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04월호 구매하기
[이승민의 시네마 크리티크] <씨앗의 시간>
[이승민의 시네마 크리티크] <씨앗의 시간>
  • 이승민(영화평론가)
  • 승인 2023.03.13 10:2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봄이다. 자연에 다가가면 얼음이 녹는 소리가 들리고 싹이 올라오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마르고 꽁꽁 언 나무와 땅에서 올라오는 초록 싹은 언제 봐도 신비롭다. 땅이 품고 있는 생명력과 반복되는 지속성은 늘 소리 없는 깨달음을 준다.

그런 자연을 닮게 담은 한 편의 영화가 있다. <씨앗의 시간>은 제목 그대로 씨앗의 한 해 시간을 담는다. 씨를 거두고 심고 싹이 나고 열매를 맺어 다시 씨앗을 거두는 일 년의 절기를 가만히 담아낸다. 그렇다고 식물을 관찰하는 자연 다큐멘터리는 아니다. 씨앗과 함께하는 농부들의 일상이 함께한다. 영화는 언제부터인가 농부가 아닌 종자 회사만이 씨앗을 팔 수 있게 된 후, 그 씨앗이 한해 심고 나면 다음 해 다시 열매를 맺는 씨를 받을 수가 없는 현실에서 출발한다. 씨앗이 상품이 되기 위한 조건이자 씨앗이 상품이 되어버린 결과이다. 영화는 농부가 지속적으로 자신이 심고 받은 씨앗, 그래서 다음 해도 그 다음 해도 씨를 받고 열매를 맺는, 일명 토종 씨앗을 따라 간다. 씨앗은 상품이 아니라 자연이고 먹거리이고 농부의 노동의 산물임을 조용히 보여주는 것이다. 

 

영화에는 다양한 농부들이 존재한다. 농부와 농사에 대한 현대 도시인들의 인식적 한계를 건드리면서, 농부들의 시간과 일상을 가만히 담는다. 영화에는 크게 다섯 농부(그룹)가 등장한다. 평생 농사를 짓는 평택의 할아버지 농부와 화순의 할머니 농부, 이들은 토종씨앗을 심고 거둔다. 그런 토종 씨앗을 찾아서 다시 심어 나눔 활동을 하는 토종씨드림의 농부들, 그리고 그 씨앗을 받아 농사를 짓는 중년 여성 농부가 그들이다. 영화는 이들 농부와 토종 씨앗의 시간 리듬을 앞서지도 거스르지도 뒤쫓지도 않고 같이 호흡하며 그 속에 스며들어 있다. 시침과 분침으로 나누어진 기계 시간이 아닌 개구리가 잠에서 깨면 땅을 골라 씨를 심고, 쑥국새가 울면 쑥이 나고, 뀡이 울면 취가 나고, 아까시꽃이 피면 깨를 심는 그런 자연의 시간을 함께하고 있다. 땅이 풀리고 식고 마르고 적시고, 다시 땅에 찬 이슬 내리는 시간 속에서 농부들은 부지런히 땅과 호흡한다. 영화는 보여 지는 씨앗이나 농부의 이미지를 담는 게 아니라 쉽게 포착할 수 없는 씨앗의 시간과 농부의 노동을 담아낸다. 땅을 향해 굽어진 농부의 몸짓과 씨앗을 뿌리고 거두는 농부의 손은 머리가 아니라 가슴으로 읽히는 장면들이다.

 

이 중 농부의 손은 영화의 처음부터 함께한다. 씨앗을 물로 씻어 건져내는 할아버지 농부의 손에서 시작한 영화는 씨앗 까는 할머니 농부의 손, 씨를 관찰하고 챙기는 씨드림 농부들의 손놀림은 “손”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분명 손은 인간의 가장 섬세한 도구이자 매체이고 기술이다. 그리고 그 손은 따스한 온기를 가지고 불어넣는다. 할머니 손이 그랬고, 연인의 손이 그렇고, 엄마의 손맛이 그렇다. 그러나 어느새 자본 중심의 도시 삶에 익숙한 이들은 손으로 하는 노동을 경시하고 몸으로 하는 노동을 꺼리면서 보이지도 만져지지도 않는 화폐를 24시간 쫓고 있다. 씨앗마저 사고파는 물건으로 만들면서. 씨앗과 함께하는 농부의 손과 농부들의 움직임을 가만히 보다 보면 들리는 말이 있다. 내가 원하는 노동을 내 맘대로 한다고, 농사일 같이 재미난 게 없어 날아다녔다고, 수확의 기쁨이기도 하지만 수확은 수고로움이라고, 돈이 되는 논농사가 아니라 밭농사는 취미인 줄 안다고, 씨앗이 너무 이쁘다고, 씨앗의 매력에 빠져 씨앗에 갇혔다고. 농부들이 부지런히 손놀림을 하면서 두런두런하는 말들을 귀 기울여 보면 땅과 함께 오랜 세월 살아온 이들의 지혜와 연륜과 애정이 듬뿍 묻어난다. 영화는 농부와 농사를 틀로 규정짓지 않고 사람과 땅이 함께 호흡하고 살아가는 한 방법으로 담는다. 그렇게 영화는 소리 없이 씨앗의 시간과 농부의 노동에 스며들어 이들에게 애정과 존중을 표한다. 어떤 주장도, 어떤 설명도 없이, 영화는 농사의 자리를 질문하게 하고, 나의 자리를 반문하게 한다. 씨앗의 힘이다.

<씨앗의 시간>은 2022년 DMZ 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대상작이다.

 

 

사진 출처: 다음

 

 

글·이승민
영화 연구자, 평론가, 기획자, 강연자로 활동, 독립영화와 다큐멘터리영화 연구에 집중하고 있다. 저서로 <한국다큐멘터리의 오늘>(공저), <아시아 다큐멘터리의 오늘>(공저), <영화와 공간> 등의 저서와 다수의 논문이 있다.

  • 정기구독을 하시면 온라인에서 서비스하는 기사를 모두 보실 수 있습니다.
이 기사를 후원 합니다.
※ 후원 전 필독사항

비공개기사에 대해 후원(결제)하시더라도 기사 전체를 읽으실 수 없다는 점 양해 바랍니다.
구독 신청을 하시면 기사를 열람하실 수 있습니다.^^

* 5000원 이상 기사 후원 후 1:1 문의하기를 작성해주시면 1회에 한해 과월호를 발송해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