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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르코지가 누구였지?
사르코지가 누구였지?
  • 알랭 가리구
  • 승인 2012.05.14 17: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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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17년 만의 정권 교체

<그는 짐을 들고서 어디로 떠나나>, 2010-카름 알바이제

재선에 실패한 사르코지는 누구인가. 그는 2007년 대선에서 승리한 뒤 레스토랑 '푸케'에서 축하하거나, 레종 도뇌르 훈장을 인심 좋게 나누어주는 기회를 통해 자신을 지지한 파당을 뚜렷하게 가시화했다. 하지만 민주주의 역사에서 전례가 없을 정도로 정치와 사업을 뒤섞은 이같은 통치 방식은 한계에 다다른 것 같다.

자신은 바뀌었다고 선언하면서 이전에 할 수 없었던 일을 다시 하기 위해 재선 도전에 나선(1) 니콜라 사르코지는 지키지 못하고, 포기하고, 부인해버린 공약들의 목록 작성을 뒤로 미루고 있다. 하지만 실업, 공공 부채, 구매력 저하, 사회 불안, '흠집 없는' 국가, 공적 자유 등 그 목록은 꼭 침몰하는 배와 같다. 대통령 선거의 결과가 어떻든지 간에, 지금 당장 그의 정치적 실패, 즉 적절한 행정적 수단 없이 아무데나 끼어들기를 좋아하던 대통령이 이끈 정부의 캐리커처에 대해 평가할 필요가 있다. '입법 허기증'에 빠진 그는 적용하지도 못한 법제정의 인플레이션을 초래했다. 또한 그는 총리를 '협조자' 신분으로 강등하고, 국회를 기록실로 변하게 하고, 정치를 엉망으로 만들어버렸다. 극도의 권력 집중 결과로 의혹도 겸손도 용이하지 않았다. 우두머리를 무대화하기 위해 인물에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켰고, 언론에 기삿거리들을 제공하고, 참다운 정치 행동을 잊게 만드는 유치한 심리학이 동원되기도 했다. 사르코지는 별명이 얼마나 많은가? 그의 생김새에 대한 수다는 또 얼마나 많은가? 이 모든 것은 찬사 아니면 혐오로 둘러싸여 있다. 이것은 빅토르 위고가 1851년 12월 2일 쿠데타의 주인공인 루이 보나파르트를 악착스럽게 공격함으로써 역설적으로 그를 더 중요한 인물로 만들고 만 것과 같다. 반면 마르크스는 더 명철하게 "보잘것없고 괴상망측한 인물에게 영웅 역할을 하게 해준 정황과 상황들"을 따져보라고 제안한다.(2)

요행수로는 국가원수가 될 수 없다. 실제로 정치 '전문가'에게는 누구나 갖춘 것이 아닌 특별한 능력을 요구한다. 야망 있는 젊은이가 권력의 정점에 오를 수 있는 정치 전문가가 되려면 부정할 수 없는 자질과 아주 드문 재능이 필요하다. 엘리트 양성 학교를 거친 전임 대통령들과는 달리 사르코지는 낭테르대학의 법과대학에서 중간 정도의 성적을 받았다.(3) 그가 종종 대학(혹은 문화 전반)에 반감을 보이거나 공부보다는 당 활동을 더 선호하는 취향을 드러내지 않았더라면, 이 모든 것은 그다지 특별한 관심의 대상이 되지 못했을 것이다.

사르코지는 일찍이 '선거운동 조직자'로 활동했다. 그리고 오랜 시간 자신의 자질을 갈고닦아 정치적 상승을 한 결과, 2007년 선거에서 승리를 거두게 되었다. 그는 '정치 지도자' 이외에 다른 직업을 가져본 적이 거의 없다. 공화국연합(RPR) 청년 대표를 지냈고, 23살에 뇌이 시의원이 되었고, 28살에는 배짱을 부려 자신의 정치 후견인이던 샤를 파스쿠아를 제치고 뇌이 시장이 되었다.

당원 서열에서 빠르게 부상할 정도로 뛰어난 재주를 가진 사르코지는 자크 시라크의 대통령선거대책본부장을 맡았다. 그러나 시라크와 경쟁한 에두아르 발라뒤르를 지지하면서 시라크 계파를 떠나 1993년에는 발라뒤르 내각의 장관이 되었다. 이 '배신'으로 역경의 시기를 보내는 처지가 되었으나, 그것도 1997년 국회 해산으로 끝나게 된다. 그 후 사르코지는 계단을 하나하나 밟아 올라갔다. 물론 그 과정에서 격렬한 정치적 충돌(그것이 그의 의지와 냉소를 단련시켰다)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한 명의 선량(選良)'이라는 생각을 늘 했다. 부자들과 대기업 총수들이 밀집해 있는 뇌이는 그에게 정권 쟁취를 위한 확고한 발판을 마련해주었다. 지역 주민이자 국제 무대에서 활동하는 재계 부르주아지들은 그 지역 출신 정치인에게 엄청난 기회를 제공해주었다. 도움이 되는 인사들과 즉시 말을 트고 친하게 지내는 능력을 겸비하고, 지역 주민이 쉽게 다가갈 수 있으며, 게다가 효율적 관리로 평판을 얻은 그 지역 출신 정치인에게 말이다. 자신의 본거지에서 사르코지는 출세나 상속에 의해 자신감을 얻었음에도 흔히 정치권에 쉽게 다가갈 수 없는 (혹은 별로 야망이 없는) 대기업 사장들(마르탱 부이그, 아르노 라가르데르, 앙투안 베른하임, 앙드레 베탱쿠르와 릴리안 베탱쿠르 여사) 주위에 집결된 일족을 매혹시켰다. 식당 '푸케' 일화- 2007년 대통령 선거 2차 투표일 저녁, 프랑스 전국의 대기업 총수들을 당선자 사르코지 주위에 집결시킨 축하연- 는 동맹군의 승리를 대명천지에 보여주었다.(4) 하지만 억제할 수 없는 승리의 도취는 보통 감춰진 것을 드러내는 법이다. 뭔가 바뀐 것이다.

4반세기 전부터 프랑스 사업가들은 자신의 가치에 맞는 보수를 요구해왔다. 자유주의적 세계화의 주역이자 수혜자인 이들은 자신이 프로 축구선수나 대중가수보다 훨씬 더 가치 있다고 주장한다. '신중함'이라는 오랜 규칙을 거스르며 프랑스 부르주아지의 새로운 부를 과시하는 표시를 내걸고 있다. 상속자이든 자수성가한 자이든지 간에 모든 구성원은 신자유주의 은행가들과 경제학자들의 입에서 회자되는 '가치 창조'의 메커니즘 덕택에 부유해졌고, 그만큼 새로운 자산으로 반사이익을 보고 있다. 고등상업학교(HEC)를 필두로 '비즈니스 스쿨'들이 새로운 명문이 되었고, 그러는 동안 파리국립정치학교(Sciences Po) 같은 옛 명문 학교들은 '비즈니스 스쿨'로 변형되었다.

제도적·사회적 자산을 잘 구비한 국가원수가 좌초할 때, 그것은 개인적 실패일 뿐만 아니라 그가 속한 진영의 실패이다. 그를 지지하는 정당과 엘리트 진영의 실패 말이다. 정치권력과 경제권력 사이에 정립된 이같은 은밀한 관계를 보려면 필시 7월 군주제(1830~48년)로 거슬러 올라가야 할 것이다. 이런 삼투압 현상은 알렉시스 드 토크빌이 당시 대(大)부르주아지에게 던진 다음과 같은 촌철살인의 문장에 영감을 주었다. "통치자의 신분이 되고, 개인 사업가의 모습을 지닌 대부르주아지는 자신들의 권력 속에 틀어박히게 되었다. 또한 곧바로 이기주의 속에 틀어박히게 되었다. 구성원 각각은 공적인 일보다는 사적인 일을, 나라의 위엄과 희망보다는 개인적 향락을 더 중요시한 것이다."(5)

그로부터 150년 후 공공부문의 분해와 1980~90년 채택된 급여 체계(스톡옵션, 보너스, 연금보장 명예퇴직 등)을 통해 새로운 재계 부르주아지가 탄생했다. 시라크 내각에 의해 시작된 민영화 정책(1986~88)과 더불어 이례적 궤도가 그려졌다. 젊은 고위 관리들이 장래 민영화된 기업들의 수장 자리로 진입할 토대를 마련한 것이다. 미셸 페브로(BNP 파리바 은행), 필리프 자프레(엘프 정유사), 장 마리 메시에(수도국, 곧이어 비벤디) 등은 에두아르 발라뒤르의 경제부 장관 비서실 일원이었다. 이런 움직임은 1988~93년 몇몇 국가의 고위 관료들을 민간부문으로 이직시킨 당시 여당인 사회당에 의해 이어졌고, 또한 1993~95년 발라뒤르가 이끌던 내각과 더불어 연장되었다. 새로운 젊은 지도층의 파고가 권력장 안으로 들이닥친 것이다.(6)

물이 빠지자 드러난 '후진형 자리 이동' 현상- 공공부문에서 민간부문으로, 이어서 민간부문에서 공공부문으로 이동- 의 몇몇 유명한 예가 있다. 스테판 리샤르(재정 감사관에서 산업 및 외교 통상부 장관 도미니크 스트로스칸의 비서실로, 수도국 파견 책임자로, 부동산 회사 페닉스의 사무장으로, 그 후에 넥시티사의 공동 소유자가 되고, 경제부 장관 장루이 보를로의 비서실장으로, 이어서 크리스틴 라가르드의 비서실장으로, 그리고 프랑스 텔레콤의 사장이 된다)와 장 도미니크 코몰리(국립행정학교 출신으로서 미셸 샤라스의 비서실장, 국립담배회사(SEITA)의 민영화를 관리한 후, 2010년부터 민간기업 투자 관리 부처인 국가투자참여사무국(APE)의 수장이 된다)의 경우가 그것이다. 이와 동일한 의미를 갖는 사례는 고등상업학교 출신 간부들의 진급이다. 보두앵 프로(BNP파리바 은행), 앙리 드 카스트리(악사보험), 프랑수아 페롤(나키식스-케스 데파르뉴 은행) 등은 고등상업학교 졸업 후에 국립행정학교(ENA)를 다녀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 다시 입학을 했다. 앙리 프로글리로는 프랑스전기공사(EDF)의 사장이 되기 전에 비벤티워터, 그리고 베올리아워터의 수장이 될 필요조차 없었다.

사르코지는 뇌이 시장 시절, 시운영위원회(그리고 이 위원회 멤버들의 겸임성 참여)와 동호회 외에 사교성 짙은 개인적 행사를 통해 재계와 관계를 유지했다. 그뿐만 아니라 결혼식과 출생 때 가족 연회의 모습을 본떠 그 관계를 강화했다. 프랑스의 다른 모든 시장이 부유하지 못한 많은 이들의 결혼식을 주관하는 것처럼 시장 사르코지가 '친구들'의 결혼식을 주관하지 못하는 경우, 그들을 자신의 결혼식 증인(부이그와 아르노)이나 자녀들의 대부(아들 루이의 대부 부이그)로 삼았다. 사르코지는 이해관계와 선택적 친화력에 의해 구성된 준(準)가족 구성원들에게 말을 놓거나 그들을 '형제'(예컨대 라가르데르)라고 부르기도 했다. 레종 도뇌르 훈장에 대해 말하면, 사르코지는 누구보다 많은 훈장 띠를 그의 친구들이 모인 의식에서 재계인들에게 수여했다.

그 결과 사르코지의 총체적 실패는 재계 부르주아지의 실패라고 할 수 있다. 2008년 가을의 위기(하지만 이것이 임기가 끝나가는 현 대통령에게 핑곗거리로 사용되고 있다)가 그것을 잘 보여준다. 사람들은 "통치하는 것은 예측하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하지만 2007년 대통령 선거 후보 사르코지는 서브 프라임 사태를 예측할 수 없었다(더욱이 이해할 수도 없었다)라는 반박이 가능할 수도 있다. 그런데 프랑스에서 이와 유사한 장치를 선택할 것이라고 제안한 장본인은 바로 그가 아니었던가?

정치와 재계를 통틀어 지도층이 모든 점에서 이처럼 중대한 실수를 저지르는 것은 드문 현상이다. 이 실수의 목록은 우선 실명 때문인지 이해관계 때문인지 위기에 대해 눈을 감아버린 비공식 경제학자들의 상궤를 벗어난 판정, 즉흥적인 정치적 돌변(재정위기, 세금정책, 리비아와 시리아에 대한 외교 관계)(7) 또는 경제 지도자들의 요구에서 착상한 정책 방향 등이 포함된 어마어마한 목록으로 나타난다. 이 목록에 대한 반박은 터무니없는 정보와 얽히기도 한다. 가령 프로글리오가 원자력 통합 관리를 보장하겠다고 주장하면서 일본 후쿠시마 원전 사태가 발생하기 얼마 전 '저비용을 위해 더 안전하지만 더 비싼 핵발전소 전략을 포기하자'고 한 제안이 그 좋은 예이다.(8)

도대체 능력을 공인받은 엘리트들이(9) 어떻게 그렇게 하나같이 실수할 수 있을까? 신공공관리론(New Public Management)(10)의 서론, 혹은 공공부문에 대한 민간부문의 우월성이라는 선입견 속에서 흔히 만병통치약처럼 언급되는 기업 관리의 비결은 한마디로 공공정치에 맞지 않는다.

이같은 교훈을 끌어내기 위해 '파산'이라는 구체적 증거에 부딪히게 되면 그걸로 충분할까? 하물며 결산해야 하고, 또 경우에 따라서는 새로운 방향의 제시가 주요 과제인 선거 때마다 이 질문이 다시 제기되고 있다. 그렇다면 누가 그것을 할 수 있을까? 은행가들이 과오를 뉘우친다는 말은 많이 듣지 못했다. 사퇴하는 자도 많이 보지 못했다. 파렴치한 연봉을 받은 것을 후회하는 것도 보지 못했다. 절대 과오를 저지르는 일이 없다는 원칙이 세워져 있는 듯하다. 이 원칙이 자유시장의 전도자들에게 득이 되는 것은 사실이다. 마치 자신들의 예언이 재정적으로 득이 되는 한 '지복천년설' 종파의 전도자들이 그것을 포기하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정치에서도 실수를 부정하는 태도는 예측 불허의 위기, 낮게 평가한 국제적 제약 속에서 혹은 경색된 정치 반대파에게서 늘 합당한 핑곗거리를 찾게 된다. 다른 길을 제시하려면 의지가 필요하다. 하지만 정권 교체를 통해 똑같은 친화성은 아니라 해도 사고방식을 물려받는 경우 그것만으로 충분치 않다. 잘 보이지 않지만 강력한 사고방식을 포기하는 것만큼이나, 보이지만 아주 인간적인 친화성을 포기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정치 지도자들에 대한 사회지학(社會誌學)을 통해 권력을 잡기 위한 실질적 경쟁 저 너머에서 불일치를 종종 배제하는 대규모의 사회적·지적 동질성이 있다는 인상을 받게 된다.

그렇다면 고등상업학교와 국립행정학교를 졸업한 프랑수아 올랑드는 과연 어떤 사회적 토대에 의지할 수 있는가? 그는 정치의 길을 택한 것이지 사기업의 길을 택한 것은 아니다. 그렇다 해도 부문 간 이동의 논리는 한계에 다다르게 된다. 특히 민영화가 이미 폭 넓게 실현돼 있어 그가 마련해줄 자리가 드물어질 때, 그리고 새로운 세대들이 스스로 선배들과 맞서 역류한다고 선언할 때 그렇다. 이해관계의 충돌을 좀더 확실하게 근절하려면 '비즈니스 스쿨' 출신자가 국립행정학교에 진학하는 겸임 또는 겸직 허용을 금지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수십 년간의 자유주의 시대 이후, 공공서비스를 복구하는 데 관심을 갖는 여러 사회적 힘- 가난해지고 격분한 사회계층들을 위시해 고위직을 포함해 경시되고 무시당한 공무원들- 이 존재한다. 사태의 흐름을 바꿀 만큼 충분히 강하고, 확고하고, 명석한 새로운 연맹을 위한 자리가 있을까? 이는 어쩌면 선거와 관련된 문제이리라. 무엇보다 선거 후 문제이기도 하다.

글•알랭 가리구 Alain Garigou 낭테르대학 정치학과 교수. 주요 저서로 <격리소의 비밀>(르 보르 드 로 출판사·보르도·2012) 등이 있다.

번역•변광배 프랑스인문학연구모임 '시지프' 대표. 주요 저서로 <존재와 무: 자유를 향한 실존적 탐색> 등이 있다.


(1) 2012년 3월 27일자 <파리 마치>에 붙은 제목은 ‘나는 다른 대통령이 될 것이다’이다.
(2) 카를 마르크스,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 정치 전집, 제1권, 플레이아드 총서, 갈리마르 출판사, p.434, 파리, 1994. 
(3) 사르코지는 정치학 D.E.A 학위자이고 법학 수학증명서(CCA)를 획득했다. 그의 이력서에 표시된 대로 파리 정치학연구소(IEP)에 등록은 했지만 학위는 획득하지 못했다.
(4) Monique & Michel  Pincon, <부자들의 대통령>, 라 데쿠베르트 출판사, 파리, 2010.
(5) 알렉시스 드 토크빌, <회상록>, <전집>, 라퐁 출판사, 파리, p.730, 1986.
(6) 로랑 보넬리, 윌리 펠르티에(감수), <파괴된 국가>(라 데쿠베르트 출판사, 파리, 2010)에 실린 ‘국가 정예의 양성과 신 탐욕 계급의 미래’.
(7) 프레데리크 로르동, ‘부적격자들’,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10년 11월호 참조.
(8) 원자력 정책 위원회 보고서, 2010년 7월 27일. 
(9) “아주 훌륭한 기업가를 프랑스전력공사의 수장으로 임명했다”, <르피가로>, 파리, 2010년 3월 12일.
(10) 제롬 투르나드르-플랑크, ‘영국인들의 실수…’,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09년 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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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랭 가리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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