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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아름의 시네마 크리티크] 가족은 하나가 아니다 - 영화 <고속도로 가족>
[송아름의 시네마 크리티크] 가족은 하나가 아니다 - 영화 <고속도로 가족>
  • 송아름(영화평론가)
  • 승인 2023.04.17 11:2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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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의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고속도로 가족>(2022) 포스터 

 

내가 선택할 수 없음에도 결코 벗어날 수 없는 것, 누군가에겐 의식하지 못할 만큼 당연한 온기로 또 누군가에겐 지긋지긋하게 후벼파낸 상처로 삶을 지배하는 것, 이렇게 진절머리나게 다르면서 또 끊을 수 없는 얽힘이 가족이라는 말로 뭉뚱그려진다. 피로 연결되었다는, 너무나 원초적이어서 공포러운 이 관계는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적절히 희석되며 보호의 테두리이자 나를 살아가게 하는 동력으로, 아니 그래야 하는 것으로 아름답게 포장되기도 한다. 그래서 가족이라는 이름 아래 지독히도 일방적인 힘이 오가는 사실을 언급하는 것은 불경스러운 것이자 잔인한, 태생적으로 사랑하도록 설계된 이들에 대한 무례를 범하는 것처럼 눈을 홉뜨게 한다. 대체로 가족과 회복 또는 휴머니티라는 단어가 가족을 등장시킨 영화들에 따라붙는 것이 그리 이상하지 않은 것은 이러한 인식 때문일 것이다. 가족 중 가장 강력한 권력(그것이 돈이든, 학력이든, 아니면 너무도 당연하게 주어진 지위 혹은 역할이든 간에)을 지닌 누군가의 뜻에 따라 가족 모두가 움직이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는 사실은 경악스러운 범죄에서나 잠시 스쳐갈 뿐 그리 그리 중요치 않은 일로 외면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니까 가족의 사정은 사회가 허락한 질서 안에 놓인 그 집만의 약속이기에 타인이 감히 끼어들 수 없는 것으로 간주되어 온 것이었다. 그 안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든.

걷고 걸어 몇몇 휴게소에서 일상을 해결하는 한 가족. 마치 여행을 떠나는 듯 보이는 그들은 텐트에서 잠을 청하고 휴게소를 놀이터 삼아 돌아다니며 사람들에게 돈을 빌려 식사를 해결한다. <고속도로 가족>에 등장하는 이들이 이처럼 살아가는 이유는 그들이 누구의 말을 따르고 있는가로 쉽게 설명된다. 사람 좋은 얼굴로 웃어 보이며 아이들에게도 다정함을 잃지 않지만 결국 아빠라는 이름으로 나머지 가족의 길까지 결정해버린 기우(정일우)의 선택은 가족들이 고통스러운 상황과 마주하게 했다. 등이 배기고 새벽녘 들이치는 빗방울에 갑작스레 몸을 피해야 하는 곳에서 잘 수밖에 없는 것도, 사람들에게 구걸하듯 돈을 빌리는 것도, 다리가 아파 도저히 걸을 수 없는 것을 참아야 하는 것도, 그리고 자신들에게 보내는 경멸의 시선을 감당하는 것도 모두 아빠의 선택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여기 어느 것에도 5살의 아들 택이(박다온)와 9살의 딸 은이(서이수), 그리고 엄마 지숙(김슬기)의 의사는 반영되지 않았음에도 그들은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마치 그것이 여행인 양 행복하다 포장해가며 함께 할 수밖에 없었다.

 

 

영화는 바로 이것이 폭력이라는 점을 은이의 시선에 집중하는 것으로 보여주었다. 텐트를 흔들며 빨리 철거하라는 목소리에도 대충 응대하며 자도 된다는 태평한 기우의 모습에 카메라는 은이는 불안한 얼굴을 잡았고, 아빠가 사람들에게 돈을 빌릴 때 옆에 서 있던 은이의 얼굴에 떠오르던 수치심을 놓치지 않았다. 종종 악몽을 꾸는 것도 동생을 어르고 달래 지금의 상황에 문제가 되지 않게 만드는 것도 은이의 몸에 벤 행동이라는 것을 영화는 꼼꼼히 담아내고 있었다. 무엇보

다 학교에 가고 싶다는 은이가 학교 별 것 없다며 심드렁하게 대답하는 아빠에게 나도 해보고 아니라 하고 싶다며 명확한 의사를 전달하는 것은 아빠의 선택이 얼마나 자기만의 세계에 빠진 것인지를 분명하게 설명했다. 이처럼 <고속도로 가족>이 기우네 가족이 아닌 ‘은이네 가족’으로의 전환을 꾀하는 것은 이 영화가 기우가 생각하는 가족이 과연 가족으로 불려도 되는가 라는 질문을 던지고 싶었기 때문일 것이다. 사기를 당하고 도망자 신세가 된, 그래서 사람은 무서운 것이라며 타인과 섞이지 못하고 트라우마에 갇혀 있는 삶은 당사자인 오직 기우의 몫이어야 함에도 그의 공포는 가족 모두가 겪어야 하는 것이 되어 버렸다. 여기에서 비롯된 가족이라는 이름의 폐쇄성과 일방성, 영화는 바로 이 지점을 날카롭게 지적하고 있었다.

아빠의 상처를 고스란히 받아들여야 했던 이들이 스스로 선택을 하기 힘든 위치에 있다는 것은 이러한 폭력이 얼마나 쉽게 스며드는 것인지를 생각게 한다. 엄마인 지숙은 보육원에서 자라 학교도 미처 마치지 못했고, 아르바이트를 하던 곳에서 기우를 만나 은이를 가졌다. 이러한 지숙의 전사는 문제가 생겨도 도움을 청할 곳이 마땅찮고 기우에 비해 상징자본을 가지지 못했다는 점에서 그가 왜 기우를 따를 수밖에 없었는지를 조금이나마 설명해주었다. 지숙은 대학을 다니던 기우를 만나고 또 생계를 기우가 책임지면서, 잘살아보겠다고 투자를 하다 실패한 것까지도 함께 감당해야 할 멍에로 생각했을지 모른다. 이렇게 지숙은 망가져 버린 남편에게서 떠날 수 없었고, 가족은 하나이며 늘 함께 해야 한다는 기우의 말에 토를 달지 못했다. 셋째까지 임신한 상황에서 지숙이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기우의 말처럼 ‘우리’가 떨어지지 않는 것으로 불안을 해소하는 정도였을 것이다. 기우가 감옥에 들어가야 하는 상황임에도 같이 있게 해달라며 애원하는 지숙은 아이들에게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들을 이 상황에서 끌어내주지 못했다. 이러한 부모 밑에서 아이들은 너무나 당연하게 성장할 시기도, 그들 스스로의 걸어가야 할 삶도 지나치고 있었다.

 

 

바로 이들을 구해줄 수 있는 방법으로 영화가 선택한 것은 그들을 향한 경멸이 아닌 관심이었다. 영선(라미란)이 자신이 돈을 빌려 주었던 가족이 아직도 같은 휴게소에 있는 것, 그리고 아이들이 위험한 상황에 처해 있는 것에 놀라 경찰에 신고한 것은 관심의 흔적이었다. 분명 부모가 있는 아이들이 누구의 보호도 받지 못한 채 위험한 곳을 배회하고 있으며, 그것에 항의했을 때 우리 일이니 관심 끊으라는 기우의 태도에 분노했던 것은 ‘은이네 가족’을 안전한 곳으로 데리고 올 수 있는 기폭제가 될 수 있었다. 이 영화의 제목이 은이네 가족들이 고립된 채 삶을 꾸리던 ‘휴게소 가족’이 아닌 <고속도로 가족>인 것은 그들의 삶에 다른 누군가가 끼어들었을 때, 그러니까 누군가가 결코 벗어나지 못할 곳에서 허우적대고 있는 이들을 발견했을 때의 변화를 보여주고 싶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바로 이 관심은 지숙에게도, 그리고 아이들에게도 변화의 물꼬를 튼다. 아이들은 잘 차려진 밥을 먹고 깨끗한 옷을 입고 등도 배기지 않는 잠자리에서 본능적으로 이것이 맞는 일상이라는 것을 느끼고 적응한다. 아이들은 무엇인가를 배우고, 엄마 아빠가 아닌 이들과도 이야기를 나누고 소통해가며 새로운 삶을 경험한다. 내년 봄이 되면 은이는 학교에 갈 수 있고 몸을 풀면 지숙은 영선의 가게에서 일을 배우고 월급도 받을 수 있다는, 당장 오늘이 아닌 내일을 꿈꿀 수 있는 삶이 이제야 그들 앞에 놓인 것이다. 지숙이 아이들을 보호하기 위해 기우로부터 떨어져야 한다는 점을 깨달은 것은 안정적인 관계가 굳이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함께하지 않아도 찾아온다는 점을 알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아직도 가족이 자신에게서 떨어지면 못 살 것이라 착각하며 찾아온 기우에게 지숙이 제발 가 달라고 비는 장면은 결코 가족은 똘똘 뭉치는 것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외치고 있었다. 기우에게서 떨어지고 나서야 일상을 찾았고 제대로 된 삶의 절차를 밟아나가게 되었다는 것을 안 지숙에게 기우와의 분리는 엄마로서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었을 것이다. 아빠가 찾아왔을 때의 은이의 불안한 눈빛, 그리고 이제는 한글을 알게 된 은이가 엄마와 아빠가 만난다는 것을 알고 잠을 이루지 못하는 것은 은이의 기족에게 기우가 얼마나 불안한 존재였는지를 아프게 드러낸다.

 

 

영화의 마지막 기우가 극단으로 치닫는 상황을 만든 것은 결국 가족이 함께 한다는 것은 오직 자신만을 살리는 길이었다는 점, 그리고 그것이 엄청난 폭력이라는 점을 스스로 인정한 셈이었다. 기우로 인한 큰 화재 후 영화는 택이와 은이, 지숙 그리고 셋째 아기와 영선의 가족이 평화로운 삶을 살아가는 장면과 불길을 바라보며 오열하고 있는 은이와 택, 그리고 영선 부부의 모습을 차례로 보여주며 이야기를 마무리한다. 정확히 무엇이 그들에게 남겨진 삶인지 어떤 것이 환상이고 현실인지는 알 수 없지만, 중요한 것은 이 두 장면 모두에 기우는 없다는 사실이다. 이렇게 자신이 가족을 끌고 나가고 있다고 믿는 이가 부재한다 해도 가족들은 잘, 아니 꽤나 행복하게 삶을 영위해 나가고 있다는 점은 변하지 않는다. 물론 이 작품에서 영선이 은이네 가족을 받아들였던 것과 같은 적극적인 관심은 쉽게 설명되지 않을지 모른다. 영화가 아들을 잃은 영선의 전사나 영선과 그의 남편 도환(백현진)의 갈등을 배치한 것도 이 상황이 현실에서 그리 쉽지 않다는 것을 짚기 위함이었을테니까. 그럼에도 그들이 함께 살아가는 것은 그리 이질적이지 않다. 영선 부부가 사업체를 운영하기 위해 고용한 티벳에서 온 체텐(샤오 체텐)이던, 정말 우연히 만나 함께 하게 된 은이네 이던, 어떤 이유로 만나게 되었던 그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익숙해지고, 친근하게 이름을 부르며, 함께 식사를 한다. 가족이라는 이름을 위해 이 편안함 이상으로 더 필요한 것이 있을까.

 

사진 출처: 네이버 영화

 

 

글·송아름
영화평론가, 영화사연구자. 한국 현대문학의 극을 전공하며, 연극·영화·TV드라마에 대한 논문과 관련 글을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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