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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승학의 시네마 크리티크] 과거가 현재가 되는 힘, 기억: 영화 <3일의 휴가>
[지승학의 시네마 크리티크] 과거가 현재가 되는 힘, 기억: 영화 <3일의 휴가>
  • 지승학(영화평론가)
  • 승인 2023.12.18 1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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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절의 순간이 복구의 순간이 되길...

죽은 지 3년째의 어느 날, 세상에 남겨둔 딸 방진주(신민아)를 보기 위해 저승으로부터 휴가를 얻어 세상에 내려온 복자(강해숙). 이 영화는 복자의 그 3일간의 시간을 보여준다. 본래 육상효 감독은 일상적인 상황 속에서도 골계미를 소환하여 해학을 잘 만들어내는 연금술사이니, 죽은 자의 휴가라는 이 설정은 육상효 감독다운 발상이라고 할 수 있다. 아울러 그런 설정 자체에서 느껴지는 분위기만 놓고 봐도 육상효 감독의 특기인 해학과 유머 그리고 감동의 코드가 잘 작동하리라 기대하게 된다. 감성적으로 말하자면, 만약 그것이 잘 작동하게 되면 우리에게 남는 것은 연말연시의 따뜻함과 부모와 자식 간의 사랑을 깨닫는 일이 될 것이다. 적어도 <3일의 휴가>가 겨냥하는 것은 그런 느낌이다.

 

영화 포스터: 출처_다음
영화 포스터: 출처_다음

무슨 이야기인가?

‘3일의 휴가’라는 말은 일반적으로 평범한 말이나 직장인들에게는 설레는 말이다. 복자가 설레는 마음으로 이 휴가를 기다린다는 점에서 보면, 직장인들의 은유가 아닐까 생각해 보게도 되지만 이 영화의 특별함은 차라리 귀신이 내 주변을 배회하는 이야기인데, 하필 그들은 모녀 관계였다는 데서 찾을 수 있다. 그래서 영화는 죽은 엄마의 안타까운 사연과 딸이 겪게 되는 후회의 감정에 자연스럽게 눈이 가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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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가라는 축복

천국에서 간절하게 이 휴가의 순간을 기다려왔고 미국에서 교수로 재직하는 자랑스러운 딸의 모습을 확인하고자 세상에 다시 내려오게 된 것이라면 그녀가 받은 휴가는 곧 신의 축복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기대와 달리 고향에 내려와 죽기 전 자신이 하던 백반 장사를 그대로 하고 있는 딸 진주를 보게 된 이후부터 복자는 축복 속에서도 또다시 현실 속 엄마의 걱정거리를 내려놓지 못하고 만다. 그렇다 보니 이 영화는 엄마가 기대한 진주의 모습과 엄마의 기대를 저버린 진주의 모습이 계속 뒤엉킨다. 그건 복자를 오해한 진주와 복자를 그리워 하는 진주의 모습이 계속 뒤엉키는 것과 같은 결을 그린다. 이를 하나로 이어주는 것은 백반집의 요리다. 그 요리의 레시피는 엄마 복자와 딸 진주의 기억이 교차하는 지점이 된다. 그들은 그렇게 기억으로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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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시피의 역할

여기서 ‘기억’이 ‘레시피’와 만나는 일에 대해 생각해 볼 여지가 있다. 그것은 결국 ‘맛’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찬찬히 뜯어볼 필요도 없이, 기억이 맛으로 대체되려면 엄마가 하던 그대로의 정교한 레시피가 전제되어야 한다. 그렇게 엄마와의 추억이 소환된다. 그래서 레시피는 엄마에 대한 추억을 환기하는 절대적인 지표이자 기억이 된다. 여기서 기억과 추억의 차이를 논할 필요는 없지만, 맛이 무언가를 갑자기 환기한다는 사실은 이미 정평이 나 있는 해석이라서 그것만은 상기해 둘 필요가 있다. 특히, 그건 의식에 의한 것이 아니라 감각에 의한 것이다. 오로지 몸을 거쳐 일어나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3일의 휴가>는 맛의 감각으로써 산 자와 죽은 자 그리고 과거와 현재가 몸으로 연결되는 영화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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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회와 그리움의 탄생

그러니까 <3일의 휴가>는 불가능한 상황, 즉 생과 사의 이치를 거스른 이른바 죽은 자의 휴가라는 상황을 통해서 복자와 진주의 실질적인 화해와 용서를 말하려는 영화라고 정리할 수 있다. 여기에 죽음이 갈라놓아 실체적 관계가 불가능해진 상황과 봉자와 진주의 어긋나 있는 과거의 감정이 덧붙는다. 어긋난 감정은 일방적인 오해에서 비롯된 사랑이다. 바로 그런 사랑은 진주에게 이르러 고스란히 후회와 그리움으로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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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두 맛의 역할

엄마를 향한 진주의 후회와 그리움은 무를 넣는 것이 엄마만의 비법이었던 만두,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만두의 그 맛을 되찾아 가는 과정에서 점점 완화된다. 매운 것을 먹지 못했던 어린 시절의 진주. 복자는 그런 진주를 위해 무를 넣어 매운맛을 줄인 만두 레시피를 만든다. 진주가 그 만두 맛을 정확히 재현해 낸 날, 비로소 진주는 과거의 복자를 현재로 불러낼 수 있게 된다. 이것은 휴가받아 이승에 내려온 복자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진주의 기억이 과거의 복자를 소환할 수 있게 되었다는 뜻이다. 과거, 살아있을 때의 복자와 휴가를 얻어 저승에서 내려온 복자의 모습을 구분해야 하는 이유는 그러지 않으면 두 존재를 혼동할 수 있어서다. 그러함에도 복자는 현재 진주가 만두소를 만들고 있을 때 진주의 머릿속에, 진주의 곁에 이미 동시에 다가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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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n’t know why’의 역할

전화를 받지 않는 진주의 벨소리 컬러링. 노라 존스의 ‘Don’t know why’가 흘러나온다. 그 음악은 진주가 받지 않는 전화를, 진주가 받기만을 기다리며 복자 혼자 듣게 된 음악이다. 이 음악은 복자가 들리는 대로 적어 둔 가사, 아니 복자의 흔적이 되어 진주에게 복자를 또 한 번 소환하는 기억이 된다. 그 기억은 또다시 복자와 진주의 몸을 한 곳에 불러 세운다.

시간의 복구

이런 두 사람이 함께 등장하는 장면은 결코 같은 곳에 있을 수 없는, 소위 불가능한 상황을 가능한 상황으로 바꿔 놓은 것이다. 죽은 자와 산 자가 함께 할 수 없다는 설정을 무시하여 만든 영화 속 대화 장면들이 그것을 대표한다. 복자가 진주 옆에서 걱정의 말을 쏟아 낼 때, 진주가 귀를 긁는 장면은 가장 대표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게다가 그것은 복자의 모든 것, 살아있었을 때와 다름없을 만큼 생생한 디테일까지 불러올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3일의 휴가>에서는 죽은 자가 산자로, 과거가 현재로 그렇게 복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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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 역할

이로써 한 가지 결론은 뚜렷하게 내릴 수 있다. 기억은 나의 몸과 공명하여 불가능한 경험을 가능한 경험으로 바꿀 수 있다는 것. 어쩌면 그것은 내가 가장 무너지는 순간, 내가 가장 좌절하는 순간, 그것을 복구하려는 노력이 가장 강력하게 발동됨을 의미하는 것인지 모른다. 죽은 자가 다시 돌아올 수 없다는 절망의 순간, 그것을 복구하려는 기억은 진주가 복자를 불러올 수 있게 된 가장 강력한 원동력이 된 것이라는 뜻이다. 그러니 이렇게 생각해 볼 수도 있지 않을까. 복자에게 주어진 3일의 휴가는 진주가 가장 무너진, 절망하는 순간 주어진 복자의 축복이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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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절의 순간, 복구의 순간

그것은 누군가의 슬픔이 곧 누군가의 기쁨이라는 것을 의미하는 말이 아니다. 그건 과거가 현실로 복구된다는 의미를 넘어서 다시는 살아 돌아올 수 없는 과거의 시간, 어쩌면 영화에서는 죽은 복자의 몸을 의미할 수도 있는 그 시간을 생생하게 살아있는 현실, 어쩌면 영화에서는 살아있는 진주의 곁에 있을 수 있는 생생한 시간으로 뒤바꿀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말이다. 모든 기억이 완전해질 수 있을 때는 몸을 통해서이지 않은가. 기억은 머리를 통해서 꺼내는 것이 아니라 몸을 통해 올라오기 때문이다. 맛은 그것을 상징한다. 그래서 맛은 기억과 맞물려 우리의 모든 불가능한 순간을 가능한 순간으로 만들기에 충분하다. 영화 마지막, 복자의 영혼이 진주를 어루만지면서 이야기마저 나눌 수 있게 된 그 불가능한 경험을 위해서 진주와의 모든 기억을 포기하기로 결정한 순간은 몸과 기억의 관계를 극적으로 설명해주는 결정적인 장면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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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플 때, 좌절할 때, 포기하고 싶을 때 우리를 다시금 불러 세울 수 있는 것은 그래서 과거를 현재로 뒤바꿀 수 있는 '기억의 힘'이다. 3일의 휴가는 시간이 아니라 기억의 그 힘을 맛을 통해서, 음악을 통해서 그리고 그 모든 것을 감각하는 몸을 통해서 보여준다. 이것을 '기억력'이라고 오해하지 않는다면 육상효 감독이 그런 기억의 힘을 생생하게 포착하기 위해 복자의 모습 아니 복자의 영혼을, 특수효과가 아닌 실제 촬영을 통해 구현해 낸 이유를 조금 특별한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될 것이다. 영화의 주제보다 육 감독의 이 전략이 오히려 더 절묘하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좌절의 순간이 복구의 순간으로 뒤바뀌는 의미를 그런 식으로 촬영하는 것만큼 더 정확하게 표현할 수는 없다고 생각해서다. 개인적으로 그 전략의 묘가 감동으로 연결되는지 안 되는지는 관객들의 몫으로 남기고 싶다. 감동은 늘 보는 이의 마음 자리에 각기 다른 방식으로 남기 마련이니까.

 

 

글·지승학
영화평론가. 문학박사. 한국영화평론가협회 홍보이사, 2011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영화평론 부문으로 등단. 현재 고려대 응용문화연구소 연구교수로 재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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