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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아름의 시네마 크리티크] 힘을 잃은 순수와 타락의 이분법 - 영화 <제비>의 고루한 세대론
[송아름의 시네마 크리티크] 힘을 잃은 순수와 타락의 이분법 - 영화 <제비>의 고루한 세대론
  • 송아름(영화평론가)
  • 승인 2023.06.19 10:0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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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를 힘겹게 지나온 이들은 자신들의 고통스러웠던 흔적을 1990년대의 후일담 소설에 적었다. 거기에는 갑작스레 변해버린 질서에 당혹스러워하며 과거에서 허우적대는 이들의 온갖 자학과 자책 그리고 경멸이 도사리고 있었다. 나를 향하는 것일 수도, 타인을 향한 것일 수도 있는 분노는 내가 알던 이의 변화에 경악하거나 아직도 미련스레 과거에 남아 있는 퇴행에 뜨악하며 서로를 할퀴어 댔다. 내가 지금 어디에 서 있어야 하는가 라는 질문과 싸우던 그들의 모습은 꽤나 지쳐 보였고 절망스러운 듯 했다. 오랫동안 ‘우리’의 이름으로 지켜온 가치의 붕괴를 대하는 그들의 허탈함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것이었고, 당연히 위로할 만한 것이었다. 만약 그쯤에서 그쳤다면.

 

그러나 후일담 소설, 아니 이를 오랫동안 이어간 (386이든, 586이든, 86세대이든 무엇으로 불리던 간에) 특정 세대의 서사에는 도사리는 순수와 진정성의 저울은 현재까지 변하지 않았다. 과거의 상처를 기억하려는 누군가와 그때의 상처를 기반으로 삼으려는 누군가의 대립을 세운 후 전자를 옹호하고 후자를 경멸하는 것은 이 세대가 스스로의 진정성을 증명하는 가장 흔한 방식이었다. 누군가가 우위를 점한 채 이 자가 좋다 저 자가 나쁘다를 구분하는 것이 특권이라는, 즉 자신의 서사를 긍정과 부정으로 분류하는 그 방식 자체가 특권이라는 생각은 이 세대의 편 가르기 안에 감히 존재할 수 없었다. 그렇기에 순수한 ‘나’가 이제는 물들어버린 ‘너’를 비난하는 것은 늘 진지하고 진정성 있고, 가슴 아프지만 정당한 비판으로 보이기에 충분했다. 밖에서 보는 ‘나’와 ‘너’가 그리 다르지 않을지라도 특권의식을 눈감은 그 세대만의 이분법은 30년 넘게 굳건히 자리를 지켰다. 이 편가르기를 자신들의 영역에서 그쳤다면 굳이 말을 보탤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건 그들 사이의 싸움일 테니까. 문제는 이러한 프레임이 다른 이들에게까지 강요된다는 데에서 발생한다.

 

 

영화 <제비>는 정확히 이 프레임 안에서 움직인다. 영화는 1983년 녹화사업 속에서 서로가 서로를 의심하거나 내 스스로 나의 정의와 용기를 시험해야 하는 상황과 맞닥뜨린 이들이 천천히 무너진 이후를 그린다. 제비(윤박)는 스스로가 하는 일이 옳은 것이라는 점을 굳게 믿었고 과거의 은숙(장희령) 역시 이를 의심하지 않았다. 스스로가 겁이 많은 것을 알고 그렇기에 자신을 의심했던 과거의 현수(유인수)는 그들이 세운 세계를 무너지는 데에 단초를 제공한다. 바로 이렇게 세워진 이분법적 구도는 현재에 이르렀을 때에도 단단하게 유지된다. 주목할 것은 이 구도를 유지하는 데에 이용되는 것이 바로 은숙(박미현)의 아들 호연(우지현)이라는 점이다. 호연은 거대한 건설사를 이끌고 있는 현재의 현수(이대연), 즉 자신의 아버지 밑에서 건조한 삶을 꾸리는 이로 80년대를 거쳐 간 이후 세대의 인물이다. 호연은 과거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자신의 어머니에게 큰 연민을 느끼지도, 그렇다고 자신에게 직업과 지위를 쥐어준 아버지에게 살가움을 보이지도 않는다. 아내인 은미(박소진)와는 이혼을 준비 중이며, 이 이혼조차 진행하기 힘들만큼 일에 치여 사는 중이다.

 

이러한 호연이 자신을 떠나려는 아내를 붙잡아야 한다고 결심하는 것, 그러니까 자신의 삶을 회복해야 한다고 느끼는 것은 갑작스레 사라져버린 어머니의 흔적을 쫓은 후이다. 은숙은 갑작스레 시신으로 발견된 제비를 끝내 놓지 못한 채 소설로 그려낸, 바로 그 책의 출판기념회 중 갑작스레 사라진다. 호연은 그런 어머니의 흔적을 밟아나가는데, 그가 어머니를 쫓는 것은 단지 그가 어디 있는가를 찾는 일에 그치지 않는다. 영화는 호연이 은숙을 찾아가면서 과거를 기억하며 ‘순수하고’, ‘진정성 있는’ 그 세대를 이해해 가는 것에 방점을 찍는다. 그러니까 어머니의 과거를 이해하고 나서야 호연은 자신의 삶이 제자리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을 깨닫는 인물인 것이다.

 

 

호연은 어머니의 행적을 묻기 위해 과거 어머니와 함께 학생운동을 했던 선후배들을 찾아다닌다. 누군가는 말 한마디로 건설사의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는 국회의원이 되어 있고 누군가는 거대한 기업을 운영하는 재력가가 되어 있다. 그들은 산 사람끼리 돕고 살아야 한다며 살아남은 자들의 수금할 자격을 운운하고, 거대한 기업체를 가졌으면서도 시대를 팔아서 정치해 먹는 놈들은 앵벌이라고 비난한다. 돈을 가지고 있는 이는 권력을 쥔 이를 비난하고, 권력을 가진 이들은 자신의 자격을 사수하려는 그들끼리의 싸움 속에서 호연은 제비를 기다리는 어머니를, 과거에 매여 산다며 거리를 두었던 은숙을 이해하기 시작한다. 영화의 이러한 구도는 결국 바로 그 세대가 그려놓은 양극단의 부류 중 한쪽을 완벽하게 옹호하는, 그리고 그 세대의 본질은 바로 이곳에 있다는 선언과 다르지 않다. 호연에게 이해를 강요하는 것, 이는 그 세대의 모습을 바로 이 구도로 봐달라는 요구와 다르지 않은 것이다.

 

영화 <제비>가 이러한 목적을 앞세운다는 것은 인물들이 매우 도식적이고 기능적으로 설정되어 있다는 데에서도 드러난다. 멀끔하게 차려입고 화려한 사무실이나 강당에 선 이들은 누가 보아도 탐욕이 가득한 이들로, 작은 출판사나 농촌에서 욕심을 버린 듯 호젓하게 지내는 이들은 은숙을 이해하고 제비를 기억하는 순수한 이들로 그려진다. 호연 역시 바로 이 구도 속 순수한 이들을 이해하기 위해, 즉 그들을 부각시키기 위한 다음 세대로 호명된 것이라는 점에서 지극히 기능적인 인물일 뿐이다. 호연은 과거에 사로 잡힌 어머니와의 깊은 유대관계로 감정적 전염을 가진 것도 아니며, 자신의 아버지가 다른 사람일 수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최근의 일로 그에게 큰 영향을 미치지도 않았다. 이처럼 인물의 성격을 결정할 수 있는 결함이 뚜렷하지 않음에도 호연은 친구와 부인에게 눈 좀 뜨고 살라고, 눈감고 허우적대는 것이 초라하다는 말을 듣거나 세상 혼자 사느냐며 질타를 듣는 이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호연의 성격은 결국 제비를 기다리는 은숙, 그때의 그 믿음과 변혁과 사랑이라는 순수해 마지않는 그 가치로 회복되기 위한 포석에 불과한 요소가 될 뿐이다.

 

 

후일담 소설의 30년 후, <제비>는 그리 비상한 듯 보이지 않는다. 그 세대가 순수와 타락으로 구분될 수 있다는 당사자들의 평가는 그들을 바라보는 다른 세대에게선 그리 유효하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그 구도를 고수하고 있다면 그것은 그 세대의 특권의식을 고수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게다가 포스트 세대에게까지 이를 강요한다면 그것은 오히려 어떤 불안을 내재한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물론 그 세대의 표현과 진술들은 어떠한 실체를 그리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지속적으로 현재의 무엇에 대한 정당화를 위한 것이라면 그들이 세운 이분법은 과연 유효한 것일까. 결국 양 극단이 똑같아 보이는 아이러니가 현재의 상황이라면 이를 어떻게 타개할 것인가. 이제 그 세대의 이야기는 이 질문에 답해야 한다.

 

 

글·송아름
영화평론가, 영화사연구자. 한국 현대문학의 극을 전공하며, 연극·영화·TV드라마에 대한 논문과 관련 글을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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