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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근애의 문화톡톡] 살아있음을 위한 세밀한 죽음들: 〈고스트 댄스 Ghost Dance〉
[양근애의 문화톡톡] 살아있음을 위한 세밀한 죽음들: 〈고스트 댄스 Ghost Dance〉
  • 양근애(문화평론가)
  • 승인 2024.02.05 0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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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은 예술가의 일을 숨김으로써 작품으로 존재해왔다. 훌륭한 예술이라고 일컬어지는 작품은 때로 예술가를 소환하지만, 예술가가 그 결과물을 만들기 위한 과정을 톺아볼 시간은 주어지지 않았다. 예술의 독창성과 재주의 탁월함을 완성하기 위해, 반복된 노력은 때로 스스로 그림자가 되기를 자처했다. 그렇게 가려지고 숨고 충분히 말해지지 않았던 예술가의 ‘일’은 어떤 동력으로 지속성을 얻을 수 있을까.

2023 서울문화재단 청년예술지원사업 선정작〈고스트 댄스 Ghost Dance〉의 전시 포스터는 분주한 움직임을 포착한 어떤 유령 같은 순간을 담고 있다. 춤을 추는 다리(들)이 시간의 흔적을 영혼처럼 매달고 어딘가로 가려 하는 모습이다. 26년째 한국무용을 해 온 작가가 맞닥뜨린 “나는 왜 춤을 추는가”라는 질문으로부터 시작된 이 전시는 기예의 완수로서의 무용이 아니라 ‘멈춤’으로써 비로소 자세히 들여다보게 된, 춤이 존재하는 순간들을 보여준다.

 

'고스트 댄스 Ghost Dance' 포스터 사진
'고스트 댄스 Ghost Dance' 포스터 사진

전시 공간은 세 군데로 이루어졌다. 더 레퍼런스의 입구와 멀지 않은 곳에서 만난 수국은 위태로워 보이지만 의연하게 ‘거듭해 쌓아 올리는 시간’을 보여주었다. 곧이어 안내를 받아 내려간 지하 1층 코스모스가 놓인 자리에서 세 명의 무용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나이도 경력도 다른 무용수들의 경험이 각자의 목소리를 통해 생생하게 전달되었다. 그들은 자신이 처음 춤을 만난 계기와, 춤추는 일이 곧 일상이 된 의미와, 춤추는 순간의 느낌과 춤을 통해 이루고 싶은 욕망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전시 의도에 따르면, 이들이 질문에 답하는 과정 역시 일종의 ‘멈춤’이다. “그것은 누군가에게는 순수하게 춤을 좋아하고 즐겁게 추던 ‘유년 시절 나’의 사라짐으로, 또 누군가에게는 타인의 시선에 몸의 특정 부분이 굳어버려 죽은 반응을 보이는 ‘몸의 부분적 잠김’으로 나타난다.”

이 멈춤은 일종의 죽음으로 죽음을 응시하는 ‘나’를 경유한다. 그럼으로써 죽음을 통과한 생성을 시도한다. 세대는 다 다르지만 춤에 재능을 나타낸 어린 시절의 기쁨으로부터 춤과 인생을 떼려야 뗄 수 없어진 지금까지, 그들이 춤을 통해 살아있음을 인식하고 있다는 사실만은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춤을 추면서 무념무상의 상태에 이르고 동시에 춤을 추는 나를 의식하고 인지한다는 이야기 속에서, 무용뿐만 아니라 대개의 예술이 행위 자체에 집중하고 기예를 연마하는 훈련의 시간을 지나 자신의 행위를 자각하는 순간 본질에 대한 질문에 직면하게 됨을 확인할 수 있었다.

세 번째로 도착한 곳에서 모서리를 가로지르는 두 개의 영상을 보면서 비로소 <고스트 댄스 Ghost Dance>가 춤을 추는 순간의 생생한 살아있음을 위해 반복되는 미세한 죽음을 세밀하게 보여주고자 했음을 감지할 수 있었다. 두 개의 영상에는 한국무용의 기본 동작을 하는 두 사람이 등장한다. 영상에서 한 명 또는 두 명의 무용수는 이른바 ‘국립기본’이라 불리는 춤을 계속 반복한다. 이 반복은 들뢰즈가 말한 것처럼 차이를 생산하는 반복이다. 들뢰즈식으로 말하면 춤의 동작 또는 무용의 안무는 미분화를 통해 고유한 차이를 만들고 하나의 춤은 반복됨으로써 차이가 있는 고유성을 드러낸다. 리허설(rehearsal)의 어원이 반복하다(rehearse)라는 프랑스어에서 유래했다는 사실은 우연이 아니다. 반복되는 춤은 수행하는 무용수에게도 매번 다르게 인식되고 춤을 보는 사람에게도 매번 다른 방식으로 나타난다. 영상 속의 무용수는 아무 표정 없이 기계적으로 같은 동작을 반복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것은 다른 춤을 위한 지금 춤의 죽음을 치르는 장사(葬事)의 의식(Ritual)이다. 따라서 제목에서 지시하는 유령은 무용수가 아니라 춤 그 자체다. 춤은 동작이 행해지는 순간 죽는다. 그리고 다른 동작이 태어나고 다시 죽는다. 무수한 반복이 일어나고 차이가 발생한다. 유령처럼 사라졌다가 유령처럼 흔적을 남기는 춤을 향해 무용수의 일상이 바쳐진다.

 

'고스트 댄스 Ghost Dance' ⓒ이정우
'고스트 댄스 Ghost Dance' ⓒ이정우

무대를 위해 완성된 춤을 추는 조진호를 본 적은 없다. 그러나 그가 지금 무대를 향한, 더 이상 차이를 만들어내기 역부족인 리허설을 멈추고 다만 춤을 위한 춤을 성실하게 반복하고 있는 이유를 알 것 같다. 그는 어쩌면 더 이상 차이를 발생하지 않는 춤을 멈추고 다른 고유한 길을 가려고 하는 것이 아닐까. 그 길은 춤을 배반하는 일이 아니라 춤을 통해서만 가능한 길이다. 춤은 매일의 세밀한 죽음들을 통과하며 무용수의 몸에 새겨져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점검해 보자. “나는 왜 춤을 추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응답은 춤을 처음 만난 순간, 그러니까 소위 말하는 ‘초심’에서 찾을 수 있는 성질의 일이 아니다. 언제나 제로에서 다시 시작하는 부담을 안고 있는 예술적 성취란 초심의 상태에 잠정적으로 붙들려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어쩌면 질문을 재구성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 질문은 이런 회로 끝에 구성될 것이다. 그럴듯한 답을 구하기를 멈추고 ‘알 수 없음’의 상태를 승인하는 것, 무지의 상태를 무(無)와 지(知)로 미분하여 모름을 알고 없음을 기억하는 것, 그리고 그 미분 끝에 얻은 것을 자신의 증명을 위해 바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유동적이며 일회적이기까지 한 마주침들에 맡기는 것, 마침내 유령의 차원에 도달하는 것.

<고스트 댄스 Ghost Dance>가 끊임없는 자기생산에 놓인 예술가들의 상징적 죽음, 혹은 예술가의 경쟁적 자기생산을 멈추는 죽음을 암시하고자 했을지라도, 이미 몸에 익숙하게 달라붙은 춤사위를 환희도 슬픔도 없이 그저 정직하게 해내는 무용수들을 통해 발견한 것은 ‘살아있음’의 순간들이었다. 그러니 이 전시가 가리키는 죽음이, 살아있음을 위한 세밀한 죽음들이라고 한 번 더 말해보자. 오늘도 어제도 내일도 결과물을 향하지 않는 과정으로서의 춤, 구성 중인 춤이 계속될 것이기 때문이다.

 

'고스트 댄스 Ghost Dance' ⓒ이정우
'고스트 댄스 Ghost Dance' ⓒ이정우

영상이 끝나고 다시 코스모스를 지나 수국에 다다랐다. 멈춤과 죽음과 살아있음을 위한 의식에 빠질 수 없는 것이 바로 꽃이라는 생각이 그제야 들었다. 외로워 보이고 위태로워 보이는 꽃, 꽃들이 이 전시를 든든하게 받치고 있었다. 예술은 이 외로움과 위태로움을 거듭 쌓아 올린 시간을 통해 개화한다.

가을꽃으로 알려진 수국과 코스모스는 실은 초여름에 피는 꽃이다. 가을을 대표하는 꽃들은 사람들의 주목을 받기 전 한 계절을 앞서 개화한다. 더 오래전에는 씨앗이 죽고 잎이 죽었고 열매도 죽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죽음 끝에 핀 꽃을 보았다.

 

 

글‧양근애
명지대 문창예창작학과 교수. 공연예술을 비롯하여 영화, 드라마 등 극 장르에 관한 글을 쓴다. 평론집으로 『‘이후’의 연극, 달라진 세계』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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