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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아름의 시네마 크리티크] 쌀쌀맞은 사회 속, ‘나’를 증명해야 하는 이들을 위한 연가 – 다큐 <두 사람을 위한 식탁>
[송아름의 시네마 크리티크] 쌀쌀맞은 사회 속, ‘나’를 증명해야 하는 이들을 위한 연가 – 다큐 <두 사람을 위한 식탁>
  • 송아름(영화평론가)
  • 승인 2023.08.21 14:1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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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존재 가치를 인정받는 것, 그리고 스스로를 인정하는 일은 생각보다 쉽지 않다. 사람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났다고 아무리 치켜올려도, 네 존재는 그 자체만으로 소중하다고 아무리 읊어대도 이를 받아들이는 것은 녹록지 않은 일이다. 적어도 나 스스로 납득할 만한 적당한 것들, (그게 무엇이든) 그것을 어느 정도 성취했다고 느낄 때 내가 지금을 살며 무엇인가를 누려도 될 것이라 생각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나의 존재가 너무나 작다고 느낄 때, 아니 사회 전체가 나를 찍어 누를 때 무엇인가를 경유해야만 정당성을 인정받을 수 있다고 믿게 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다. 특히나 무엇인가를 못하는 것보다 잘 하는 것이 흠이 될 수 있고, 태어난 그 순간부터 눈총을 받을 수도 있는 여성으로 이 사회를 살아갈 때 나를 증명하는 것은 절박한 일이다. 생존을 위한 싸움, 그것이 어떤 방법이 될지는 알 수 없다. 생존을 위해서는 무엇이든 할 수 있을테니까.

다큐 <두 사람을 위한 식탁>에 관한 정보를 살피다 보면 가장 눈에 띄는 단어는 거식증이라는 병명일 것이다. 거식증이 걸린 딸과 엄마와의 대화, 이렇게 간단히 정리할 수 있는 이 작품에 대한 설명은 우리가 생각보다 많은 것을 알고 이 작품에 접근했다고 착각하게 만들지 모른다. 거식증과 관련한 다양한 짐작들, 그러니까 신체와 음식에 대한 강박이나 거부, 미적 기준의 왜곡, 히스테릭컬한 반응들, 이에 대한 부모의 죄책감 등으로 인해 마치 살얼음판 위에 선 것 같은 모녀를 상상하기 쉽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걷어냈다면 영화는 무엇에 대해 말할 수 있을까. <두 사람을 위한 식탁>은 거식증에 관련한 예의 그 익숙한 장면들을 모조리 걷어낸 채 이를 둘러싼 관계를 살피기 시작한다. 그 중심에 가까워지면 질수록 남는 것은 여성들의 자기증명, 즉 이 사회에서의 살아남기 위한 처절함이 천천히 머리를 든다.

 

딸 박채영 씨는 식당에서의 고된 하루를 잘 마치고 상담을 시작했다. 분명 주어진 일을 아주 훌륭하게 실행했고 좋은 결과를 얻은 후였다. 그럼에도 스스로에게 ‘잘했다’고 이야기하는 것을 어색해했고 불안해했다. 급기야는 눈물이 날 것 같다며 쉽게 입을 떼지 못했다. 자신을 위한 찬사, 그것에 대해 채영 씨는 큰 의심을 안고 있었다. 이러한 채영 씨의 모습을 안타깝게 바라보며 누군가는 가장 먼저 그의 엄마를 떠올렸을지 모른다. 딸이 이렇게까지 스스로를 인정하지 못하는 데에는 엄마의 역할이 제대로 자리잡지 못했을 것이라는 판단이 익숙할테니까. 특히 모녀와의 관계에 대한 다양하고도 폭넓은 오해는 모녀를 끈끈하기 그지없는 관계로상정하며 서로에 대한 영향력을 쉽게 단정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과연 그렇게 이야기할 수 있을까. 엄마 박상옥 씨가 이야기가 시작되었을 때 이 작품은 모녀 관계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이야기들을 짐작케 한다.

1980년대 학생운동과 이후 사회운동에 투신했던 상옥 씨는 이 모든 것이 붕괴되었던 1990년대에 길을 잃는다. 그리고 상처받은 아이들이 기거하던 대안학교, 바로 그곳에서 다시금 자신이 살아있다고 느끼기 시작한다. 상옥 씨는 전투적으로 일했고 아이들을 돌보았다. 자신을 바라보며 이야기를 하고 또 조금씩 변해가는 모습은 상옥 씨에게 큰 희망을 준 것들이었다. 이렇게 상옥 씨가 대안학교의 학생들을 돌보는 동안 딸 채영 씨는 상옥 씨 생각 밖에 있었다. 상옥 씨는 딸이 얼마나 예쁘게 크고 있는지 돌아볼 겨를이 없었고 그저 딸에게 위험한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랐다. 상옥 씨는 딸을 자신이 고려하는 범위 주변에 두었다는 것을 나중에야 알아차릴 만큼 중요한 일에 골몰하는 중이었다. 그렇게 조금씩 딸과 거리가 생길 무렵 채영 씨의 거식증이 시작됐다. 이쯤에서 뻗어나가는 생각의 화살이 어디로 향할 지는 충분히 짐작 가능하다. 그러나 이 작품은 병의 원인을 누군가의 탓으로 돌리지 않았고 다른 질문으로 선회하려는 듯했다. 왜. 상옥 씨도 채영 씨도 왜 그래야 했는가? 누구 때문이 아닌 왜라는 질문은 모녀 관계를 넘어선 이야기로 진입한다. 거식증을 병이라 생각하지 않았다던 채영 씨의 말, 바로 여기에서 이 영화가 가리키는 방향이 명확하게 드러난다.

 

채영 씨가 먹고 싶은 시간에 먹고 싶은 것을 먹고 싶은 만큼 먹겠다고 결심한 것, 그것은 채영 씨가 스스로를 내 것으로 생각하는 방법이었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원하는 방식으로 제어하여 내가 나임을 느끼겠다는 것, 밖에선 이를 거식‘증’이라 불렀지만 채영 씨에게 그것은 그저 스스로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이었다. 이를 병이라 생각하지 않았기에 자신을 정신병원에 데려온 것에 분노했고, 엄마가 슬퍼할 것이라 생각하지 못했다. 이는 채영씨의 병증이 엄마를 향한 분노 등으로 쉽게 설명할 수 없다는 점을 충분히 설명한다. 아직 어린 나이에 자신을 존재를 증명하는 방식으로서 음식을 통제하려 했던 것은 그때의 그가 찾은 최선의 방법이 아니었을까.

이쯤에서 상옥 씨의 삶이 다시금 떠오른다. 상옥 씨는 왜 무주의 대안학교로 와 자신의 손길을 필요로 하는 이들을 만나면서 살아있다고 느꼈을까. 천천히 회상하듯 이야기하던 상옥 씨의 과거는 그가 어떻게 자신을 증명하고 있었는지를 명확하게 보여주었다. 스스로가 믿었던 굳건한 믿음들, 그것을 실천할 수 있는 가치 있는 행동들, 이는 상옥 씨를 지탱하던 힘이었고 그것이 곧 그를 증명할 수 있는 방식이었다. 이 사회에서 내가 살아있다고 이야기할 수 있는 방법, 나의 가치를 오롯이 드러낼 수 있는 방법으로 학생·사회운동에 투신했던 상옥 씨가 자신의 삶을 다시 찾은 것은 바로 이 가치를 다시금 내보일 수 있는 대안학교에서 였을 것이다. 이를 실천하기 위해서, 그러니까 이사회에 필요한 존재로서 나를 내보이기 위해서 중요했던 것은 그곳에 존재하고 그곳에 헌신하는 것뿐이었다.

이렇게 스스로를 증명하려는 방식이 서로 다른 방향을 가리킬 때, 두 사람 모두 고통을 겪겠지만 분명 누가 누구를 괴롭혔기 때문은 아니었다. 그저 나를 보여주기 위해 이렇게나 노력해야 하는 이 상황이 버겁다는 쪽이 더 맞았을지 모른다. 자신이 분명히 잘한 일이 있었음에도 쉽게 스스로를 칭찬하지 못했던 채영 씨의 첫 상담 장면이 다시 떠오르는 것은 이 때문이다. 내가 인정받을 수 있는 사람인가라는 질문 그 자체는 두 사람 모두가 이 사회를 살아가며 받아야 할 질문이었다. 그들이 존재하는 것만으로 가치있다고 느낄 수 있는 어떤 것도 두 여성에게 주어진 적 없는 것이었다. 나를 보여주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는 것, 그것이 방법이 맞지 않을 때의 충돌에 대해 이 작품은 채영 씨와 상옥 씨를 경유했지만 이는 이미 무수히 많은 여성들의 이야기였던 것이다.

 

이 작품이 두 사람의 이야기를 넘어서 채영 씨의 외할머니, 즉 상옥 씨의 어머니 이야기로까지 뻗어간 것은 바로 이를 보여주기 위한 의도였을 것이다. 상옥 씨는 어머니를 좋아하지 않았다. 아니 싫어했다는 쪽이 맞았다. 딸을 많이 낳아 구박받던 엄마, 분명 열심히 살았지만 어디에서도 인정받지 못했던 엄마는 거의 40년간 음식을 토하면서 스스로를 괴롭혔다. 몸을 상하게 할 만큼 고통스럽게 음식을 게워냈던 엄마를 기억하며 상옥 씨는 아마도 그것이 당신께서 당신을 제어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아들을 낳는 것으로 엄마이자 며느리이자 여성의 가치를 부여받았던 그 옛날, 이를 실행하지 못했던 엄마는 어디에서도 인정받지 못했을 것이다. 이 사이 등장했던 병증은 그래서 개인의 문제가 아닌 것이었고 미웠던 엄마였지만 상옥 씨는 자신의 삶을 지나며 그것이 어떠한 의미였는지를 이해할 수 있던 것일지 모른다.

이처럼 <두 사람을 위한 식탁>은 3대에 걸쳐 내려오는 여성들의 자기 증명 방식에 대해 이야기한다. 비록 이 사이를 오가는 감정의 물결은 쉽사리 드러나지 않을지라도 언젠가 분명히 깨달을 수 있도록 깊이 흐르고 있었다. 마치 할머니가 끝을 깨끗하게 손질하여 쪄 준 고구마처럼 그저 잘 보이지는 않을지라도 귀찮음을 마다하지 않고 위했던 그 마음처럼 말이다. 나중에서야 알아챌 수 있던 그 마음으로 서로가 묶여 있고 함께 할 수 있다고 느끼는 것만으로도 충분하기에 서로는 함께 하면서도 또 각자 존재할 수 있다. 상옥 씨도 채영 씨도 이를 알기에 날을 세우면서도 이해에 가까이 가 닿으면서도 각자의 삶을 응원하고 있었다. 담담한 톤을 유지했던 이 작품은 엔딩 크레디트에 흘러나오던 노래 한 곡으로 꾹꾹 눌러 담았던 감정을 폭발시킨다. 첫 소절의 가사는 과연 어디를 향하고 있는 것일까. 그 다음은 누구를 향하는 것일까. 이것이 과연 개인을 향하는 호소라고 할 수 있을까.

 
 

<두 사람을 위한 식탁>(2022)

사진 출처: nemaf (서울국제대안영상예술페스티벌) 2023 홈페이지

 

 

글·송아름

영화평론가, 영화사연구자. 한국 현대문학의 극을 전공하며, 연극·영화·TV드라마에 대한 논문과 관련 글을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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