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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욱의 시네마 크리티크] <스즈메의 문단속>, 스즈메는 왜 후쿠시마 오염수 투기의 문은 단속하지 않는 것일까?
[김경욱의 시네마 크리티크] <스즈메의 문단속>, 스즈메는 왜 후쿠시마 오염수 투기의 문은 단속하지 않는 것일까?
  • 김경욱(영화평론가)
  • 승인 2023.09.18 0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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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카이 마코토의 아니메 3편, <너의 이름은.>, <날씨의 아이>, <스즈메의 문단속>은 흔히 ‘재난 삼부작’으로 불린다. <너의 이름은.>은 혜성 충돌, <날씨의 아이>는 멈추지 않는 비, <스즈메의 문단속>은 지진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재난을 다루면서 던지는 주제는 각각 다르다. <너의 이름은.>은 타키가 시간을 되돌려 죽을 운명이었던 미츠하와 마을 사람들을 죽지 않게 만든다. 재난을 막지는 못했지만, 사람들의 희생은 막아낸다.

 

<날씨의 아이>에서, 히나는 맑은 날씨를 만들어낼 능력이 있다. 히나가 ‘인간 제물’로 바쳐지자, 끊임없이 줄기차게 내리던 비가 그치고 한여름의 정상적인 맑은 날씨가 된다. 그러나 히나를 사랑하는 호다카는 하늘까지 올라가 그녀를 지상으로 데려온다. 이때, 호다카가 외치는 말은 이 아니메의 주제다. “맑은 날을 두 번 다시 보지 못해도 상관없어! 나는 푸른 하늘보다 히나가 좋아! 날씨 따위, 계속 미쳐 있어도 돼!” 그런 다음, 비가 계속 내리는 재난의 상황을 긍정하자고 제안한다. 따라서 설사 세상이 끝장난다 해도, 세상을 위해 개인을 희생할 수는 없다는 주장이다. 재난에서 사람들을 구해내려고 악전고투하던 타키와 미츠하와는 다른 태도라고 할 수 있다.

주제의 측면에서 보면, <스즈메의 문단속>은 <날씨의 아이>가 아니라 <너의 이름은.>에 가깝다. 스즈메는 4살 때, 2011년 3월 11일에 일어난 토호쿠 지진으로 인한 쓰나미로 엄마를 잃은 17살 소녀다. 소타는 ‘토지시(閉師:문을 닫는 사람)’로서, ‘재앙을 불러일으키는 문’을 닫는 일을 숙명으로 삼아온 무나카타 가문의 유일한 후사이다. 일본 전역을 돌아다니며 문제의 문을 찾아 걸어 잠금으로써 지진을 막아내던 소타가 우연히 스즈메와 마주치면서 사건이 시작된다. 소타가 다이진의 저주에 의해 의자에 갇혀버리자, 스즈메가 소타 대신 문단속을 하러 동분서주한다. 규슈, 시코쿠, 고베, 도쿄 등지에서, 스즈메는 필사적으로 재난을 막아낸다.

 

스즈메와 소타는 길에서 우연히 마주친다
스즈메와 소타는 길에서 우연히 마주친다

<너의 이름은.>과 <날씨의 아이>에서 우회적으로 토호쿠 지진을 표현했다면, <스즈메의 문단속>에서는 이렇게 돌이킬 수 없는 후쿠시마 원전 사고의 비극을 초래한 그 사건을 직접 다루고 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이 아니메의 도입부에서, 4살의 어린 스즈메는 쓰나미로 폐허가 된 공간에서 엄마를 찾아 헤매며 울부짖는다. 이때 어떤 여자가 다가온다. 어린 스즈메가 그 여자와 마주하는 순간, 소녀 스즈메가 잠에서 깨어난다. 스즈메의 곁에는 노란 나비(흔히 죽은 사람의 영혼을 상징한다)가 날고 있고, 스즈메가 ‘엄마?’라고 중얼거리기 때문에 꿈속의 그 여자는 엄마로 추정된다. 여기서 신카이 마코토의 작품을 관통하는 키워드인 ‘상실’이 다시 주요 소재로 등장한다.

 

스즈메는 재앙을 불러일으키는 문과 마주하게 된다
스즈메는 재앙을 불러일으키는 문과 마주하게 된다

스즈메의 꿈 장면은 결말 부분에서 다시 반복된다. 그런데 이번에는 꿈이 아니다. 스즈메가 자신의 고향, 그러니까 엄마를 잃은 토호쿠 지진의 그 장소에서 문단속을 하다 어린 스즈메를 발견하게 된다. 엄마가 죽었을 리 없다고 굳게 믿으며 애달프게 엄마를 찾아다니는 어린 스즈메 앞에 나타난 여자는 엄마가 아니라 17살이 된 스즈메인 것이다. 스즈메가 고향에서 목숨을 건 문단속을 통해 마침내 그토록 그리워하던 엄마를 만나는 장면이 등장할 것 같았는데, 뜻밖에도 어린 스즈메가 소녀 스즈메를 만나는 설정이다. 스즈메는 엄마를 찾는 어린 스즈메에게 엄마가 만들어준 나무 의자를 보여주며, “지금은 너무 슬퍼도 스즈메는 앞으로 아주 잘 자랄 거야. 빛 속에서 어른이 될 거야”라고 위로한다. 이 말을 들은 어린 스즈메는 엄마가 죽은 현실을 받아들이고, 문을 통해 자신의 세계로 떠나간다.

심리학의 관점에서 보면, 이 장면은 스즈메가 자신의 상처받은 ‘내면 아이’와 조우한 순간이라고 할 수 있다. 스즈메는 2011년 3월 11일, 엄마를 잃은 이후 온통 검게 칠해진 자신의 어린 시절 일기장을 통해 내면 아이와 직면하게 된다. 이제 스즈메는 내면 아이의 트라우마를 어루만지고 위로하고 떠나보내는 과정을 통해 어른으로 성장하게 될 것이다.

클라이맥스 부분에서, 스즈메가 문단속을 하는 사이, 소타는 요석이 되어 굳어간다. 스즈메가 “혼자는 너무 무서우니 같이 살자”며 필사적으로 구해내려고 할 때, 그 간절한 사랑의 마음이 소타에게 전해진다. 그는 ‘살고 싶다’는 강렬한 의지를 갖게 되고 사람으로 돌아오게 된다. 그런 다음, 그는 “1년이라도, 아니 단 하루라도 살고 싶다”고 간절히 기도한다. 그러므로 <스즈메의 문단속>의 주제는 토호쿠 지진 같은 재난으로 희생된 자들에 대한 애도가 아니라 거기서 살아남은 자들에 대한 위로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의 죄책감과 아픔을 달래면서, “살아가자, 이제 앞으로 나아가자”는 메시지를 전하는 것이다. “지금은 캄캄하기만 한 밤일지 몰라도 언젠가는 꼭 아침이 온다”는 스즈메의 말은 아마도 후쿠시마 원전 사고의 비극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일본인들에게 큰 위안이 되었을 것이다.

 

스즈메는 엄마가 만들어준 의자를 보여주며 어린 스즈메를 위로한다
스즈메는 엄마가 만들어준 의자를 보여주며 어린 스즈메를 위로한다

스즈메와 소타는 재앙의 문을 닫을 때, 주문을 외운 다음 “돌려드립니다!”라고 소리치며 목걸이에 차고 있던 열쇠를 열쇠 구멍에 꽂아 문을 잠근다. 그렇게  그들은 문단속을 잘 수행하면서, 재난으로부터 일본을 지켜낸다. 그리고 일본 정부는 후쿠시마 오염수를 바다로 투기한다. 스즈메와 소타의 주문에 따르면, 오염수를 바다에 ‘돌려드린다.’ 문을 닫으면, 문 너머의 세계는 알 수 없어진다. 문만 잘 닫으면, 문 너머에 무슨 일이 벌어지든 상관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스즈메는 일본 내부의 문만 잘 닫으면 될 것이므로, 그 오염수를 통해 전 세계 바다가 지옥으로 변한다 해도, 결코 오염수 방류의 문은 닫을 생각조차 하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일본 정부의 주장에 따르면, 오염수 투기는 재난 따위와는 전혀 관계가 없지 않은가! 스즈메는 어린 스즈메에게 “걱정하지 마, 미래 같은 거 무섭지 않아!”라고 확신에 차서 외친다. 그러나 후쿠시마 오염수가 바다로 투기 되는 현실을 보고 있는 지금, 우리들의 미래가 너무너무 무섭다.

 

사진출처: 네이버

 

 

글·김경욱

영화평론가. 세종대에서 영화 관련 강의를 하면서 영화에 대한 글을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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