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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경의 시네마 크리티크] 해 질 녘 풍경에 대한 두 가지 생각, <썬다운 Sundown, 2022>과 <애프터 썬 Aftersun, 2022>
[김 경의 시네마 크리티크] 해 질 녘 풍경에 대한 두 가지 생각, <썬다운 Sundown, 2022>과 <애프터 썬 Aftersun, 2022>
  • 김 경(영화평론가)
  • 승인 2023.03.13 10:2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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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죽음을 관조하는 두 가지 해 질 녘 풍경

비슷한 시기에 개봉한 두 영화 <썬다운>과 <애프터썬>은 흡사한 점이 많다. 영화 중간 어느 한 곳을 정지한다면 어느 영화 장면인지 혼란스러울 지경이다. 두 영화의 주인공들 모두 조용하고 한가하다. 태양이 눈부시게 빛나는 바닷가 휴양지에서 물끄러미 파도를 보고 있거나 햇빛 아래 누워서 졸고 있다. 각각 멕시코와 튀르키예로 휴가를 떠나 여행하는 중이라고는 하지만 화려한 관광지가 아니다.

 

영화<애프터썬>포스터

한적한 곳이라는 느낌일 뿐이다. 그런데 관객은 그 한가로운 장면을 보면서도 마음이 편하지 않다. 불안은 평화로운 외피를 잠식해간다. 관객은 그들의 여유 이면에 놓인 뭔가가 슬쩍슬쩍 내비쳐질 때마다 점차 불안해진다. 삶과 죽음이 공존하면 삶도 더 또렷하게 도드라진다. 모두가 죽음을 알고 현재를 산다. 불안하지만 피할 수는 없다. 그 죽음이 눈앞에 왔을 때 오늘 사과나무를 심을지 서둘러 버킷리스트를 완수하고 싶을지는 개인의 몫이다. 이런 예시가 되는 두 영화가 <썬다운>과 <애프터썬>이다.

멕시코 감독, 미셸 프랑코(Michel Franco)가 각본과 연출을 한 <썬다운>은 암 선고를 받은 후 일몰의 순간을 ‘기다리는’ 반면에 영국의 샬롯 웰스(Charlotte Wells)감독이 각본과 연출을 한 <애프터썬>은 아버지(아마도 자살을 앞둔)가 자신의 마지막 생을 딸과 떠나는 터키 여행으로 ‘추억을 만들어’ 간다. 두 감독 모두 죽음에 대한 설명을 영화 뒷부분으로 미뤄놓고 의도적으로 모호하게 만든다. 죽음에 가까워지는 인물들은 내면을 드러내지 않은 채 침묵하고. 함께 여행하는 동반자들은 아무것도 모르거나 오해한다. 관객은 감독이 노출하는 정보를 함께 조용히 지켜보는 수밖에 없다. 관객에게도 단편적 정보들은 여전히 모호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썬다운>에서는 닐의 시선에 초현실적으로 등장하는 ‘돼지’라든가 <애프터썬>에서 역시 문득문득 끼어드는 기억 혹은 상상의 단편을 상징하는 비현실적 섬광이 그런 예이다. 이 두 영화는 불안한 정신상태와 불완전한 기억에 대한 어쩔 수 없는 그 ‘모호함’에 대한 의식과 화면구성을 통해 모호함을 말한다.

 

어느 허무주의자가 맞는 해 질 녘, <썬다운>

닐(팀 로스)은 멕시코에서 휴가 중 어머니의 부고를 듣고도 돌아가지 않는다. 장례식 참석차 황급히 돌아간 누이(샤를로트 갱스브르)나 조카에게 여권을 놓고 왔다고 거짓말을 하면서까지 돌아가지 않고 호텔에서 빈둥거리는 모습을 보는 관객은 시종 어리둥절하다. 관객은 고개를 갸우뚱하는 심정으로 그저 지켜볼 뿐이다. 영화의 대부분은 닐이 허름한 호텔이나 바닷가에서 빈둥거리거나 멕시코 아가씨와 데이트를 즐기는 모습이다. 스페인어를 할 줄 모르는 영국 남자와 영어를 할 줄 모르는 멕시코 아가씨의 데이트이니 말도 별로 없다. 영화 후반부에 들어가서야 비로소 그가 속수무책으로 만나곤 하는 돼지들과 그의 집안이 양돈계의 거대 자본가라는 두 가지가 결합한다. 그가 자신의 뇌종양을 알고 양돈계에서 떠나기로 했는지, 원래 양돈에 대해 환멸을 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가 현재 그의 가업에 대해 느끼는 혐오는 추측할 수 있다. 프랑코 감독은 시네 21과의 인터뷰에서 “각 장면에서 스스로 무엇을 생각하고 느낄지 사유하는 관객을 믿는다.”라고 했지만, 그가 배치해 놓은 장면들의 도식적이고 추측할 수 있는 서사는 굳이 ‘사유’라고까지 할 게 없을 정도다. 뇌종양에 걸린 이 백만장자 상속자가 죽음을 목전에 두고 상속을 포기하고 여생을 멕시코 해변 호텔에서 조용히 남모르게 죽어가겠다는 의도는 백분 알겠으나, 그가 가족과의 소통을 단절하고 자폐적이고 이기적으로 생을 마무리하는 모습은 공감하기 어렵다. 소통 부재의 결과 그의 누이는 끝까지 이유도 모른 채 급사하게 되고 조카들은 분노한다. 그런데도 감독은 영화적 장치를 통해 닐의 행동에 공감을 불러일으키고 싶어 한다. 영화 첫 장면에 그의 시선 아래에 놓은 죽어가는 물고기의 팔딱이는 순간이나 그가 스스로 햇볕에 그을려 벗겨진 피부를 자폐적으로 뜯어내는 행위(그가 영화 내내 하는 행위의 압축판) 등을 통해 그가 죽음에 대해 느끼는 압박감에 호소한다.

 

영화 썬다운 포스터
모래사장에 반쯤 묻혀있는 닐의 일몰, <썬다운> 포스터

그 압박감은 모래사장에 반쯤 묻혀있는 닐의 모습을 담은 영화 포스터에서도 포착된다. 인생이 조금씩 가라앉고 있다고 느끼는 그가 하루 종일 시간을 죽이며 말없이 앉아있는 해변 장면은 ‘헛되고 헛되다’ 식 허무주의적 침묵이라고 강변한다. ‘죽음 앞에 돈도 명예도 필요 없고, 오로지 이기적으로 자신만을 바라보고 쉬고 즐겨라. 그러나 인생 뭐 있나’ 식의 메시지는 허무개그에 가깝다.

 

마지막 장면:섬광등 롱테이크가 남긴 아버지의 해 질 녘,<애프터썬>

영화는 31세 생일을 맞은 소피(프랭키 코리오 Frankie Corio)가 20년 전 아버지 캘럼(폴 메스칼 Paul Mescal)과 함께 했던 튀르키예 여행을 떠올리며 시작한다. 그런데 이 영화는 친절하거나 관습적으로 추억을 설명하지 않는다. 억지로 이해시키려고 하지도 않는다. 정확하지 않은 기억은 그대로 둔다. 애써 짜 맞추지 않는다. 그 점이 이 영화의 미덕이다. 추억은 왜곡되거나 미화될 수도 있다. 그래서 많은 추억은 사실과 환상 중 어디쯤 혼재되어 있게 마련이다.

뿌옇게 먼지 쌓인 11살 소피의 기억은 그녀가 바라보는 바다의 물비늘 같은 편린들이고 카메라는 그녀가 기억하는 부분은 클로즈업하고 기억에 없는 부분은 안 보여준다. 상상으로 채워졌을 부분도 있다. 이런 이유로 연속적 의미는 단절되곤 한다. 논리나 개연성은 크게 중요하지 않다. 그 나이에 그것이 보였고 이상하게 그 기억만 남는 어떤 장면들이 있게 마련이니까.

 

함축적인 마직막 장면
함축적인 마직막 장면

그러나 영화의 마지막 공항 장면 롱테이크는 그 불연속의 마침표를 찍으며 먹먹한 여운을 남긴다. 영화 중간중간 끼어들어 불안을 조성했던 섬광 쇼트가 마침내 마지막 장면에 보이는 순간, 아버지가 공항 복도 끝 문을 열고 나설 때 살짝 보이는 순간 말이다.휴양지와 햇살, 댄스와 음악 사이에 끼어드는 불안하고 어두운 섬광 쇼트는 마침내 마지막 롱쇼트 섬광 쇼트로 아웃 코다가 된다. 트뤼포의 <400번의 구타>에 비견될 만큼 강력한 마지막 장면이다. 이 영화는 이 한 장면으로 ‘다’ 했다.

이제 우리는 31세 어른 소피처럼 추억의 단편들을 복기하며 얼개를 다시 정리해볼 수 있다. 생각보다 많이 경제적 압박을 느꼈을 아버지, 그래서 왠지 마음이 짠하던 뒷모습, 철없이 아버지의 경제적 무능함에 대해 도발했던 어린 자기 모습, 아버지의 고통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른 채 사춘기 소녀의 성적 호기심에 정신이 팔려있던 자기 모습 등등. ‘지금 알았던 것을 그때도 알았더라면.’

31세 생일 아침 그녀가 내딛는 카펫 광각 앵글은 그래서 의미심장하다.

 

카펫은 고뇌고, 추억이며, 시간을 잇는 유산이다.
카펫은 고뇌고, 추억이며, 시간을 잇는 유산이다.

그녀는 이제 추억여행에서 현실로 돌아와 두발을 내딛고 있다. 소피는 아버지가 여러 차례 카펫 가게에 방문하며 고심한 것에 대해서 몰랐다. 영화에서는 그 고심에 대해서 설명이 없지만, 소피를 비롯한 관객들은 저마다의 프리즘을 통과한 빛의 파장만큼 이해할 수 있다. 그렇게 할 수 있도록 의도적으로 많은 여백을 남겨둔 노련한 연출이 샬럿 웰스 감독의 장편영화 데뷔작이란 것도 인상 깊다. 딸과 아버지의 손을 오가는 비디오 촬영 장면과 섬광 쇼트의 분절과 연결, 마지막 롱테이크, 낮은 광각 앵글 카펫 등의 다채로운 영화언어 등을 정교하게 구사한 감독은 튀르키예 마지막 댄스파티에서 흘러나온 퀸과 데이비드 보위의 ‘언더 프레셔 Under Pressure’로 화룡점정을 찍는다. 이 노래의 가사처럼, 그는 딸과의 여행을 통해 스스로 한 번 더 기회를 준 것 같은데, 그는 극복하지 못한 듯하기 때문이다.

 

나를내리누르는중압감 Pressure pushing down on me

왜우린자신에게한번더기회를줄순없는걸까? Can't we give ourselves one more chance?

이건우리의마지막춤이야 This is our last dance.

 

애프터 팬데믹이 전해주는 삶과 죽음에 대한 해석들

팬데믹은 당대의 안전 선로를 완전히 교차시켜놓았을 뿐만 아니라 전 세계인의 감성과 생활 습관에도 큰 변화를 만들었다. 팬데믹은 개인의 감수성 프리즘에 상처를 만들었고 그것이 더 빛을 다채롭게 하고 때론 빛을 잃게 한다. 비 온 뒤에 꼭 땅이 마르는 것만은 아니라는 것도, 붕괴하는 것도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죽음’이 그것을 압축하여 상징한다면, 피할 수 없는 죽음에 대해 <썬다운>의 닐 처럼 방조하고 숨는 방법도 있을 것이고 <애프터썬>의 아버지처럼 안간힘을 쓰다가 섬광등처럼 점멸하며 사라지는 법을 택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잔잔하지만, 절망적인 이 영화들을 통해 삶도 더 애틋해진다.

 

 

글·김 경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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