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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주의 문화톡톡] 하느님의 형상: 홍수 이후 일어난 변화
[김창주의 문화톡톡] 하느님의 형상: 홍수 이후 일어난 변화
  • 김창주(문화평론가)
  • 승인 2024.01.08 09:2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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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에 펼쳐진 아름답고 평화롭던 세상에 균열이 일어난다. 에덴(צֵדֶו)의 두 사람은 금단의 열매를 따먹고 그 아들은 급기야 살인까지 저지른다. 사람의 죄악이 점점 가득해지자 하느님은 후회하며 한탄한다(창 6:6). 마침내 하느님은 대홍수(חַמַּכּוּל)로 세상을 파멸시킨다(창 7:10-24). 의인 노아와 그의 여덟 가족들만 살아남았다. 하느님은 노아, 곧 새 아담을 향하여 다시는 생명을 멸망시키지 않을 것이라며 무지개(קֶשֶׁת)를 보여준다(창 9:12-17). 창세기 1장에서 9장까지 줄거리다. 창조(creation)가 파괴(decreation)를 통하여 재창조(recreation)되고 있다. 그럼에도 이 과정에서 사람은 ‘하느님의 형상과 모양’으로 창조되었다는 사실이 일관된다(창 1:26-27; 5:1,3; 9:6). 어떤 경우에도 ‘하느님의 형상’(צֶלֶם אֱלֹהִים)은 결코 변하지 않는 상수(constant)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세 차례 변혁적 과정을 거치는 동안 과연 하느님의 형상에 아무런 변화는 없었을까? 처음에 하느님의 ‘형상과 모양’이 나란히 나오기 때문에 두 낱말의 의미에 집중하기 쉽다. 리용의 이레니우스(130-202)는 ‘형상’(צֶלֶם)과 ‘모양’(דְּמוּח)을 각각 imago와 similitudo로 정의하고 둘 사이의 차이는 타락에서 드러난다고 갈파한다.1) 곧 인간의 이성과 본성에 해당하는 형상(imago)은 인류의 타락에도 오염되지 않고 유지되는 우주적 본질이나, 모양(similitudo)은 심판으로 인하여 변질될 수밖에 없는 인간의 면모라는 해석이다. 그의 주장은 이후 수많은 아류를 생산하였다. 예컨대 ‘이성과 자유,’ ‘육신과 영혼,’ ‘내면과 외면,’ ‘지성과 도덕,’ ‘지식과 의’ 등이 쏟아져 나온 것이다. 그러나 형상과 모양이란 히브리 수사에 빈번히 등장하는 중의법(hendiadys)이다. 예컨대 혼돈과 공허, 우림과 둠밈, 불기둥과 구름기둥 등에서 알 수 있듯 동어반복을 피한 유의어로 부각시킨다. 그러므로 형상과 모양은 사람의 신적 특성을 묘사한 강조법으로 둘은 서로 맞바꾸어도 의미의 변화가 없다. 하느님의 형상과 모양은 계몽주의를 지나면서 인간의 존엄성과 생명의 불가침성을 일깨우는 성서적 전거로 막대한 영향을 끼친다.

최근 랍비 조나단 색스(Jonathan Sacks)는 창세기 서두에서 하느님 형상이 어떤 과정을 겪었는지 유심히 관찰한 바 있다.2) 그 결과는 놀라운 것이었다. 창세기 1장, 5장, 9장에 거듭 언급되는 ‘하느님의 형상’이 문학적으로 일관성을 유지하지만. 신학적으로 볼 때 1장과 5장 그리고 9장 사이에 뚜렷한 시각차가 드러난다. 전자에서는 ‘나’와 ‘우리’가 하느님의 형상으로서 창조 세계를 지배하는 특권을 갖지만, 후자에서는 ‘나’가 아닌 ‘타인’에 초점을 둔다.3) 즉 ‘나’의 내면에 새겨진 하느님에서 ‘너’가 바로 하느님의 형상이라는 사유의 진보가 일어난 것으로 파악한다. 하느님은 아담에게 당부했듯 홍수 이후 노아에게도 똑같이 세상의 관리와 통치를 허락한다(창 9:1,7). 다만 한 가지 조건, 다음과 같이 살해 금지가 추가된다(6절).

누구든 (다른) 사람의 피를 흘린다면 제 피도 흘릴 것이라. 
왜냐하면 하느님이 자신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셨기 때문이라.(사역) 

이것은 애초 1인칭에 갇힌 하느님의 형상이 홍수 이후 ‘나’를 넘어 2인칭 ‘너’로 확장되는 신학적 성찰과 변화다. 최초의 창조가 파괴되어 재창조된 것은 처음의 회복이나 단순 회귀가 아니다. ‘나’ 안의 하느님에서 ‘너’ 안의 하느님으로 한 단계 업데이트된 것이다. 내 안의 하느님 형상을 고집하면 타인(אַחֵר)은 배제와 공격의 대상이 되고 만다. 그 결과는 폭력과 죄악으로 인한 멸망뿐이다. 그러나 ‘너’ 안에 내재한 하느님 형상을 인식함으로써 파괴를 막고 창조를 영위할 수 있게 되었다. 이로써 사람이 함께 살아갈 상생의 조건, 적어도 공존의 관계를 모색하는 사유의 진일보를 일궈낸 것이다.

 

이스라엘과 영국 법인류학자들이 재현한 예수/BBC 다큐멘터리 "신의 아들"

창세기 저자는 홍수 이후 새로운 창조를 보다 확실하게 매듭짓기 위한 구조적 장치를 잊지 않는다. 계약 형식은 히브리 사회 및 고대 가나안에 익숙한 생활 방식이었다. 그는 창세기 1장과 5장에 포함된 1인칭 시점의 하느님 형상을 9장에서는 2인칭 시점으로 확장하여 계약을 맺는다. 이를 테면 창세기1장과 9장의 상호적 관련성을 위해 7 차례 토브(טוֹב)를 선언하고, 동시에 언약(בְּרִית)을 일곱 번 제시함으로써 둘 사이의 문학적 균형을 맞춘다(창 9:9,11,12,13,15,16,17).4) 이로써 노아를 통한 새 창조(recreation)가 처음 창조(creation)와 다름없이 신적 권위에서 비롯되었음을 입증한 것이다. 그러나 노아 이후 세상은 처음보다 더 포괄적이고 정교하며 더욱 확장된 사유의 공간이 되었다. 그 핵심은 곧 ‘하느님의 형상’이다.

이와 같이 ‘하느님 형상’이라는 신학적 사유에 큰 변화가 있었지만 하느님은 한 분이다. 최초 모습대로 오직 한 종(種)의 인류만 살았다면 그들은 평화롭게 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현실에서 사람은 혼자 살 수 없는 존재다(창 2:18). 사람이란 사회적 동물이어서 스스로 ‘하느님의 얼굴’로 인식하면 (하느님의 얼굴이 아닌) 타인에게 손쉽게 위력을 행사할 수 있다. 여기에 폭력과 굴종이 뒤따른다. 사람은 대개 ‘나’와 다른 사람을 두렵게 여기거나 잠재적 경쟁자로 취급한다. 더구나 고립된 원시 공동체의 경우를 상상해보라. 낯선 사람과 이방인 등은 물론이고 인근 부족에게도 날카로운 적대감을 보인다. 인류 역사상 폭력과 살상의 뿌리가 여기에 있었다. 타인을 배제한 절반의 하느님 형상은 위험하며 공격적이다. 그러나 반대의 경우라면 어떨까? 즉 나와 다른 사람들이 위협적이라기보다 나의 능력을 향상시키며 나의 약점으로 보완할 수 있다면? 홍수 이후 신학적 사유는 이 질문에 대한 응답이다. 이것은 ‘나’와 다른 외모, 피부, 문화, 가치, 사상, 종교를 가진 타인에게서 하느님의 형상을 보라는 정언(apodictic) 명령이다. 

왜 이렇듯 중대한 차이를 인식하지 못할까 자문하게 된다. 해당 구절은 성서의 사각지대다. 홍수 이후 무지개 계약이 멸절의 공포에서 벗어나 안도와 희망을 키웠기 때문이다. 이제는 타인으로부터 낯설고 두려운 위협이 아니라 내면을 확장하고 서로 협력하는 상생의 가능성을 볼 수 있게 되었다. 하느님은 한 때 죄악과 폭력이 거듭되는 세상을 홍수로 파멸시켰다. 노아를 통하여 새로운 세상을 열면서 또 다시 살상과 죽음의 악순환이 일어나지 않도록 안전장치를 꾀하고 있다. 타인에게 깃든 하느님의 형상을 보라! 에덴동산의 아담이 ‘나’와 ‘우리’의 의식에 맞추었다면, 홍수 이후 노아로 대표되는 인류는 ‘너’를 대등한 협력자로 인정하며 타인을 ‘나’보다 앞세우는 의식의 진보가 일어난 것이다. 

사람은 모두 다르며 고유하다. 나에게 부족이나 결핍이 없다면 결코 타인을 찾지 않는다. 사람은 흔히 사회적 동물로 간주되지만 그전에 이미 연대할 줄 안다. 나의 결함은 타인의 도움을 요청하는 통로다. 타인의 부족을 내가 채우고, 나의 결핍에 누군가 반응할 것이다. 그러니 타인을 낯설다며 경계하고 잠재적 위협으로 여길 일이 아니다. 이른 바 차이의 존중이 요구되는 지점이다. 창조 이후 균열과 폭력으로 얼룩진 비극적 멸망 후에 깨달은 통찰이며 아픈 성장이다. 타인 안에 깃든 하느님의 형상과 모양을 찾으라. ‘나’의 결핍과 부족이 사이를 잇고 서로를 도와 마침내 함께 사는 대동(大同) 세상을 열게 되리라. 아담이 자신(אוֹתוֹ)을 하느님의 형상으로 인식하였다면, 노아는 타인(אַחֵר)에게서 하느님 형상을 기억하라는 명령을 듣는다. 홍수 이후 깨닫게 된 인류의 지성적 각성이자 진보다.* 

 

1) P.N. Bratsiotis, "Genesis 1:26 in der orthodoxen Theologie," Evangelische Theologie 11 (1951) 289-97.
2) Jonathan Sacks, Judaism’s Life-Changing Ideas (Jerusalem: Maggid Books, 2020) 9-12.
3) 그의 주장을 생생하게 전달하기 위해 영문을 싣는다. "Genesis 1 tells me that I am in the image of God. Genesis 9, after the flood, tells me that the other person is in the image of God." ibid., 10. 
4) 히브리어 토브는 ‘좋다’는 뜻이다. 창세기 1장에서 하느님은 세상을 창조하는 과정에 토브를 일곱 번 반복하며 자신이 지은 것을 보며 흡족히 여긴다(창 1:4,10,12,18,21,25,31).

 

 

글·김창주
한신대 신학부 교수. 히브리 유산을 인문학으로 푸는 글을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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