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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과 들의 이름 모를 꽃에 이름표를 달다
산과 들의 이름 모를 꽃에 이름표를 달다
  • 조민제 l 변호사, 『한국 식물이름의 유래』의 공저자
  • 승인 2023.03.31 1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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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식물향명집』에 바친 식물학자들의 열정

우리 풀꽃에 이름표를 붙여준 이들을 기억하며

 

푸른 4월이다. 산과 들에는 수많은 풀꽃들이 화사하게 얼굴을 내민다. 얼굴은 익숙해도, 정작 이름은 모르는 풀꽃들이지만, 저들에게 정성 들여 이름표를 붙여준 이들이 있다. 특히 암담하기만 하던 일제 강점기와 해방 이후의 혼란기에도 묵묵히 전국의 강산을 훑으며 이름 없는 풀꽃들을 찾아 세세하게 분류하고 고귀한 이름을 불러준 이들이 있었기에, 이 풀꽃들은 우리에게 다가와 비로소 꽃다운 꽃이 됐다.
 
본지는 한평생 우리꽃 지킴이로 활동해온 식물애호가 3인의 글을 받아 식목일의 의미를 다시금 되새긴다. (편집자 주)

 

정태현·도봉섭·이덕봉·이휘재, 『조선식물향명집』, 조선박물연구회(1937.3.)

내가 우여곡절 끝에 뒤늦게 대학을 졸업하고, 사법고시에 합격해 변호사 업무를 시작할 즈음 외환위기가 닥쳐 온 나라가 어수선했다. 변호사 업무를 막 시작한 나는, 부실에 빠진 금융기관과 기업들에 대한 구조조정 업무들을 맡아야 했다. 곳곳에서 혼란과 아우성이 쏟아졌고, 내게는 일이 쏟아졌다. 늦었던 고시 공부로 인해 서른 즈음에 시작한 변호사 업무는 새벽 2시경이나 돼야 퇴근이 가능한, 끝없는 야근의 연속이었다. 휴일도 제대로 쉴 수가 없이 밀려오는 일들을 허겁지겁 처리하기에 바빴다. 그렇게 몇 해를 보내고 나자, 몸에서 이상 신호가 오기 시작했다. 어느 날 근무 중에 심장이 멈춰 호흡을 제대로 할 수 없었고, 급기야 구급차가 와서 병원으로 호송돼 한동안 병원 신세를 져야만 했다. 

건강을 회복하기 위해 일을 줄이고 등산을 시작했다. 산을 오르면 금세 가빠오는 호흡으로 인해 숨이 차서 자주 쉬어 가야 했다. 그 쉬는 시간에 눈에 이름 모를 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저게 무슨 꽃일까? 의문이 자연스럽게 들었다. ‘똑딱이’라 불렀던 작은 디지털 카메라를 사서, 산과 들에서 피어나는 꽃들을 하나둘씩 담기 시작했다. 무슨 꽃인지 궁금해서 이것저것 식물도감을 구입해 찾았고, 국내 문헌으로 만족스러운 답을 얻지 못하자 여가를 활용해 일본, 미국, 영국 그리고 중국 자료들을 뒤졌다. 그리고 꽃을 피운 식물의 종을 구분하고 그 이름을 알아가기 시작했다.

그러자, 자연스럽게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왜 이런 이름으로 불리게 됐을까?’ 학명을 이해하기 위해 라틴어를 공부하기도 했다. 그때 즈음에 만났던 책이 작고하신 이우철 강원대 생명과학과 교수님께서 적으신 『한국 식물명의 유래』(일조각, 2005년)였다. 한반도에 분포하는 관속식물에 대해 1937년 이래 식물분류학자들이 저술한 문헌에 근거해 기록된 식물명(한국명과 라틴학명)을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관련 유래가 있는 경우 간략하게 기술한 식물명 해설집 성격의 문헌이었다.

책이 닳고 해어지도록 읽었을 즈음, 우리말로 부르는 식물 이름의 출발지가 1937년에 저술된 『조선식물향명집』으로 현재의 주요한 식물 이름이 모두 이 책의 기록에서 비롯됐음을 알게 됐다. 그래서 우여곡절 끝에 이 책의 복사본을 구해 읽기 시작했다. 첫 느낌은 ‘허탈함’이었다.

 

정태현·도봉섭·이덕봉·이휘재, 『조선식물향명집』, 조선박물연구회(1937.3.), 74쪽

 책의 내용은 무미건조했다. 학명을 먼저 기록했고, 다음으로 당시에 일제강점기였다는 것을 알려주기라도 하듯이 일본명이 기록돼 있었다. 마지막으로 조선명을 기록했는데 조금 더 상세히 표시해 당시의 알파벳으로 한글 발음이 표기됐고 그다음으로 한글 표기, 한자명이 차례로 이어져 있었다. 이런 방식의 기록이 1,944개의 항목으로, 이름의 유래에 어떤 해설이나 설명 없이 나열만 돼 있었다. 이 책을 살피면 우리말 식물명의 유래를 알 수 있으리라는 기대는 산산이 부서졌다. 

이미 일본인 생물학자 모리 다메조(森爲三, 1884~1962)가 조선에 분포하는 관속식물을 정리한 『조선식물명휘』(조선총독부, 1922년)가 출간돼 있었고, 그곳에도 부분적이지만 한글로 된 조선명의 기록이 있었는데 왜 굳이 저 책을 별도로 적었을까? 일본인이 책을 단순히 베낀 것인가? 이런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 의문은 우연히 찾은 자료에서 풀리게 됐다. 

“인왕산은 뒤뜰 되고 사직단은 앞뜰 돼 뒤뜰에는 자연생태 그대로의 고산식물원을 만들고 앞뜰에는 조선산 식물을 모아다가 식물견본원을 설치하는 한편 얌전한 온실을 세워 교수와 연구에 필요한 열대식물을 재배하고 참한 못을 하나 파고 어류를 기르니 부유생물이 저절로 번식하게 된다. 밭은 1내지 2.5보 가량 만들어서는 식물의 유전 진화학적 실험을 하고 하기 휴가면 조선 산야를 편답해 식물채집과 조선명칭 수집에 힘쓰어 조선명으로 식물목록과 식물도감을 편찬하다가 학생들의 떠드는 소리에 놀라 깨니 남가일몽” - 이덕봉, 『학교 구내식물 이야기』, 배화여자고등보통학교 교지(1926), 110쪽

당시 배화여자고등학교 교사였던 『조선식물향명집』의 제3저자 이덕봉 교수가 배화여고 교지에 적은 바에 따르면, 새로이 도입된 과학이었던 식물학에 근거해 조선명으로 된 식물목록과 식물도감을 편찬한다는 것은, 일제강점기의 조선인 식물학자와 연구가들에게는 남가일몽(南柯一夢)과도 같았다. 그럼에도 간절한 꿈이었다. 그 오랜 꿈을 실현하기 위해 조선인 식물학자와 연구가들로만 구성된 조선박물연구회를 1933년 5월에 결성했고 그 최초의 성과물이 『조선식물학명집』의 편찬 작업이었던 것이다. 이는 조선말로 된 식물도감을 편찬하기 위한 전초 단계로서 조선명으로 된 식물목록(식물명집)이었다. 

조선총독부의 주관하에 일본인이 편찬한 『조선식물명휘』가 식민지 지배를 위한 자료, 한반도 분포 식물에 대한 기초 조사집이라면, 『조선식물향명집』은 피지배민이 과학의 기초하에 자기 자신의 주체성을 찾기 위한 노력의 결과물이었다는 점에서 그 성격을 전혀 달리하는 것이었다. 

 

조선박물연구회 창립 소식을 알리는 동아일보 기사(1933.6.27.자 기사)

이런 명백한 차이를 확인하자, 나에게 『조선식물향명집』은 새롭게 와 닿았다. 그리고 책의 앞부분에 기록된 ‘사정요지(査定要旨)’가 비로소 눈에 들어왔다. 외국으로부터 전래된 과학이었던 식물학에 근거해 종 분류를 새로이 하고 그에 대한 조선명에 대해서는 실제 민중(언중)이 사용하는 이름을 조사해 정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식물에 대한 종래의 전통적 이름이 없는 경우에는 비슷한 명칭을 참고해 새로이 이름을 정했다는 것이 주요한 내용이었다. 

즉, 상설하면 “1. 조선에서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조선명을 그대로 채용함”이 제1의 원칙이었고, 다음으로 이를 제대로 찾지 못하는 경우 “2. 종래 문헌상에 기록된 조선명은 될 수 있는 대로 그대로 채용함”(즉, 문헌을 참고해 이름을 찾음)이 제2의 원칙이었으며, 그리고 3-1. 여러 이름으로 혼선이 있는 경우에는 가장 적합하고 보편성이 있는 것을 대표로 하고 기타는 ( )로 표시한다는 것과 3-2. 전혀 이름을 찾을 수 없는 경우에는 가. 식물의 형태적 특징, 나. 학명에 대한 참고, 다. 해당 식물에 대한 전설과 유래 등, 라. 식물의 산지, 발견자, 생육상태, 마. 해당 식물의 색, 냄새, 맛 등을 참고해 새로이 정한다는 것이 제3의 원칙이었다.

 

금낭화의 꽃

이런 사정요지에 따라 『조선식물향명집』의 74쪽에 기록된 금낭화라는 이름은 식물 명칭을 기록한 옛 문헌, 이름이 기록된 일제강점기의 각종 기록, 현재에 각 지역에 남아있는 방언에 대한 조사 그리고 금낭화라는 식물의 이용에 대한 민속적 기록 등 각종 자료를 찾아 그 내역을 확인하니 실체에 접근할 수 있었다. 먼저 1842년에 기록된 『허백당집』에 한자로 비단주머니라는 뜻을 가진 “錦囊花”(금낭화)가 기록됐다. 또한 프랑스의 선교사들이 조선어를 공부하기 위해 편찬된 1880년의 『한불자전』에도 한글과 한문으로 “금낭화, 錦囊花”라고 기록된 것이 확인됐다. 일제강점기인 1920년대에 편찬된 『조선어사전』에도 “錦囊花(금낭화)”라는 이름이 기록돼 있었다. 

그리고 뒤늦게 조사된 것이기는 하지만 국립수목원의 최근 각 지방의 방언 조사에서도 여러 지역에서 금낭화라는 이름과 더불어 “금낭, 금낭애, 금낭에” 등을 사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고, 특히 강원도 지역에서는 우리말 명칭으로 “면누리주머니”라는 방언을 사용하고 있음이 확인됐다. 즉, 『조선식물향명집』에서 기록된 “금낭화(며누리주머니)”는 모두 당시에 사용되던 이름으로 사정요지에서 밝힌 것처럼 금낭화가 상대적으로 보편성이 있는 이름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름이 가지는 단어적 의미를 식물의 형태 등에 견주어 보면, 금낭화라는 이름은 꽃이 피었을 때 모습을 비단으로 만든 주머니로 본 것에서, 며누리주머니라는 이름은 꽃이 아름다운 며느리를 연상시키고 그 모양이 마치 주머니와 닮았다고 본 것에서 유래한 이름이라는 점을 알 수 있다.

 

조선어학회, 『한글』, 제8권 제9호(표지, 1940.11.)의 표지와 광고면

그런데 다시 의문이 생겼다. ‘査定(사정)’이라는, 다소 낯선 이 말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 자료를 찾던 중 일제강점기에 우리말을 연구하고 지키고자 했던 조선어학회(현 한글학회)가 1933년에 ‘한글 마춤법 통일안’이라는 제목으로 발표한 『한글 맞춤법 통일안』, 1936년에 발간한 『사정한 조선어 표준말 모음』에서 표준말을 정하는 기준이 된 방법이 바로 이 ‘査定(사정)’이었다. 

표준말은 당시의 중류사회에서 쓰는 서울말로 하고 그 실제 내용을 조사해 정하는 것이었다면, 식물명의 조선명은 식물이 서울에 모여 살지 않기 때문에 그 조사 대상을 서울로 한정하지 않았고 식물의 민속적 이용(약용, 식용 및 화훼용 등)은 각계각층에서 있는 일이었으므로 굳이 중류사회의 말로 좁히지 않았다는 점에서는 차이가 있었지만, 실제 사용하는 현실의 말을 조사해 보다 일반적이고 보편성이 있는 것을 식물의 이름으로 하겠다는 기본적인 방법론은 동일한 것이었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조선어학회와 조선박물연구회는 어떤 관계였고 조선박물연구회의 식물연구가들이 어떻게 조선어학회가 취한 방법론을 택하게 됐을까하는 의문이 생겼다. 그 흔적들은 쉽게 찾을 수 있었다. 먼저 조선어학회가 1937년에 출간한 것으로 이후에 『조선말 큰사전』의 모태가 된 『사정한 조선어 표준말 모음』의 서문에는 표준어 중 전문용어에 대해서는 모두 조선박물연구회가 사정 작업을 담당했고, 특히 식물어에 대해서는 『조선식물향명집』의 제3저자 이덕봉 교수가 참여했음이 기록돼 있었다. 

또한 조선어학회의 기관지였던 잡지 『한글』의 1937.1.자에는 이덕봉 교수의 명의로 『조선식물향명집』의 국화과 부분에 대한 원고가 간단한 해설과 함께 논문(‘조선산식물의 조선명고’)으로 그대로 게재돼 있었다. 1937년 이후의 잡지 『한글』 마지막 면에는 매호 실리는 광고가 게재돼 있었는데, 그곳에 조선어학회가 추천하는 ‘조선어문 연구 우량서적’이라는 제목하에 조선어학회의 연구서적과 더불어 『조선식물향명집』이 함고 추천 서적으로 광고되고 있었다.

『조선식물향명집』은 한반도에 분포하는 식물에 대한 종을 분류하고 그에 대한 학명을 찾는 과정은 식물학에 따른 과학이 영역으로 다루었으나, 그에 대한 우리말 이름은 철저하고 실제 우리의 민중(언중)이 사용하는 우리말의 영역으로 이해하고 기록한 문헌이었다. 다시 말해 『조선식물향명집』은 국권피탈의 고통 속에서 ‘피지배민’이라는 숙명을 벗어날 수 없었던 조선인 식물 관련 실무자와 학자들이 식물연구를 통해 민족적 정체성을 찾으려는 과정이었던 것이다.

생각이 이에 미치자 2010년경부터 불기 시작한 우리 식물 이름에 청산되지 않은 일제의 잔재가 있으며, 나아가 “일제강점기에 제국주의에 길들여진 식물학자들이 일제의 식물자원 착취를 등에 업고 자신의 학문적인 업적을 위해 조선을 조사하면서 일본어로 지은 이름을 무비판적으로 번역해 오늘에 이르고 있는 것이 우리의 실정이다”(이윤옥, 『창씨개명된 우리 풀꽃 이름』, 인물과 사상사(2015) 중에서) 등의 언급이 전혀 역사적 사실과 맞지 않은, 자신들만의 머릿속의 이데올로기에 기반한 자의적 주장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리고 일제 잔재가 청산되지 않은 우리 식물명을 바로 잡겠다고 식물학자가 펴낸 책을 보면 옛사람들이 식물과 함께 생활하며 만들고 발전시켜온 우리말 이름인 ‘광대나물’, ‘벼룩나물’, ‘벼룩이자리’, ‘등골나물’, ‘곰취’, ‘호랑버들’, ‘개불알꽃’ 등의 이름을 줄줄이 일본명의 번역어로 취급해 오히려 창씨개명을 시키고 있으며, 나라 잃은 슬픔과 원망이 쌓여 언중 사이에 형성된 ‘망초’와 같은 소중한 이름을 비루한 것으로 취급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래서 삼일절과 광복절이면 의례히 친일잔재를 청산한다며 실리는 연례적 기사들, 식물 문외한이 마음대로 적은 책, 식물학자가 식물학의 외피에 역사적 사실에 전혀 맞지 않은 이데올로기를 씌우고 출간한 책에 대한 문제점을 알리고 반박 자료를 찾아 기사화시키며 각종 식물동호회에 그런 내용을 알리기 시작했다. 느리지만 조금씩 반응이 생기기 시작했고, 우리말 식물 이름에 대한 이해가 높아지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그리고 뜻이 맞는 식물애호가들이 함께 모여 『조선식물향명집』에 기록된 1,944개의 항목이 실제로 어떤 역사와 과정을 통해 형성된 이름인지를 일일이 자료로 확인하는 내용으로 구성된 『한국 식물이름의 유래-조선식물향명집주해서』를 무려 7년의 이상의 세월을 쏟아 완성해 2021년에 출판물로 세상에 내놓을 수 있었다. 

이 책은 『조선식물향명집』의 제1저자 정태현 교수의 수제자이셨던 이우철 박사님의 감수 하에 이뤄졌다. 이우철 박사님은 초보자에 불과한 저자들에게 특유의 온화한 성품에 곁들여 과학 연구의 성과물을 온전히 공유해 주셨다. 또한 우리말로 된 식물명은 과학의 기반 위에 우리의 역사와 전통이 반영된 이름이라는 점을 강조하셨다. 선생님의 그 말씀은 『한국 식물 이름의 유래-조선식물향명집주해서』의 주요한 정신이자 기조가 됐다.

요즘도 시간이 날 때마다 카메라를 둘러메고 산과 들을 쏘다닌다. 산과 들 그리고 숲에서 피어나고 각자의 특성에 따라 자라는 많은 식물을 보고 하나씩 이름을 불러주며 그 이름에 아로 새겨진 우리의 전통과 역사를 되새긴다. 국권을 상실한 시대 그리고 우리말을 버려야 했던 시대에 선학자들이 『조선식물향명집』에다 쏟은 피와 땀이 어린 노고로 인해 비로소 지켜지고 계승된 이름이라는 것에 생각이 닿으면, 살아있는 생명의 숭고함에 더해 감사함을 마음을 다시금 새기게 된다. 

 

 

글·조민제 
서울대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사법연수원을 29기로 수료한 후 변호사로 일하고 있다. 취미로 야생식물 탐사와 옛 식물에 대한 기록을 연구하고 있다. 논문으로 <조선식물향명집 사정요지를 통해 본 식물명의 유래>와 책으로 『한국 식물 이름의 유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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