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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버넌스’의 알리바이
3월의 ‘르 디플로’ 읽기
[42호] 2012년 03월 12일 (월) 16:57:53 안영춘 editor@ilemonde.com

3월호를 마감하는 사이, 제주도 강정마을에서 급박한 소식이 들려왔다. 지난해 말 국회가 제주도 해군기지 건설 관련 예산 대부분을 삭감하고, 올해 국무총리실 산하 위원회가 기지 설계의 기술적 결함을 지적했는데도, 이명박 정권은 큰돈 들이지 않고 화약 몇 다발로 그곳 구럼비 바위를 돌이킬 수 없는 수준으로 파괴하려 하고 있다. 구럼비의 자연사적·문화적 가치를 놓고 볼 때, 이명박 정권은 과거 정권이 자행해온 국가 폭력에 '반달리즘'이라는 항목을 추가한 셈이다. 그러나 그 방식은 부동산 투기꾼들의 낯익은 '알박기'와 다르지 않다. 박희태 전 국회의장(당시 한나라당 대표)이 4대강 사업과 관련해 "전광석화처럼 시작해 전 국토를 공사장으로 만들자"고 했던 말을 굳이 상기하지 않더라도, 이 정권의 사업 작풍은 언제나 투기꾼들의 그것을 압도해왔다.

이명박 정권의 살벌한 국가 폭력을 바라보며 '좋은 거버넌스'에 대한 허기를 느끼게 된다. 거버넌스는 듣기에 '사람 얼굴을 한 행정'을 말하고 싶어 하는 것 같다. 법과 제도의 무생물성에 숨결을 불어넣고 피를 돌게 하자는 규범적 의지를 나타낸 것이 아닐까 짐작해보기도 한다. 하지만 이처럼 국가의 이미지를 '통치·지배'의 뉘앙스에서 '경영'의 뉘앙스로 대체한다고 해서 국가의 속성이 대번에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뜻하지 않은 결과를 맞을 수도 있다. 이명박 정권이야말로 국가를 비즈니스 차원에서 관리해오지 않았던가. 나쁜 비즈니스는 나쁜 스테이트보다 더 위험할 수 있다. 사익을 위해 공적 영역을 유린하고, 공권력을 동원해 투기적 알박기를 하면서도 되레 사회정의를 들먹일 수 있는 것도 거버넌스라는 기표가 제공하는 알리바이 덕분인지 모른다.

한국만의 얘기가 아니다.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3월호는 발칸 국가들에서 유럽연합(EU) 가입에 반대하는 목소리가 높아지는 사태(10~11면)를 전하는데, 그 이유 가운데 하나가 EU의 거버넌스적 규범 강제에 대한 반발이라고 한다. 쿠데타 뒤 3년 동안 과도정부를 거치며 정치·경제 시스템이 궤멸하고 있는 아프리카의 마다가스카르에서도 거버넌스에 의한 숱한 피해 사례가 보고되고 있다(18~19면). 발칸과 마다가스카르에서 거버넌스란 공통적으로 초국적 자본에 의한 선별적인 특혜와 차별적 배제, 그 결과를 조건으로 한 무한경쟁을 뜻한다. 천연자원은 특권층에 의해 헐값에 (밀)수출되고, 노동자들은 임금·복지 삭감과 해고를 당한다. 국가는 퇴조하는 듯하지만 정치권력은 오히려 막강해진다. 권력 행사 방식이 좀더 은밀해지지만, 폭력은 더욱 넓고 깊게 구조화된다.

이처럼 국제화된 민-관의 결탁은 '마피아'에 빗댈 만하다. 한국판 특집 '탈핵 시대의 도래'(24~28면)는 '에너지 마피아', '원자력 마피아'가 어떻게 구성·작동하는지 공개한다. 그러나 그들의 강고한 성채는 지난해 일본 후쿠시마 원전 폭발 사태 이후 크게 흔들리고 있다. 독일에서는 이미 정부가 나서서 탈핵을 선언했지만, 한국과 일본에서도 에너지 민주화운동의 구심력이 커지고 있다. 월간지를 마감하다 보면 종종 겪는 일이지만, 잠자는 시간을 쪼개가며 바쁘게 일하는 사이에도 세상은 월간지 편집자의 노동보다 몇 배는 숨가쁘게 돌아간다. 월간지의 호흡은 발등에 떨어진 불을 감당할 수 없다. 이번 강정마을 사태도 3월호에서는 다룰 수 없었다. 하지만 핵 문제도 그렇고 평화 문제도 그렇고, 긴 호흡으로 접근하면 낙관적 흐름을 읽어낼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르 디플로>를 읽는 또 하나의 이유다. <르 디플로>를 손에 쥐고 현장으로 달려간다면, 냉철한 이성과 뜨거운 가슴을 동시에 성취할 수 있지 않을까.

글•안영춘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편집장 editor@ilemond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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