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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아름의 시네마 크리티크] 지금, 목표를 달성하는 방법 – 영화 <좋.댓.구>의 익숙함이 주는 씁쓸함의 정체
[송아름의 시네마 크리티크] 지금, 목표를 달성하는 방법 – 영화 <좋.댓.구>의 익숙함이 주는 씁쓸함의 정체
  • 송아름(영화평론가)
  • 승인 2023.09.18 09:4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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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주요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언제부터인가 노력을 조롱하던 노오력이라는 단어조차 눈에 띄지 않는다. 내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나의 시간과 공력을 들이는 것은 나를 갈아 넣는일이 되었고, ‘적게 일하고 많이 벌라는 말은 상대의 평안을 바라는 가장 친절한 인사로 자리 잡았다. 나의 인풋만큼 아웃풋이 나오지 않고, 도대체 어떤 인풋을 해야 쪼들리지 않을 정도의 아웃풋이라도 나올 수 있는 것인지조차 알 수 없다. 이 상황에서 노오력이라는 조롱조차 불필요해진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 모른다. 그렇다면 이때 내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는 도대체 뭘, 어떻게, 어디부터, 무엇을 움직여야 하는 것일까. 영화 <..>의 흥미로운 운용은 바로 이에 대한 답을 내려준다. 그리고 이것은 지금의 우리에게 너무도 익숙한, 그리고 자연스러운 흐름이라는 점에서 생각보다 절망적인 현실에 가 닿는다.

과거 아역배우 시절부터 텔레비전 드라마, 영화 등에 출연했던 배우 오태경은 자신의 이름과 얼굴을 알리기 위해 차근차근 필모그래피를 쌓았다. 아역배우 시절 장선우 감독 영화로 데뷔를 했고, 박찬욱 감독 영화에 오대수(최민식 분)의 아역으로 등장했던 오태경은 분명 자신에 대한 수식어를 화려하게 장식할 만한 이름들과 함께했다. 그러나 이후 많은 작품을 찍긴 했지만 그의 이름은 그리 반짝거리지 못했고 건강상의 문제로 배우 활동을 지속하는 것도, 그렇다고 엔터테인먼트 일을 진행하는 것도 그리 녹록지 않았다. 이렇게 우리의 관심에서 멀어졌던 한 배우의 저간 사정을 알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시작한 유투브 채널 !TV’를 통해서였다. 이 채널이 아니었다면 어딘가에서 열심히 일하고 있었던 배우 오태경에 대한 이 모든 이야기는 어디에서도 이렇게 상세하게 설명되지 않고 잊혀졌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여기에 있다. 이는 그가 지금의 상황에 처하게 된 것도, 그리고 자신에 대해 알리기 위해 선택한 방법도 이제 우리가 과거에 알던 노력으로는 더 이상 그가 원하는 입지에 다다를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렇다. 유투브라는 공간은 나와 나의 관심, 혹은 나의 삶과 나의 일상, 더 나아가서는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똘끼까지도 알릴 수 있는 프레임을 할애받는다. 누군가에게 의뢰하지 않아도 또 누군가를 굳이 부르지 않아도 나에 대해 설명할 수 있는 공간이 주어지는 곳, 오태경은 그렇게 자신을 알리며 유투브로 얼굴을 들이밀었다. <..>는 실제 배우 오태경의 전사(前史), 그리고 처음 유투브를 시작하는 이들의 시행착오, 그러니까 뒤늦은 유행을 좇는 먹방이나 매운 음식 견디기와 같은 콘텐츠로 리얼리티를 살리며 영화를 시작했다. 쉽게 유투브로 뛰어든 사람들이 그렇듯이 오태경의 채널은 망삘로 접어들고 점점 사람들의 관심에서 멀어졌을 때 오태경은 자신의 이력 중 가장 빛나는 작품 <올드보이> 오대수의 착장으로 구독자의 부탁을 들어주겠다며 컴백한다. 황당하고 의뢰와 이를 수행하는 오태경의 난장 속에 빠르게 구독자 수는 상승하고 오태경은 점점 이 생태계에 익숙해진다.

<..>는 오태경의 채널 실패와 복귀, 그리고 자극적인 관심을 끌 수 있는 콘텐츠의 활용과 이에 따라붙는 구독자의 관심 등으로 너무나 익숙한 유투브의 생리를 빠르게 설명해간다. 차츰 구독자를 향한 말투와 표정, 그리고 반복적으로 사용되는 몇몇 단어 등으로 오태경은 유투버의 정체성을 장착한 듯 자연스러워지고 점점 얼굴을 볼 수 없는 구독자의 관심에 민감해져 간다. 말도 안 되는 부탁이라도 일단 행하고 보는 그의 콘텐츠는 라이브 방송의 응원 혹은 야유라고도 할 수 있는 낄낄거림 속에 성장한다. 그가 받는 관심은 과거 그가 쌓아왔던 필모그래피로 증명되는 노력과는 분명하게 다른 편에서 얻어낸 것이며 그에 상응하는 놀림과 동정, 혹은 비난까지도 감수한 결과였다. 그리고 그가 거액을 전제로 광화문 한복판에서 무언의 시위를 하고 있는 이의 사연을 알아봐달라는 의뢰를 받으면서 <..>는 오태경이, 아니 지금의 사회가 목표를 성취하()는 방법에 대해 파헤치기 시작한다.

 

유투브 생태계는 갑작스러운 생성과 소멸이 난무한다. 여기에 엄청난 인원이 유입되지만 사실은 몇 개의 그들만의 리그가 여론이라는 이름으로 둔갑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 두 가지가 결합했을 때 폭발하듯 몰려드는 관심은 그들만의 리그가 모두여론으로 전환되며 갑작스레 힘을 얻는다. 이 사건에 관심이 없는 이라도 유투브 내부의 이야기가 외부로 알려졌을 때 꽤 큰일이라 착각하기 쉬우며, 내부에 있는 이들이라면 이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내는 것은 필수적이다. 누구를 응원하든 그것이 어떤 방법이든, 꼬리에 꼬리를 무는 방식으로 사건은 커지고 이는 곧 누군가에 대한 절대적인 응원으로 이어진다. 당연히 이때 중요한 것은 감정을 동하게 만드는 이야기의 주인공은 누구인가이며, 다 채널의 저격과 옹호는 이를 적극적으로 강화한다. 그리고 그 뒤에 이어지는 것은 전혀 의도하지 않는 인플루언서의 탄생이다.

위험한 것은 여기에 있다. 사실을 판단하기 전에 감정을 생성하는 것, 결국 누가 어떤 이야기를 먼저 시작했느냐가 사실상 주도권을 쥐면서 몇몇 인물에게 과도한 의미화가 집중된다. ‘중립기어를 박아야 한다며 사태를 지켜보자는 이들의 목소리보다 누구에게 실망했다거나 누구를 응원한다는 목소리가 훨씬 큰 것이 사실이며 이 과정으로 누군가는 폭발적인 관심의 대상이 된다. 누군가에 대한 증거를 들이대지 못한 저격이든, 확실한 증거를 제시한 옹호이든 이 모든 과정은 특정 누군가를 향한다. 단순한 배경의 검은 옷, 평소의 발랄함과 메이크업을 지운 초췌한 얼굴조차 이 사건의 주인공을 향하는 것으로, 이 모든 설정 역시 유투브 생태계 순환 속에 놓인 사죄의 아이콘이 된 지 오래이다. <..>는 우리에게 익숙해진 이 흐름을 찾아 무언의 시위자에 집중하고 이를 집요하게 따라가는 오태경을 주목한다. 그렇다면 왜 오태경은 그 한복판에 뛰어든 것일까. 관심받아야 하는 직업인 배우, 그가 사실이 밝혀질 수도 있는 위험을 감수한다면 여론몰이라는 이름으로 위장한 거짓은 사람들의 엄청난 관심을 가져다 줄 것이 명확하기 때문이다.

 

<..>는 바로 이 점에 주목한다. 오태경이 자신을 알리는 것, 그리고 그가 목표로 한 자신이 키우는 배우를 홍보하는 것은 이 생태계를 조금만 움직인다면 노력노오력도 없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어느 타이밍에 누구를 어떻게 움직이는가, 그것을 어떻게 여론으로 착각하게 만드는가, 그리고 누구를 불쌍한 이로 만들어 동정하게 하는가에 대한 설계는 정확하게 오태경의 목표 달성으로 이어진다. 오태경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는 무언의 시위자의 사연을 알아내면 큰돈을 주겠다는 구독자의 말에 그의 뒤를 캐기 시작하고, 그가 억울한 일을 겪은 이라는 것을 밝혀냈다. 사람들의 인터뷰를 통해 얻어낸 무언의 시위자에 대한 이야기는 함부로 누군가의 꿈을 꺾은 오해라는 점에서 사람들의 분노를 자아내지만 또 다른 유투버 빅마우스의 저격은 오태경이 그간 무언의 시위자를 둘러싼 인터뷰 등을 주작했다는 것을 폭로하면서 오태경은 한순간에 나락으로 떨어진다.

이에 대해 해명하며 자신의 아역으로 시작해 결국 이를 벗어날 수 없었다는 오태경의 눈물 섞인 호소와 고백, 그리고 자신과 비슷한 처지에 있는 누군가를 도와주고 싶었다는 그의 마음은 극 중 유투버 오태경과 실제 배우 오태경의 경계를 두고 진실에 가깝게 가닿는다. 그가 지금하고 있는 행위가 안타깝긴 하지만 실제 그의 삶을 생각했을 때 이해가 가는 그의 행보에 대해 <..>의 관객들에게, 그리고 그간 오태경의 연기를 보아왔을 관객들에게 모두 호소하는 말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가 해왔던 노력과는 상관없이 얻게 되었던 관심, 아마 가장 많은 이들의 입에 오르내렸을 오태경의 이름은 무엇을 얻기 위해 당연히 노력해야 한다는 가치가 무너져버린 지금을 너무도 명확하게 겨냥하고 있었다. 그러나 <..>는 단순히 이것이 현실이라고 말하는 것으로 이야기를 마무리 짓지 않았다. 이후 이어질 이야기, 그래서 그게 뭐가 나쁜데에 대한 싸한 냉소, 거기까지 이어지고 있었다.

 

영화가 끝나가는 때에 우리는 오태경을 저격했던 빅마우스의 정체를 확인할 수 있다. 적절한 타이밍에 나타나 줬던, 오태경의 약점을 집요한 단어들로 건드렸던 그가 누구인지 밝혀졌을 때 단 한 컷도 몇몇 사이트와 유투브 혹은 텔레비전 프로그램의 프레임 밖으로 나오지 않았던 영화 <..>의 냉소가 드러난다. 굳이 현실의 몸을 움직이지 않아도 충분히 이곳까지 삐져나오는 힘, 그것이 지금의 목표와 계획이 이뤄지는 방식이라고 말이다. 물론 이렇게 구축한 세계는 꽤 위험해 보인다. <..>는 영화의 말미 오태경을 대표님이라 부르며 사무실을 찍기 시작한 직원의 카메라를 불안하게 놓는 것으로 빅마우스의 정체가 실수처럼 드러나지는 않을까 하는 불안함을 자아냈다. 그러나 이것이 탄로난대도 또 그에 맞는 논리가 다시 촘촘히 짜이지 않을까. 이때의 불안함을 넘기는 것으로 오태경은 박찬욱 감독으로부터 연락을 받았고, 그가 키우려던 배우는 아련한 서사를 가진 신인 배우로 우뚝 섰다. 이 결과만 보았을 때 일어날지 일어나지 않을지도 모르는 위험과 불안을 감수하지 못할 이유는 없어 보인다. 그럼에도 <..>가 어딘가 씁쓸함을 남기는 것은 아직 우리가 믿고 있는, 믿고 싶은 무엇인가가 있어서이지 않을까.

 

<..>(2023)

사진 출처: 네이버 영화

 

 

글·송아름

영화평론가, 영화사연구자. 한국 현대문학의 극을 전공하며, 연극·영화·TV드라마에 대한 논문과 관련 글을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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