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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정식의 시네마 크리티크] 스포츠가 시대의 폭력에 대처하는 방식-<코리아>
[임정식의 시네마 크리티크] 스포츠가 시대의 폭력에 대처하는 방식-<코리아>
  • 임정식(영화평론가)
  • 승인 2023.06.05 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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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리아' 포스터.
'코리아' 포스터.

할리우드의 시나리오 컨설턴트 크리스토퍼 보글러는 ‘영웅의 여행’이 보여주는 패턴은 모든 문화와 시대를 관통해 나타난다고 말한다. ‘영웅의 여행’은 보글러가 신화학자 조셉 캠벨이 전 세계 영웅 신화에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서사구조를 정리한 원질 신화 개념을 실용화한 모형이다. 국문학자 조동일이 제시한 ‘영웅의 일생’은 영웅의 유형과 역사적 변모 양상에 주목한다. 각 영웅 이야기의 화소들은 가변적인 데 반해 유형은 영웅의 지속적인 성격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보글러의 ‘영웅의 여행’과 조동일의 ‘영웅의 일생’의 모형은 영웅 신화(이야기)의 보편성과 반복성, 지속성을 강조한다.

두 모형에 나타난 공통점은 고대의 영웅 신화가 현대 영웅 이야기의 원형 역할을 한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특히 조동일은 우리나라 영웅의 행적을 중국, 서구와 달리 ‘투쟁’이라고 정리한다. 즉 모든 영웅은 자신을 둘러싼 여러 유형의 고난과 억압에 저항하고 투쟁하며, 이를 통해 위대한 업적과 내면의 성장을 이룬다. 우리나라 ‘영웅의 일생’은 고난과 시련, 도전과 모험, 투쟁의 서사인 셈이다. 스포츠영화의 인물들도 끊임없이 도전하고 투쟁하는데, 그 도전과 투쟁의 대상은 경쟁자, 가난, 부상, 장애 등으로 다양하다.

스포츠영화 <코리아>(감독 문현성‧2012)에서는 시대 환경이 운동선수인 인물에게 억압과 폭력으로 작용하고, 인물들은 스포츠를 통해 그 폭력과 투쟁함으로써 영웅의 면모를 획득한다. <코리아>는 인물들이 분단시대와 독재 권력이라는 외부 폭력에 맞서 싸우고, 자기희생을 통해 이를 극복하는 과정을 그린다. 무엇보다 <코리아>는 실화를 각색한 영화이다. 1992년 지바세계탁구선수권대회에 남북한 탁구선수들이 ‘코리아’라는 단일팀으로 출전해 금메달을 획득한 이야기를 토대로 한다. 그러한 점에서 <코리아>는 스포츠가 시대 상황 혹은 시대의 폭력과 관계 맺는 양상을 살펴볼 수 있는 중요한 텍스트이다.

<코리아>의 초반 몽타주는 남북한의 갈등과 대결 이미지를 극대화한다. “한반도는 지구상에 존재하는 유일한 분단국가”라는 자막은 영화의 시대적 이데올로기를 설명해준다. 프롤로그는 1990년 북경아시안게임 준결승전 상황을 긴박하게 소개한다. 화면에는 태극기와 인공기가 차례로 등장하고, 국내 신문들은 “준결승전 앞두고 남북한 신경전 최고조”, “남과 북, 오늘 밤 드디어 운명의 맞대결…남북전쟁”과 같은 자극적인 표현으로 긴장감을 조성한다. 이어서 현정화와 리분희의 스매싱, 네트를 빠르게 넘나드는 탁구공, 흥분해서 고함을 지르는 벤치를 교차편집으로 보여준다. 해설자는 이 경기를 “탁구 전쟁”이라고 표현한다.

<코리아>에서 현정화는 영화에서 국가대표로서 탁월한 능력을 지닌 인물로 등장한다. 그런데 남북한 정부는 정치적 목적에 의해 단일팀을 구성하고, 현정화를 포함한 선수들은 강제로 단일팀의 일원이 된다. 현정화는 리분희와 1990년 북경아시안게임 준결승전에서 전쟁과 같은 경기를 치렀다. 그런데 불과 2년 만에 남북 화해와 평화의 전도사 역할을 강요받는다. <코리아>에서는 개인의 탁월한 능력이 국가 권력의 정치적 목적 달성을 위한 도구이자 소모품으로 사용된다. 따라서 영화 초반에 자연스럽게 남북한 당국자, 감독, 선수들 사이에 갈등이 발생한다.

 

'코리아' 스틸컷.
'코리아' 스틸컷.

하지만 선수들은 결말에서 화합과 협동의 주체가 되어 목표를 이루고, 정치적‧이데올로기적 갈등과 대립의 해소 가능성을 제시한다. <코리아>의 메시지는 서사에 그대로 반영돼 있다. 극심한 대결 구도에서 출발해 자기희생과 화해의 과정을 거쳐 과업을 달성하는 결말로 마무리된다. 현정화와 리분희는 헤어지면서 안타까운 눈물을 흘리고, 현정화는 아버지에게서 받은 소중한 반지를 리분희에게 선물한다. 두 선수는 2년 후에 다른 국제대회에서 재회하는데, 이때 현정화와 리분희는 미소를 지으면서 파이팅을 다짐한다.

<코리아>의 프롤로그와 결말에 나타난 차이는 무엇 때문일까? 그 중요한 요인으로 선수들의 희생을 빼놓을 수 없다. 이 영화에서 희생은 정치적 목적과 집단(팀)의 이익이라는 상반된 방향으로 전개된다. 전자는 타의에 의한 강제적 희생, 후자는 자발적인 희생이다. 단일팀 ‘코리아’는 남북한 정부의 정치적인 계산에 따라 결성됐다. 실제로 북한 정부 관계자는 “리분희, 류순복으로 우승하는 것보다 리분희, 현정화가 함께 출전하는 것이 목표다.”라고 말한다. 남한 당국자 역시 “남북 단일팀 말이에요. 탁구나 잘 치자고 만든 거 아닙니다.”라고 강조한다. 즉 선수들은 남북한 정부의 정치적 목적 달성을 위한 도구이자 희생양일 뿐이다.

그런데 선수들은 자기희생을 통해 정치적 희생양이 될 위기를 극복한다. 먼저 류순복은 대회 초반에 패배를 거듭하자 메달의 꿈을 포기하고, 자신이 출전하기로 돼 있던 복식 경기에 현정화가 나가기를 권유한다. 류순복이 내세운 명분은 공익성이다. 류순복은 코칭 스태프에게 “우리 코리아 팀 전체를 위해서입니다. 부탁드립니다.”라고 말하면서 눈물을 흘린다. 집단의 이익을 위해서 개인의 영광을 희생한 것이다. 그 이전에 현정화는 세계대회에 처음 출전해 긴장한 류순복에게 따뜻한 조언을 해준 바 있다.

신화에서 자기희생을 통해 집단의 이익을 실현한 대표적인 여성 영웅으로는 바리공주가 있다. <바리공주> 신화에서 바리공주는 아버지가 병들자 궁중에서 호의호식하던 여섯 명의 언니들과 달리 목숨을 걸고 저승 세계로 내려가고, 그곳에서 약수와 꽃을 구해 지상 세계로 귀환해 아버지를 살려낸다. 바리공주의 저승 여행은 여러 가지 의미로 해석된다. 한국인의 미덕인 효의 실현, 저항적 자기표현, 지워진 자신의 존재를 찾아가는 길 등이다. 그런데 바리공주의 행적은 일차적으로 아버지의 죄를 대신해 자신을 희생하는 데서 시작된다. 바리공주는 왕이자 아버지가 지닌 남성 중심 가부장제 이데올로기의 강고한 벽을 자기희생으로 극복한 것이다.

 

'코리아' 스틸컷.
'코리아' 스틸컷.

<코리아>에서는 현정화도 집단(팀)을 위한 자기희생으로 공익성을 실현한다. 류순복 대신 복식 경기에 출전하게 된 현정화는 경기 당일 결승전이 열리는 경기장으로 출발하지 않고 숙소 앞의 비 내리는 시멘트 바닥에 꿇어앉는다. 그리고 단일팀 해체를 선언한 조남풍 감독에게 읍소한다. 북한의 한 남자선수가 한국인인 프랑스 국가대표 감독으로부터 명함을 건네받았고, 또 남한 선수와 데이트를 했다는 이유로 단일팀 해체와 출전 금지 조치를 당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현정화는 빗속에서 “감독님. 같이 가요. 우린 같은 팀이잖아요. 감독님은 우리 코리아 팀 감독님이잖아요. 감독도 없이 우리는 왜 고아처럼 결승에 나가야 합니까. 왜 우리가 또 단절되어야 합니까. 탁구 하나 같이 친다고 하나 되는 거 아니겠지만 그래도 우리는 같이 치고 싶습니다.”라고 호소한다.

현정화는 경기에 출전할 수 없을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자신의 개인적인 희생을 감수하고 단일팀의 재결성을 촉구한다. 현정화의 행동을 좇아서 남한의 남자선수들도 무릎을 꿇는다. 그러자 조남풍 감독은 북한 당국자에게 귀국한 뒤 모든 책임을 지겠다고 선언한 뒤 선수들을 데리고 단일팀에 합류한다. 현정화의 자기희생은 진정한 화합과 금메달 획득의 기반이 된다. 현정화와 리분희가 결승전에서 금메달 획득의 마지막 순간을 상대방에게 양보하려고 보인 행동도 같은 맥락이다. 자기희생과 양보, 화해와 포용의 정신이 남북한 선수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원동력이 된다.

<코리아>에서 현정화의 행적은 개인의 자기희생이 집단의 이익으로 확장된다는 점에서 바리공주의 행적과 비교할 수 있다. 현정화는 분단시대의 독재 권력에 의해 희생양이 되지만, 결말에서는 자기희생을 통해 공익성을 실현한 영웅이 된다. 바리공주와 현정화는 개인의 영리보다 공익을 위해 자기를 희생하고, 국가와 인류의 질병을 치유한다. 두 인물은 서로 다른 형태의 시대와의 폭력과 투쟁하고, 자기희생을 통해 영웅성을 획득한다. 물론 바리공주와 현정화의 행적 사이에 직접적인 연관성은 없다. 하지만 크리스토퍼 보글러와 조동일이 정리한 영웅 신화의 보편성, 반복성, 지속성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두 인물을 신화적 원형과 변주의 관계로 파악할 수 있다. 시대의 폭력에 맞서 자기희생을 통해 공익성을 실현했기 때문이다. <코리아>는 스포츠를 매개로 했다는 점에서 2023년 한국사회와 스포츠계가 다시 살펴볼 필요가 있는 작품이다.

 

*사진 출처: 네이버 영화

 

 

글·임정식
영화평론가. 영화를 신화의 관점에서 분석하는 작업에 관심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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