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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경의 시네마 크리티크] <풍운의 궁전(정창화, 1957)> : '눈물 젖은 호떡'과 열정이 빚어낸 스팩터클 시대극
[김 경의 시네마 크리티크] <풍운의 궁전(정창화, 1957)> : '눈물 젖은 호떡'과 열정이 빚어낸 스팩터클 시대극
  • 김 경(영화평론가)
  • 승인 2024.01.15 10:0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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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타지 시대극의 스팩터클

 

풍운의 궁전 포스터
<풍운의 궁전> 포스터

<풍운의 궁전>은 시대 배경이 모호한 시대극이다. 그래서 구체적 역사와 사료에 매이지 않고 창작자의 상상력과 극적 재미로만 이야기를 끌고 갈 수 있다. 시대 배경이 모호한 만큼 세트(이규황), 소품(김만) 그리고 의상(제비양장점) 등 재현에 힘을 빼지 않고 효과적으로 스팩터클한 아름다움을 추구할 수 있다. 고구려, 신라, 백제의 문양이나 장신구, 문무 대신들의 의복과 화려한 관등은 전문 의상팀이 전무하던 전쟁 직후 1957년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정치하다. 십장생, 삼족오, 쌍학, 구름과 용, 글씨와 그림 등이 다채롭게 사용되고 있다. 더구나, 이들 문양은 스팩터클한 것에 그치지 않고, 내러티브로도 작용한다. 

예컨대, 구름 문양 의자 뒷면이 프레임 전면 중앙에 있다. 진평대감(변기종) 측근들이 긴 테이블에 앉아 회식하는 장면이다. 화면 위에서 등장하여 공격하는 화피달(김승호)이 화면 하단까지 내려오면, 화면 하단 중앙, 뒷면만 보이는 멋진 구름 문양 의자에 앉아 있던 인물, 진평대감이 결국 수세에 몰리게 된다. 결국 화피달은 의자의 주인을 포함하여 회합에 모여있던 전원을 제압하고 화면 전면을 차지한다. 이 장면은 ‘제압’이라는 내러티브 혹은 구름 문양 의자의 주인공이 바뀐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배치다. 전통적으로 구름 문양은 십장생 중 하나이기도 하지만 왕권을 상징하는 용 대신 그보다 한 단계 낮은 구름문을 사용함으로써 최고의 자리에 오르고 싶은 열망을 표출하는 방편으로 사용되어 높은 신분의 권위와 위엄을 상징하기도 하였다. 이 장면부터 양측 장군들의 전쟁이 시작되고 화피달 군은 진평대감은 물론 왕권까지 장악한다. 왕은 용문, 화피달은 호랑이문 등을 배경으로 하여 이들의 지위와 캐릭터를 드러내는 것은 물론이다.

화피달은 궁정을 장악한 후 자신의 딸 화선 아기(고향미)를 보해 태자(이승화)와 혼인시키려는 계책을 세우지만 태자는 정혼자인 진평대감의 딸 구슬아기에 대한 애틋한 마음을 돌리지 않는다. 태자와 구슬아기(김미선)의 사랑 못지않게, 명륜 장군(성소민)과 버들 아기(김신재)의 사랑도 애틋한데, 이들이 죽어가면서도 서로를 그리워하는 장면을 마지막으로 천둥·번개와 함께 어두운 내전이 막을 내린다. 여기부터 고비용 스펙터클 궁중 세트에서 탁 트인 자연으로 전환되어 저예산 로케이션 장면이 시작된다. 이런 식의 효율적 예산편성과 드라마틱한 장면전환을 위한 연출은 <노다지>(1961)에서도 비슷한 양상으로 전개되는데 건달들의 공간인 모던 누아르 세트와 콘트라스트 조명 화면구성부터 금광이 있는 산악지방 로케이션 장면이 병치 되는 것이 그러한 예이다.

 

남장여자, 구슬아기 이야기

 

태자와 구슬 아기
태자와 구슬 아기

영화의 전반부가 천둥·번개와 함께 끝나고, 후반부는 구슬아기 서사다. 천신만고 끝에 혈혈단신 남장여자로 도주하던 구슬아기는 산세 험악한 곳에서 잔인무도한 산적 쇠망치(허장강)를 만난다. 쇠망치의 아우, 돼지(양일민)가 구슬아기를 쇠망치로부터 구하여 이들은 의형제를 맺게 된다. 이 둘의 관계는 남장여자가 불러일으키는 아슬아슬한 성적 판타지와 브로맨스를 오가게 된다. 거기에 더해, 돼지도 사실은 화피달의 모함에 희생된 명문가의 자제 해모수였기 때문에 구슬과 함께 화피달을 향한 복수를 도모하게 되면서 그들은 더욱 의기투합하게 된다. 구슬이 돼지에게 나는 새도 떨어뜨리는 뛰어난 궁술을 보여주며 궁전에 침투하자고 설득하는 장면은 강인한 여성 영웅의 면모를 보여 준다.

남장 여자 구슬의 액션은 적은 분량에도 불구하고 외유내강 여성 영웅의 전형을 보여주었을 뿐만 아니라 후에 정창화가 홍콩 쇼 브라더스에서 첫 번째로 만든 작품이자, ‘유럽에 수출된 최초의 홍콩영화 1호’라는 <천면마녀>(1969)의 강력한 여성 액션을 떠오르게 한다.

 

액션과 내러티브, 그리고 음악의 동시성

 

풍운의 궁전에서 벌어진 반란과 액션

<풍운의 궁전>에는 수많은 액션 장면이 빠른 속도로 전개되는데 궁전 내에서 벌어지는 검술 액션이든 산채 주변에서 벌어지는 산적 쇠망치와 돼지의 액션이든 빈번히 등장하는 빠른 액션과 잘 맞아떨어지는 음악이 정확하게 동기가 되어, 잘 만들어진 무성영화를 보는 듯, 이미지와 음악이 내러티브를 함께 진행한다. 이 영화의 음악 감독, 김대현(1917~1985)은 ‘예쁜 아기 자장’이라는 부제가 붙은 <자장가>, 고등학교 교과서에도 실렸던<들국화>, <고향의 노래>의 작곡가다. 그가 중학교 2학년 때 만든 곡이 ‘따르릉따르릉 비켜나세요’의 <자전거>라니 참으로 친숙한 노래들을 작곡한 거장이다.

민족 가극, 오페레타, 합창과 관현악곡, 40여 편의 영화 음악 등 많은 작품을 창작한 그는 <풍운의 궁전>에서 ‘음악, 지휘’를 맡았다. 그는 음악적 완성도는 물론 뛰어난 동시성을 구현했다. 이는 '동시성 음악' 혹은 '미키 마우징(mickey mousing, 미키 마우스가 등장하는 디즈니 애니메이션에서 스코어가 그러한 용도로 사용되었기 때문)' 혹은 '언더 스코링(under scoring)'이라고도 불리며, 관객에게 영화의 흐름이나 단계를 구분 짓거나 강조하는데 사용되기도 한다.

음악뿐 아니라 각 분야의 전문가와 스태프들이 기울인 노력을 보면 절로 고개가 숙어진다. 정창화는 그의 자서전(The Man of Action, p.91)에서 “<풍운의 궁전>도 호떡으로 끼니를 때우며 촬영했던 때다.”, “그 시대에는 영화를 한다는 정열 하나로 배우도 스태프들도 ‘눈물 젖은 호떡’을 먹으면서도 열심히 해 주었다.”며, “요새라면 영화 진행 자체가 불가능했을지도 모를 일이지만, 그때는 모두가 가난했던 암울한 시대였고 버틸 힘은 열정뿐이었다.”고 소회를 밝힌 바 있다.

 

열악한 상황에서 최선을 다한 최고의 스태프들

<풍운의 궁전>에서는 정창화식 혼합장르가 시도된다. 이 영화는 시대극이지만 로맨스도 궁중 음모도 액션도 있다. 이런 다채로운 장르적 접근은 잘 구성된 시나리오가 뒷받침되고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 시나리오 작가 박노홍(1914∼1982)은 <애수의 소야곡>, <나는 열일곱 살이에요>, <가거라 삼팔선>과 <백마야 울지 마라>의 작사가이기도 하다. 그는 일제 강점기 대중가요 작사가 가운데 현재 확인되는 작품 수가 네 번째로 많은 중요한 작가다. <의사 안중근>, <알뜰한 당신>, <물새야 왜 우느냐> 등 많은 악극 대본도 집필했다. 악극단이 침체기에 접어든 1950년대 말부터는 영화 시나리오를 쓰고 제작을 겸하였다. 이때 그가 쓴 시나리오가 <풍운의 궁전>이다. 1959년 영화인 <밤마다 꿈마다>에서는  감독을 맡기도 했다. 말년에는 한국 대중가요 역사를 정리한 <한국 대중가요사>(1978) <한국가요전집> (1980) <한국가요사> (1980)등 저서를 남기기도 한다.

그 밖에도 ‘열정’으로 영화 제작에 참여한 다른 스태프들도 눈에 들어온다. 이 영화의 궁중 장면에 등장하는 궁중무용의 경우, 모든 무용수들이 물러날 때까지 카메라가 기다리는 배려를 보이는데, 그래서인지 물러나는 동작까지 아름다운 궁중무용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이 예사롭지 않은 궁중무용은 궁중무용의 명인으로, 조선의 마지막 무동이며, 국립국악원 원로사범, 대한민국 예술원 회원인 김천흥(1909~2007)의 ‘김천흥 무용연구소’ 안무였다.

특별 출연한 거인 이순근도 빼 놓을 수 없다. 이순근은 우리나라 역사상 최고, 동양에서는 최대, 세계 3위인 거구였기 때문에 여수 거인, 돌산 거인으로 불렸다고 한다. <풍운의 궁전>에서 그는 진평대감의 옥지기지만 영화 클라이맥스에 옥문을 열어 화피달에 맞선다. 그의 거구 덕분에 마치 킹콩 같은 괴수물을 연상시키는 액션 스펙터클을 보여줄 수 있었다.

세계로 진출한 한류 1호 감독으로 불리는 정창화 감독과 일일이 열거 못한 스태프들의 열정에도 경의를 보낸다.

 

 

글·김 경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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