차 자전적인 “나”를 확장시켜 같은 열정과 시련을 겪은 모든 소외된 사람들을 대변하는 소수의 스토리텔링으로 변하게 된다. 이 영화를 보면서 당혹감을 떨쳐버린 관객 또한 엔딩에 이르러 자신의, 우리의 스토리텔링을 다시 시작하여 “집단적 억압”으로부터 탈주하고 싶은 욕망과 용기를 갖게 된다.

 

4. “보는 자”의 모던 시네마를 지향하며

 

이 영화를 시작하는 엘렌의 독백은 원작소설처럼 “작년 9월 이후로 나는 한 남자를 기다리는 일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라는 반과거(l’imparfait) 시제로 시작한다. 불어의 반과거는 과거 시제와 “불완전한”, “미완성의“라는 의미가 내포된 ”미완료의” 양상을 결합한 시제로 계속되는 또는 반복되는 사건 또는 상태를 말할 때 쓰인다. 엘렌의 이러한 시제의 사용은 그녀의 이야기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는 것을 시사한다. 이 영화가 전개하는 내러티브가 그녀의 ‘단순한 열정’을 절정에 이른 후 완결되는 매혹적인 사랑 이야기로 재구성하는 과거 시제의 리얼리즘적 내러티브가 아니라는 것이다.

알렉산드르를 만나 “단순한 열정”에 휩싸여 그를 기다리는 것 외에 아무 것도 할 수 없게 된 엘렌은 무엇을 해도 현실과 단절된 것처럼 여겨졌다고 한다. 더 이상 일상을 유지할 수 없는 그녀는, 혼돈의 상태에 빠진 햄릿이 “시간은 탈구되었다”(Time is out of joint)고 말하듯이, 이제 일상적 상식적 시간의 질서를 벗어난 일탈적 운동의 시간 속으로 들어간다. 베르그송이 설명한 일상적, 과학적 용어로서의 시간과 구별되는 “지속”(durée)으로서의 시간 속으로 들어와 길을 잃고 헤매게 된 것이다. 이 영화는 지속으로서의 시간 속에서 자신의 열정에 대한 기억을 탐구하는 엘렌의 스토리텔링으로 전개된다. 따라서 이 영화는 들뢰즈가 구분한 일상적 상식적 시간과 공간의 좌표를 제공하는 “감각-운동 도식”에 따른 “운동-이미지”(movement-image)의 고전 시네마(classical cinema)의 차원을 넘어서 모던 시네마에 진입 또는 지향하는 영화로 분류될 수 있다.

이 영화 제목의 “passion”은 열정과 더불어 수난을 뜻하기도 한다. 엘렌은 열정에 동반되는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잔인한 이별과 고독의 수난 또한 그녀의 일상적 시간의 현실을 탈현실화한다. 약속을 하고도 오지 않는 알렉산드르를 호텔 방에서 기다리다 밤거리로 나온 엘렌은 일상적 시간과 공간의 좌표를 벗어나 길을 잃고 정처 없이 걷는다. 차를 멈추고 나도 그런 경험이 있다며 도와주겠다는 낯선 남자에게 그녀는 울면서 “인생은 참 잔인해요”라고 말한다. 원작에는 없는 부분인 이 시퀀스에서 엘렌은 <히로시마 내 사랑>의 프랑스 여자 배우 뿐 아니라 로베르토 로셀리니(Roberto Rossellini)의 <유로파>(Europe ‘51, 1952)의 아이린(잉그리드 버그만)을 떠올린다. 사랑하는 남자와 아들을 잃고 마침내 주변을 보기 시작한 그 프랑스 여자와 아이린처럼, 알렉산드르와의 이별은 엘렌으로 하여금 감각-운동 도식이 정지 또는 단절된 상황에서 그녀의 사회적 지각 습관들을 구성하고 있는 클리셰를 넘어서서 숨겨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는 잔인한 상황을 제공한다. 따라서 이 영화는 숨겨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는 엘렌을 주인공을 한 “보는 자”(seer)의 모던 시네마로 분류될 수 있다.

 

5. 모던 시네마의 직접적 시간-이미지: “과거의 시트들”과 “현재의 첨점들”

원작에서 에르노는 A가 떠난 지 2달이 지나 쓰기 시작한 이 소설을 반과거 시제로 쓰기 시작한 이유를 “끝내고 싶지 않았던 ‘삶이 가장 아름다웠던 그 시절’의 영원한 반복을 말하기 위한 것”(52쪽)이라고 밝히고 있다. 그리고 여전히 열정의 시간을 살고 있지만 몇 달이 더 지난 현재 이제 달라져 가는 열정의 변화를 “반과거 시제에서 현재 시제로 시제를 바꿔 쓴다”(57쪽)는 주를 달아 시제 변화로 부각시킨다. 에르노가 시제 변화를 시도한 의도는 그 보존되길 원하는 과거의 시간을 현재화함으로써 이와 연결된 현재의 현재화, 그리고 미래의 현재화, 즉 미래로의 탈주의 가능성을 모색하기 위한 것이다. 바로 이러한 에르노의 글쓰기가 시도한 시제의 변화를 통해서 추구한 것을 각색영화는 모던 시네마가 생성하는 두 가지 직접적인 “시간-이미지”(time-image)의 유형들, 즉 “과거의 시트들”(sheets of past)과 “현재의 첨점들”(peaks of present)로 표출한다.

에르노의 원작소설은 노년에 이르러 A를 만나 체험한 사랑의 열정을 회상하는 자서전적 글쓰기의 산물이 아니다. 이 소설은 그를 만난 1988년 9월, 1989년 11월에 그가 떠나고 나서 2달이 지난 시점, 몇 달이 더 지나 1990년 4월, 그리고 걸프전쟁 발발로 갑자기 그가 와서 재회한 직후인 1991년 2월 등의 시점들을 중심으로 연대기적인 순서로 회상하는 내러티브로 전개되는 구조를 띈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각 시점은 과거를 현재화하고, 이와 연계하여 미래를 생성하는, 즉 미래를 현재화하는, 현재 진행형의 삶에 대한 글쓰기로 지속으로서의 시간의 복합적인 구조를 보여주는 이정표일 뿐이다. 이러한 글쓰기를 통해 각각 시점에서 시간은 과거 속으로 들어가 보존된 과거를 구성하고 이렇게 구성된 과거의 시트들은 비연대기적으로 공존하고 있다. 그러나 글쓰기의 더 중요한 목적은 과거의 심연으로 연결된 현재의 첨점에서 보존된 과거 속에 보유된 “새로운 현실의 도약, 삶의 분출”을 찾는 것이다. 이러한 글쓰기를 시도하는 원작을 각색한 영화 또한 시간의 복합적인 구조에 근거한 시간-이미지의 모던 시네마를 지향하지 않을 수 없다.

 

6. 엘렌의 과거의 시트들과 현재의 첨점들에서

지속 또는 흐름으로서의 시간은 이제 더 이상 운동에 종속되지 않고, 오히려 운동이 시간에 종속된다. 따라서 모던 시네마의 시간은 이제 직접적 시간-이미지로 등장한다. 시간은 매순간 현재와 과거로 그 자체를 분리하고, 현재를 또한 두 개의 이질적인 방향으로, 즉 미래를 향하는 방향과 과거로 떨어지는 방향으로 분리시킨다. 결정체-이미지가 드러내 보이는 것은 시간의 감추어진 근거, 즉 두 가지 흐름, 지나가는 현재와 어두운 심연으로 떨어져 보존된 과거로의 흐름으로 구별되는 두 가지 흐름이다. 따라서 시간의 구조는 이러한 이중적인 흐름의 시간이 만들어내는 회로의 결정체-이미지 구조로 파악된다.

이 영화는 회상 또는 “현재에서 과거로 가는 그리고 다시 우리를 현재로 되돌리는 폐쇄 회로”로 정의되는 플래시백 기법에 의한 회상-이미지의 고전 시네마가 아니다. 엘렌의 보존된 과거의 장소로의 방문과 귀환은 회상으로부터도 감추어진 것, 즉 억압된 버츄얼 과거를 가시적으로 만든다. 이러한 탐구는 또한 플래시백의 폐쇄 회로로부터 탈주하여 새로운 미래를 현재화하는 가능성을 초래한다.

엘렌의 방문은 과거의 심연으로 연결하는 현재의 첨점에서 보존된 과거 속에 보유된 새로운 삶의 분출을 찾기 위해서이다. 따라서 그녀의 과거의 장소로의 방문은 복합적인 시간의 구조를 구축하는 결정체에서 벗어나 미래로 나아갈 수 있는 가능성, 즉 구원의 가능성을 발견하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보존된 과거의 시트들의 공존성 보다는 과거의 현재, 현재의 현재, 미래의 현재라는 세 개의 함축된 현재, 즉 탈현실화된 현재의 첨점들의 동시성 속에 구원과 새로운 삶의 가능성이 더 강력하게 존재한다는 들뢰즈의 주장을 이 영화는 입증해준다.

엘렌의 보존된 과거 속으로의 귀환을 보여주는 주요 에피소드들로는 앞서 언급한 알렉산드르가 떠난 사실을 알고 호텔 밖 밤거리를 헤매던 장면들, 그가 부인과 여행을 떠난 동안 아들과 함께 그를 만나기 전에 왔었던 피렌체를 방문한 때, 그리고 그가 살고 있는 모스크바 거리를 방문한 장면들을 들 수 있다. 그와 헤어져야겠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실행한 피렌체 방문은 그에 대한 열정에 휩싸이기 전의 과거의 장소로 돌아감으로써 그에 대한 생각을 떨쳐버리기 위한 시도였다. 그러나 거리, 박물관에서 관광객들 속에서 오히려 더 그에 대한 상념에 빠지고, 특히 성당에서 더 강한 수난의 고통을 느끼게 하는 울며 기도하는 그녀의 모습은 더 이상 그 현장의 일상적 시공간 속에 존재하지 않고 있음을 시사한다. 그를 만나기 이전의 과거로 돌아가 그를 잊는 것이 아니라 그녀는 오히려 그 곳에 그 열정을 새겨두고, 즉 과거의 시트를 과거 속에 보존해둔 것이다.

영화에는 없지만 원작에서는 A가 떠난 뒤 아픔과 시련을 덜고자하는 막연한 희망으로 주인공은 20년 전 낙태 수술을 받은 장소를 다시 방문한다. 그 과거의 장소를 방문하는 것은 한 남자로 인한 완전히 버려진 소외와 시련의 과거 체험을 다시 직면하는 용기있는 행동이다. 이러한 방문과 이에 대한 글쓰기를 통해 주인공은 보존된 과거의 시트 속에 잠재된 버츄얼 과거로서 같은 경험을 한 여자들과의 집단적 소외의 감정을 발견하게 된다.

 

원작에는 없지만 이 영화에 중요한 시퀀스로 삽입된 과거의 장소로의 방문은 알렉산드르가 러시아로 떠난 뒤 그가 살고 있던 모스크바 트베르스카야 거리를 찾아간 부분이다. 강의, 논문 뿐 아니라 모든 일상생활을 할 수 없을 정도로 망가져 전남편에게 정상이 아니라는 질책과 함께 아들을 뺏길 상황에 처한 엘렌은 모스크바를 방문한다. 완전 이방인의 눈으로, 기존의 모든 지각의 때가 벗겨진 눈으로 거기서 마침내 그녀는 “보는 자”로서 순수 가운데 드러난 사물 자체를 볼 수 있게 된다. 모스크바의 눈 쌓인 거리에 하늘을 향해 반드시 누워 엘렌이 보고 있는 것이 바로 순결한 순수 가운데 드러난 사물 자체이다. 엘렌이 본 것은 진부한 것들을 감지하는 감각-운동 기능이 완전히 중단되는 순간, 시간의 질서를 벗어나는 순간, 그 간극에서 생성되는 “순수한 시각-청각 이미지, 은유 없는 완전한 이미지”이다. 그녀는 누워서 그 순수한 이미지가 주는 두려움 또는 아름다움의 잉여 속에 멈춘 채, 과거의 현재, 현재의 현재, 미래의 현재라는 세 개의 함축된 현재, 즉 탈현실화된 현재의 첨점에서, 그녀의 세계에서 새로운 사물들의 재배치를 가능하게 하는 새로운 사유 방식을 마침내 발견하게 된다.

 

7. 원작과 각색영화의 엔딩

모스크바 방문 에피소드는 안정제 처방과 휴강처리를 위한 진단서를 받으러 엘렌이 정신과 의사를 방문한 장면으로 이어진다. 여기서 우리는 영화의 시작에서 카메라를 직접 보면서 엘렌이 한 독백이 의사 앞에서 한 말이며, 그 상담이 모스크바 에피소드 이야기로 끝난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러한 정신분석과 의료적 장치는 사실 각색영화로서 그리고 모던 시네마로서 이 영화의 한계를 부각시키는 결과를 가져온다.

이 영화를 원작의 글쓰기를 가장 잘 전환시킬 수 있는 영화 형식으로 시간-이미지의 모던 시네마를 지향하는 영화라는데 이견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 이 영화는 엘렌이 단순한 열정의 절정을 겪은 뒤 치유를 통해 완결되는 내러티브를 지향하는 고전 시네마로 간주할 수 있는 것도 사실이다. 후반부에 이르러 정신과 의사와의 상담 장면을 영화의 전체적인 틀로 한 것처럼 보이게 만든 장치를 사용한 의도는 복합적인 시간 구조로 뒤엉킨 열정의 무질서와 혼돈을 치유와 회복 내러티브로 정돈하려는 쪽으로 영화의 엔딩을 끌고 가기 위한 것이라고 볼 여지도 다분하다.

원작과 영화 모두 떠난 남자와의 재회와 영원한 이별의 에피소드로 구성된다. 원작은 걸프전쟁이 발발한 직후 첫 일요일 1991년 1월 20일 그와의 재회와 영원한 이별을 기점으로 현재의 첨점에서 공존하고 있는 비연대기적 과거의 시트들 속에 새겨진 강렬한 열정을 다시 확인하는 에피소드로 엔딩을 맺는다. 그리고 한 남자에게 “사랑의 열정을 느끼며 사는 것이 바로 사치가 아닐까”라는 마지막 말로 그 열정은 현재 진행형으로 지속될 것임을 시사한다.

영화는 러시아로 떠난 뒤 8개월후 엄마 역할에 충실할 정도로 정상을 회복한 엘렌에게 갑자기 걸려온 알렉산드르의 전화와 그와의 재회로 엔딩 에피소드를 전개한다. 원작에서 주인공의 아들들은 모두 성인이지만, 영화에서 폴은 미성년자이다. 전남편이 추궁하듯이, 열정에 휩싸여 아들의 존재를 신경쓰지 않았던 그녀는 이제 아들을 다른 집에 보내는 신중한 대처를 한 뒤 그를 맞이한다. 그와의 뜨거운 재회 후 술에 취한 그를 호텔로 태워다 주는 차안에서 그는 처음으로 마지막으로 “당신 아들 폴은 잘 지내?”라는 안부를 묻는다. 엄마로서 엘렌의 입지와 그녀의 모성애를 확인시켜주는 이 대사는 사실 불륜 연애의 진부한 처리 방식, 다시 가정으로 귀환이라는 결말 처리를 시사한다. 그러나 호텔 유리문 너머로 그를 보고 돌아서서 걸어가는 엘렌을 따라가며 흐르는 플라잉 피켓츠(Flying Pickets)의 <온리 유>(‘Only You')의 감미로운 OST 선율은 우리 가슴 속에 사랑의 열정을 느끼며 사는 사치에 대한 욕망의 잔잔한 물결을 일으킨다.

 

사진출처: 네이버 영화

 

 

글·정문영
영화평론가, 계명대학교 영어영문학과 명예교수. 한국영화평론가협회와 국제영화비평가연맹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다양한 매체와 장르의 텍스트들을 상호텍스트(intertext)와 팔림세스트(palimpsest)로 읽는 각색연구가 주요 관심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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