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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승의 시네마 크리티크] 비이성의 시대와 권선징악 사이에서, <Tar>
[김현승의 시네마 크리티크] 비이성의 시대와 권선징악 사이에서, <Tar>
  • 김현승(영화평론가)
  • 승인 2023.03.13 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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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프닝 크레딧 이후 전개되는 인터뷰가 주인공 타르(케이트 블란쳇)의 성격을 압축해 보여준다. 그녀는 베를린 필하모닉을 이끄는 여성 지휘자로, 미국 대중문화계 그랜드슬램인 ‘EGOT’을 달성한 거장이다. 인터뷰에서 가장 이목을 끄는 지점은 젠더 이슈와 관련된 그녀의 발언이다. “마에스트로, 마에스트라 등의 단어 대체라니!” 역사적으로 세상을 바꾼 훌륭한 여성들이 있었다. “당시에는 여성에 대한 편견이 강하게 작용했지만, 지금은 비교적 괜찮다.”는 답변에서 타르의 확고한 입장을 확인할 수 있다. 안티-페미니즘적 대사가 케이트 블란쳇이라는 배우의 입을 거쳐 발화되는 장면은 영화 안팎에 긴장을 불어넣는다. 그 누구보다 예술계 여성 인권 신장에 진심인 그녀 아닌가?

위태롭게 줄 위에 올라탄 그녀의 발언은 줄리아드 대학 강의에서도 계속된다. 유색 인종이자 ‘pan-gender’ 성향의 한 학생이 “바흐의 여성 혐오적 삶 때문에 그의 음악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말한다. 타르는 “인종과 성별은 지휘 행위와 관련이 없다.”고 반박한다. 하지만 ‘백인, 남성, 시스젠더’에 대한 저항을 우선시하는 학생을 설득하기에는 역부족이다. 결국 ‘깨어있는’ 학생이 “You are a bitch.”라는 혐오적인 발언과 함께 강의실을 뛰쳐나가며 사건이 일단락된다. 예술가와 예술 작품의 분리라는 화두는 첫 인터뷰와도 연관 지을 수 있다. 인터뷰에서 타르는 “5번 교향곡을 완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말러의 결혼생활을 이해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 발언을 예술이 예술가의 삶으로부터 영향을 받는다는 주장으로 받아들인다면, 인터뷰장과 강의실에서 그녀의 발언에는 분명한 모순이 있다.

교수에게 저항한 흑인 학생은 다소 부실한 근거를 통해 바흐를 여성 혐오자로 낙인찍었다. 타르 또한 동성애자라는 설정은 영화가 적어도 이 싸움에서만큼은 타르의 편을 들어주는 것처럼 보인다. 이때 ‘크리스타’의 절박한 메일을 통해 주인공을 대하는 영화의 태도에 변화가 생긴다. 타르는 그녀의 어시스턴트 프란체스카(노에미 매랑)에게 크리스타의 메일에 일절 응답하지 않고 삭제할 것을 명령한다. 무언가 감추려는 듯한 그녀의 속내는 서사가 전개되며 낱낱이 밝혀진다. 타르는 크리스타의 자살을 “막을 수 없는 일”로 치부했지만, 그녀야말로 유망한 예술가의 장래를 가로막은 장본인이었다.

 

오케스트라의 핵심 구성원을 통해 오케스트라가 부정한 방식으로 운영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영화가 밝혔듯이 오케스트라 내 최고 권력자는 지휘자와 제1 바이올린이다. 지휘자 타르는 자신의 배우자인 샤론(니나 호스)을 제1 바이올린 자리에 앉혔다. 심지어 부지휘자의 자리마저 내연관계인 프란체스카로 내정하고 있다. 불문율까지 어겨 가며 올가(소피 카우어)를 위한 솔로 챌리스트 오디션을 계획할 때 타르의 도덕적 결함은 최고조에 이른다. 비록 타르와 올가 사이에 직접적인 교류는 드러나지 않았지만, 샤론은 이미 두 사람의 은밀한 눈빛 교환을 의심했다. 관객 또한 크리스타의 사례를 통해 그녀가 부정한 일을 저지르고 있음을 알아챌 수 있다.

이후의 줄거리는 예민한 예술가에게 스트레스가 축적되는 과정으로 전개된다. 끊임없는 문 두들김과 소음은 타르의 작곡과 숙면을 방해한다. 그녀는 스트레스 해소를 위해 조깅과 복싱을 반복한다. 그러나 주변 사람들과 마찰이 점점 잦아지며 타르의 예민함은 극에 달한다. 악의적으로 편집된 강의실 영상이 트위터를 통해 널리 퍼지고, 뉴욕 포스트가 그녀의 성추문 혐의를 공식적으로 발표한다. 샤론의 대사처럼 “그녀와 거래하지 않는 인물은 어린아이뿐”이었으니 그녀의 최후는 부정한 일을 저지른 인물의 당연한 말로처럼 느껴진다. 모든 커리어가 망가진 그녀는 쓸쓸히 고향으로 귀환하지만, 가족에게조차 안기지 못하는 분위기다.

철저하게 외톨이가 된 그녀는 돌연 아시아로 거처를 옮긴다. 마사지샵을 방문한 그녀는 원하는 여성을 ‘초이스’하는 문화에 역겨움을 느끼고 구토한다. 안티-페미니즘적 행보를 일삼던 타르의 구토는 <액트 오브 킬링>(2013)의 구토를 상기시킨다. 불의를 행하는 인물에게 거울을 비추어 강렬한 자기혐오를 유도하는 방식이다. 이제야 비로소 케이트 블란쳇이 타르라는 캐릭터를 연기한 의도를 파악할 수 있다. 그녀는 직접 ‘악’을 연기하며 반성과 교훈을 이끌어 내고자 한다. 케이트 블란쳇이 자신의 신념과 정면으로 대립하는 캐릭터를 연기한 것은 이번 영화가 처음이 아니다. <미세스 아메리카>(2020)에서 그녀는 남녀평등헌법수정안(ERA)에 반대하는 극보수주의자 ‘필리스 슐래플리’를 연기한 경험이 있다.

 

타르가 지휘를 맡게 된 새로운 오케스트라가 ‘코믹콘’의 행사였음이 밝혀지며 영화가 막을 내린다. 긴 시간에 걸쳐 그녀의 몰락을 묘사했음에도, 기어코 ‘막장까지 치달은’ 최후를 다시금 강조하는 것이다. 하지만 <타르>를 권선징악적인 영화로만 치부한다면, 결말에 치중된 평면적인 해석이 되어버리고 만다. 영화는 잠들어 있는 타르의 모습을 배경으로 잡담을 나누는 SNS 영상으로 막을 올렸다. 오프닝 시퀀스와 유사한 SNS 화면이 영화 내내 반복되어 삽입되기도 한다. 흑인 학생에게 “학생의 영혼은 SNS가 만든 것 같다.”고 비난할 때와 타르의 영상이 악의적으로 편집되어 트위터에 유포될 때 SNS는 강력한 존재감을 드러낸다.

이를 통해 영화가 어긋난 선, 위선이 범람하는 시대에 대한 비판 또한 내포한다고 받아들일 수 있지 않을까? 첫 인터뷰에서 타르는 “전문가의 시대에 ‘다양하다’는 말은 더 이상 칭찬이 아니다.”고 지적했다. 이와 대조적으로 SNS에서 활동하는 ‘깨어있는’ 자들의 생명력은 다양성과 다원성에 근거한다. 인간은 무엇이든 될 수 있고, 사회를 구성하는 각 요소가 완벽히 동등한 가치를 지닌다는 이념이 작동하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타르는 “음악을 통해 신을 마주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때의 신을 통상적인 인격신이 아닌 절대적인 ‘일자’로 받아들인다면, 순수 예술을 성취하는 그녀의 방식이 모더니즘적 형태를 취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두 사상의 대립은 타르의 신간 발표회에서 전면화된다. “음악을 통해 신을 마주할 수 있다.”는 타르의 설명에 한 SNS 사용자는 “어디서 신을 들먹이냐.”며 비아냥거린다.

 

케이트 블란쳇을 캐스팅한 것은 토드 필드 감독의 영리한 선택이다. 영화는 악인 주인공에 대한 판단을 유보한다. 유보를 통해 생성된 여백에는 SNS와 현실, ‘신’이라는 일원성과 포스트-모더니즘의 다원성, 예술의 순수성과 타락을 범한 인간 사이의 긴장이 자리 잡는다. 남성 배우가 타르의 역할을 맡았다면 이와 같은 균형은 초반부에 처참히 무너져내렸을 것이다. 다만 애써 균형을 유지하다가 ‘구토’와 ‘완전한 몰락’을 통해 한쪽 편을 선택하는 것은 다소 의아한 결정이다. 타르의 성향을 비판하면서도 시대 또한 비이성으로 귀결되고 있음을 지적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다양성을 최고 가치로 인정한다면, 그것의 연장선에서 아시아와 서브 컬쳐(게임)를 통해 타르의 완전한 몰락을 표현한 결말에 대한 해명이 필요하다. 이동진 평론가의 해석처럼 ‘고향’으로부터 동떨어진 타르의 모습을 묘사했다고 받아들일 수도 있다. 하지만 지리적 차이를 차치해도 마지막 씬이 최소한 정통 클래식과 대중문화 사이의 위계를 전제했음을 부정할 수 없다.

 

사진 출처 : 네이버 영화, IMDB

 

 

글·김현승
영화평론가. 2022 영평상 신인평론상으로 등단하였다. 현재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이론과 예술전문사에 재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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