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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세히 오래 보아야 보인다!
자세히 오래 보아야 보인다!
  • 성일권 l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한국어판 발행인
  • 승인 2023.11.30 16: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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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한국어판을 펴내는 르몽드 코리아의 전경

2023년은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한국어판에게 참으로 험난한 한 해였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눈만 뜨면 종이 값과 인쇄비가 오르고, 견고했던 독자들의 구독률과 열독률은 조금씩 뒤로 꺾이고, 신규 독자들의 유입은 그다지 늘지 않고, 상업적인 광고 수주는 예나 지금이나 쉽지 않아 창간 16년째를 맞는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한국어판의 현실은 엄중하기만 하다. 

작금의 경제 상황이 IMF 때보다도 더 혹독한 시련기라는 평론가들의 진단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주변을 둘러보면 거의 모든 언론·출판사들의 암담한 현실이 펼쳐진다. 시내 곳곳의 신문 가판대는 거의 텅 비어 있고, 아파트 단지에는 더 이상 신문 배달원이 오지 않고 있으며, 서점가에선 시사 매거진 코너가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극단의 시대를 살다 보니, 인터넷 매체이건, 종이 매체이건 정상적인 좌나 우, 또는 진보나 보수가 아니라 극단적인 정파색과 반윤리적인 광고로 도배되어야만 생존이 가능하다. 그게 아니면 대자본을 뒷배로 삼은 친기업적 매체이거나 재벌 또는 족벌 매체이어야만 지속가능한 게 현실이다. 종이신문들에는 거의 절반이 대기업과 공기업의 광고들로 채워져 있고, 인터넷 매체에는 보기에 낯 뜨거울 정도로 반윤리적이고 비도덕적인 광고들이 넘쳐난다.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한국어판이 거대 재벌의 후원 없이, 반윤리적인 상업광고 없이도 오롯이 16년 가까이 버텨낼 수 있었던 것은 독자 여러분의 따스한 격려와 질책 덕택이다. 아시다시피, <르몽드 디플로마티크>는 프랑스의 권위지인 르몽드의 자매지이지만, 편집권과 경영권이 독립적으로 운영되며 세계 25개 언어로 34개 나라에서 발행되고 있다. 비록 본사가 프랑스이지만, 어느 특정 국가에 치우치지 않고 보편성과 균형감각, 오로지 진실추구의 모토를 내세워 세계에서 가장 널리 읽히는 글로벌 매체로 자리 잡아왔다. 

특히 독보적인 지식인들의 통찰력 깊은 글들은 한 시대의 정치·사회·문화적 담론과 패러다임을 이끌어왔으며, 한국어판은 세계 지식인사회와 국내 지식인사회를 잇는 가교의 역할과 열린 세계로 향하는 ‘세계의 창(窓)’으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해왔다고 자평한다. 국내의 많은 언론이 생존의 갈림길에서 보수로 향하고, 진실탐구가 아닌 선전 광고지와 오락과 배설의 수단으로 전락한 상황에서 <르몽드 디플로마티크>의 존재감은 희미하지만 독보적이다. 12월호 목차를 봐도, 하마스의 도발(?)로 촉발된 이스라엘-하마스 분쟁을 20쪽에 걸쳐 집중적으로 진단했고, 미국 주도의 G그룹에 맞선 브릭스(Brics)의 탈(脫)달러화, 정치 사회적 격변을 겪고 있는 쿠바, 스페인, 아르헨티나, 파키스탄, 캄보디아 문제를 다루고 있다. 또한 한국 필진이 쓴 프랑크푸르트학파 100주년, 미국 중심의 국제질서와 한국 외교 등도 빠트릴 수 없다. 하지만 <르몽드 디플로마티크>의 기사는 읽기에 결코 간단치 않다. 글의 문체와 내용이 까칠하고 도발적이며, 때로는 은유적이면서 너무 전문적이고 난해하여 집중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르몽드 디플로마티크>는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고 말한 나태주 시인의 시구처럼, 꼼꼼하게 밑줄을 치며 백과사전과 용어집을 찾아 행간의 의미를 따지고, 천천히 곱씹어 읽어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경우가 많다. ‘자세히 오래 보아야 보인다’는 얘기다.

<르몽드 디플로마티크>의 문체 스타일에 익숙지 않아 당혹스러워하시는 분들에게 권하고 싶다. 낯설고 어렵다고 중도 포기하지 마시고, <르몽드 디플로마티크>를 자세히, 또 오래 보시면 사랑에 빠지실 것이라고….

경제 침체의 와중에도 전국의 몇몇 주요 도시에선 <르몽드 디플로마티크>를 여전히 함께 읽고 토론하며 사유하는 모임이 있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모습인가! 올해의 마지막 남은 달력 한 장을 남겨둔 채, 벌써부터 봄날의 화사함을 미리 떠올려본다. 경기가 호전되어 독자들의 미소와 웃음이 감돌고, <르몽드 디플로마티크>가 전국 곳곳에서 품절되는 그날이 하루빨리 다가오길 기대해본다. 

 

 

글·성일권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한국어판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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