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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진의 시네마 크리티크] 영화 속 시간의 활용, 그리고 <듄:파트 2>
[김윤진의 시네마 크리티크] 영화 속 시간의 활용, 그리고 <듄:파트 2>
  • 김윤진(영화평론가)
  • 승인 2024.03.25 0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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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젠가부터 영화에서는 시간을 활용하는 전략이 전면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러한 전략의 대표적인 사례는 시간여행을 소재로 삼는 것으로, 이들 영화는 대체로 주인공이 현재를 기점으로 하여 과거로 이동하거나 미래로 건너가는 것을 골자로 한다. 이 경우, 관객들은 인물을 따라 시간을 오가며 시제가 전환되는 경험을 하게 된다. 시간여행을 다루는 영화의 대표적인 사례는 <백 투 더 퓨처> 시리즈로, 1985년에 미국에서 개봉한 <백 투 더 퓨처>(한국에서는 1987년에 개봉함)는 1989년에 <백 투 더 퓨처2>와 1990년에 <백 투 더 퓨처3>로 이어지며 시간여행에 대한 대중적인 관심을 불러일으킨다. 이후, 영화가 시간을 활용하는 전략은 점차 진화되어, 1990년대를 지나 2000년대에 이르면 장르를 불문하고 다양한 양상으로 나타나게 된다. 단순히 과거나 미래로 이동하는 것뿐만 아니라, 특정한 시간대가 반복되거나 시간의 흐름이 역전되는 등의 방식으로 말이다. 2000년대를 지나 2010년대에 접어들면서 이러한 전략은 시간의 흐름이 정체된 듯한 또는 시간의 흐름을 초월한 듯한 무(無)시간적 세계를 배경으로 삼거나, 과거나 미래가 아니라 어딘가에 존재하는 또 다른 현재를 가정하는 등의 양상으로 변화하게 된다.

 영화가 시간을 활용하는 전략은 ‘지속되는’ 존재로서 자신의 내부에 시간의 흐름을 갖는 영화의 속성을 고려할 때 특히 의미심장하다. 필자는 앞선 글에서 영화가 영화관을 벗어남에 따라 영화를 보는 경험이 근본적으로 변화했다고 분석하였다.1 영화가 영화관에서 TV를 지나 OTT로 이동함에 따라 영화를 보는 경험이 더 이상 시제의 전환을 동반하지 않게 되었다고 말이다. 이러한 점에서, (외부가 아니라) 자신의 내부에서 시간의 교차 혹은 배치를 통해 시제의 전환을 경험케 하려는 영화의 시도는 그것을 둘러싼 환경의 변화와 무관하지 않은 듯 보인다. 그렇다면, 이를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지 않을까? 과거에 (어떤 영화를 보든 간에) 영화관에서 영화를 보는 경험만으로 시제의 전환을 담보했다면, 이제는 개별 영화들이 시간의 배치를 활용함으로써 자신을 통해서 시제의 전환을 경험하도록 만들기에 이른 것이라고 말이다. 즉, 자신을 둘러싼 ‘외부’적 조건이 더 이상 시제가 전환되는 경험을 담보하지 못하게 되면서 영화가 ‘내부’의 장치로 눈길을 돌리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변화는 변화한 환경 속에서 자신의 (보이지 않는 몸인) 지속을 위협받게 된 데에 대한 영화 나름의 대응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어쨌거나, 영화는 (끝날 때까지) 지속되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인물이 이동하거나, 시제가 전환되거나

 본 고에서는 이러한 인식을 바탕으로 하여 영화가 시간을 활용하는 방식에 대하여 이어지는 글을 통해서 차례로 살펴보고자 한다. 본격적인 논의에 앞서, 시간을 교차하는 것, 즉 시간여행을 통해 서로 다른 시간대를 오가는 경험과 시제가 전환되는 경험이 서로 같지 않다는 사실을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즉, 영화 속 인물들이 서로 다른 시간대를 오가는 것은 대부분 시제가 전환되는 경험을 수반하지만, 반드시 언제나 그렇다고는 할 수 없다. 영화가 시간여행을 다루는 것만으로는 관객에게 시제가 전환되는 경험을 보장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마찬가지로, 어떤 영화에서는 서로 다른 시간대를 교차시키지 않으면서도 관객들이 시제가 전환되는 듯한 인상을 느끼게 할 수 있다. 아마도 이러한 지점이야말로 흥미롭게 느껴지는 동시에 난해하다고도 여겨질 수 있는 지점일 것이다.

 먼저, 서로 다른 시간대를 오가는 영화의 경우를 살펴보자. 이러한 영화에서는 인물들이 직접 이동한다는 것이 특징적인 지점으로, 이들의 움직임이 비교적 분명하게 제시될 뿐만 아니라 그에 대한 인물들의 명확한 인식이 전제된다. 즉, 인물들은 자신이 시간을 거슬러 이동한(했)다는 것에 대하여 분명히 인지하고 있다. 인물들이 시간을 거슬러 이동하기 위해서 중요한 것은 그것을 가능케 할만한 특정한 장치를 발명(또는 발견)하거나, 특별한 능력을 얻거나 깨닫는 일이다. 전자의 경우에는 장치를 타고, 장치와 함께, 장치를 통해서 다른 시간대로 건너가는 인물들의 이동이 비교적 분명하게 ―즉, 시각적으로― 제시된다. 후자의 경우에는 인물의 이동이 직접 제시되기보다는 간접적으로 나타나는데, 주로 인물의 옷차림이나 주변 인물과 상황 등의 변화를 통해서 암시되는 식이다. 그럼에도 이 경우는 인물이 자신의 이동에 대하여 비교적 분명히 인지하고 있으며(목적지라기보다는 움직임 그 자체에 대하여), 따라서 관객 또한 그들이 이동했다는 사실을 (어디로인지는 모르더라도) 알게 된다.

 이러한 영화에서 인물들은 분명한 ‘인지’2 하에 시간대를 오간다. 자신이 이동했다는 사실을 영화 속 인물이 ‘아는’ 것은 중요한데, 왜냐하면 이를 통해 관객들이 시제가 전환되는 듯한 인상을 받게 되기 때문이다. 즉, 시간여행을 다루는 영화에서 시제의 전환은 인물들의 시간을 거스르는 이동에 의해서라기보다, 그러한 이동에 따라 이루어지는 현재에 대한 그들의 인식의 변화를 통해서 경험된다. ‘지금(now)’을 의미하는 현재는 고정된 것이 아니며 그것은 어디까지나 현재를 인식하는 주체의 시간적 위치에 달려 있다는 사실을 떠올려 보라. 인물의 현재로 주어졌던 시간대는 그들이 다른 시간대로 이동함에 따라 더 이상 현재가 아니게 된다―그것은 과거나 미래가 된다. 관객들은 영화 속 인물들의 시간여행을 따라가며 현재를 과거 또는 미래로 경험하게 되고, 이를 통해 현재‘인(is)’ 시간대가 현재‘였던(was)’ 시간대로 전환되는 경험을 하게 되는 것이다. 이때, 시제의 전환이 수반되기 위해서 물리적인 이동보다 중요한 지점은 바로 변화된 현재에 대한 인물의 인식 변화로, 그에게 ‘과거가 된 현재’는 동시에 ‘지금은(현재엔) 과거이지만 예전에는(과거에는) 현재였던’ 때이기도 하다. 즉, 시간여행을 다루는 영화에서 시간을 거스르는 이동보다 중요한 것은, 그러한 이동을 통해 인물의 현재가 계속해서 변화함에 따라 변화한 현재가 최초의 현재와의 관련 속에서 계속해서 재고되어야 한다는 점에 있다.

 한편, 시간여행을 다루지 않고서도 시제가 전환되는 경험이 가능한 영화의 경우를 살펴보자. 인물들이 시간을 거슬러 이동하지 않는데도 시제가 전환되는 경험이 가능한 것은, 그들이 시간을 거슬러 이동한 것이 아니라 그들을 둘러싼 시간대가 전환된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영화의 인물들은 ―관객들도 마찬가지로― 자신이 이동했다는 사실을 즉각 인지하지 못하고, 뒤늦게서야 변화된 상황을 마주하거나 자신이 낯선 ‘때’에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따라서 그들은 대체로 당황하거나 충격에 빠지는데, 이때의 충격은 자신이 이동한 ‘때’가 어디인지 몰라서라기보다는 그것을 ‘알게’ 되면서 배가된다. 그가 스스로 이동한 적 없는데 이동된 것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하기 때문이다. 즉, 이러한 영화에서 이동은 ‘여기(이때)’에서 ‘저기(저 때)’로 이동한다는 명백한 인지 없이(관객의 인식도, 인물의 인식도), 그러한 이동이 제시된 장면도 없이, ‘여기’에 있었던 그들이 어느새 ‘저기’에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아차리는 식으로 나타난다. 따라서 여기에서도 중요한 것은 변화된 현재에 대한 인물의 인식이다. 정확히 말하면, 현재가 변화했다는 사실에 대한 인물의 인식이다.

 비교적 최근의 영화에서 활용되는 또 다른 전략은 인물의 인식에 직접적으로 관련된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그것은 ‘기억’이나 ‘예지’를 통해서 과거나 미래에 접근하는 것으로, 이는 인물이 실제로 시간을 거슬러 이동하지 않고서도 마치 서로 다른 시간대를 자유로이 오가는 듯한 인상을 준다. 기억이 과거에 대한 ‘앎’이며 예지는 미래에 대한 ‘앎’이라는 점을 고려할 때, 영화 속 인물이 기억이나 예지를 통해서 현재를 초월하는 것은 시간여행과 무관한 영화가 효과적으로 시제 전환의 감각을 성취하도록 하는 지점이 된다. 이처럼 영화에서 서로 다른 시간대와 관계 맺는 방식이 실제로 그것들 사이를 오가는 인물의 물리적이고 실제적인 이동에 의해서가 아니라 서로 다른 시간대에 대한 인물의 인식을 통해서 이루어진다는 지점은 중요하다. 왜냐하면 (필자가 앞선 글에서 관찰했듯이) 영화관에서 영화 보는 경험이 담보했었던 시제가 전환되는 경험은, 이동에 의해서가 아니라 인식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문제는 시간(time)이 아니라 시제(tense)다.

 

*여기서부터 <듄:파트 2>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시간의) 이동 없이 (시제가) 전환되는 영화, <듄:파트 2>

 이러한 지점에서 지난달 개봉한 드니 빌뇌브 감독의 탁월한 작품인 <듄:파트 2>에 대하여 언급하지 않고 넘어갈 수 없는데, 여기에서는 시간을 이동하지 않고도 시제가 전환되는 효과가 특히 두드러지게 활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영화를 전반적으로 살펴보는 것은 다음으로 미뤄두고, 여기에서는 전환의 감각과 관련된 몇 가지 지점만 짚고 넘어갈 것이다) 본격적인 논의에 앞서 한 가지 분명하게 언급해야 할 사항은 <듄:파트 2>는 시간여행에 관련된 이야기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먼 미래라는 명백한 시기, 즉 2024년인 현재로부터 8000년도 더 지난 10191년을 배경으로 삼고 있는 이 영화는, 행성(과 그곳의 자원)을 둘러싼 패권 다툼을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시간이라기보다는 오히려(그리고 여전히) 공간을 화두로 삼고 있는 듯하다. 영화가 1965년에 출간된 프랭크 허버트의 소설을 원작으로 삼는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는 아마도 그리 놀라운 지점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영화 <듄:파트 2>는 관객에게 어딘가 시간이 교차하는 듯한 인상을 주는데, 정확하게 말하자면 관객들에게 (서로 다른 시간대를 오가는 경험이 아니라) 시제가 전환되는 듯한 경험을 하게 한다. 그것도 수시로 말이다. 이러한 지점이야말로 2024년의 관객들이 반세기도 더 지난 이야기를 통해서 압도적인 ‘영화적’ 경험을 할 수 있는 지점이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그림 1. 영화 '듄2'의 스틸컷. (사진 출처: 네이버 영화)
그림 1. 영화 '듄:파트 2'의 스틸컷 (사진 출처: 네이버 영화)

 이러한 시제 전환의 효과는 인물들의 ‘앎’을 통해서 이루어지는데, 아트레이데스 가문의 후계자인 폴(티모시 샬라메 분)의 초월적 능력이 강조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지점에서이다. 꿈을 통해 미래를 미리 ‘아는’ 능력을 갖추고 태어난 폴은 <듄:파트 2>에서 생명의 물을 마신 뒤 과거를 돌이켜 ‘아는’ 능력을 갖추게 된다. 그리하여 그는 미래와 과거에 대한 ‘앎’을 통해서 그 자신의 존재론적 지위를 구축한다. 미래와 과거를 초월하는 그의 신적인 정체성을 말이다. 사막의 방식과 프레멘 족의 언어를 이미 아는 폴의 모습은, 그리고 자신을 적대하는 낯선 이의 과거를 술술 읊는 그의 모습은, 심지어 ‘듄’이라는 이름이 붙여진 행성의 시작을 아는 그의 모습은 그야말로 도래 순간이 도래, 즉 미래가 현재로 실현된 증거나 다름없다. 도래하지 않은 미래를 ‘볼/알’ 뿐만 아니라 자신이 태어나기도 전의 과거를 ‘보는/아는’ 폴의 모습은 그야말로 미래와 과거를 자유롭게 오가는 듯한 인상을 주고, 시간여행과 무관한 이 영화가 마치 서로 다른 시간대를 오가는 듯한 착각을 유발하는 지점이 된다. 따라서 폴의 능력이 서로 다른 시간대를 실제로 오가는 ‘이동’에 관련된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시간대에서 벌어‘진/질’ 사건에 대한 ‘앎’과 관련되어 있다는 점은 중요하다. 이는 단지 영화의 내러티브를 위해서만 그러한 것이 아니라 이 영화의 ‘압도적'인 경험을 만들어 내는 근본적인 지점으로 작용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이는 <듄:파트 2>의 골조를 이루는 이야기, 즉 폴이 프레멘 족의 일원이 되고 나아가 그들의 인정과 추앙을 얻게 되는 지점에서도 핵심적으로 작용한다. 폴과 그의 어머니 제시카(레베카 퍼거슨 분)는 그 자체로 시제 전환의 감각이 구현된 존재로서, 프레멘 사람들에게 두 모자는 정확하게 예언의 실현으로써 간주 된다. 즉, 그와 그의 어머니는 그 자체로 ‘도래할 미래’의 ‘현재의 실현’으로 여겨진다. 폴에게서 징후를 보았다던 스틸가(하비에르 바르뎀 분)에게, 그를 메시아라고 여기는 프레멘 사람들에게 말이다. 영화는 폴이 ‘리산 알 가입’이라는 것이 드러나는 순간에 프레멘 사람들의 모습을, 즉 도래할 미래가 도래한 현재를 마주하는 순간에 그들의 놀라움과 충격을 놓치지 않고 담아낸다. 그러나 이는 비단 프레멘 족에만 그러한 것이 아니며, 무엇보다 관객에게도 그러하다는 점이 영화의 탁월한 지점이 된다. 즉, 폴이 스스로 ‘무앗딥’이라는 이름을 택하는 순간(‘무앗딥’을 빠르게 여러 차례 발음해 보라. 아마도 이는 분명히 의도된 것일 테다), 그가 어느 때보다 거대한 크기의 샤이 훌루드와 하나가 되기에 성공하는 순간(이 장면은 정확하게 ‘이미 새겨져 있던’ 같은 형상의 동굴 벽화로 이어진다), 그리고 그가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여 ‘The One’이 되기에 이르는 순간, 미래가 현재로 전환되는 순간을 마주하는 것은 어느새 관객의 몫이 된다. 미래가 현재로 펼쳐지는 순간을 목격하며 현재를 미래의 실현으로 재발견하는 것은 영화 속 그들의 경험일 뿐만 아니라 영화 밖 우리의 경험이기도 한 것이다. 그리하여 “말씀대로”라 읊조리는 스틸가의 벅차오른 눈동자는, 폴을 향해 무릎 꿇고 ‘리산 알 가입’이라 연호하는 프레멘 사람들의 경탄 어린 목소리는 어느새 영화를 보는 관객의 그것으로 치환되기에 이른다.

 

그림 2. 영화 '듄2'의 스틸컷 (사진 출처: 네이버 영화)
그림 2. 영화 '듄:파트 2'의 스틸컷 (사진 출처: 네이버 영화)

 특히 폴이 샤이 훌루드를 타는 장면에서 숏의 배치는 대단히 인상적이다. 이는 영국의 비평가 마크 피셔의 논의를 떠올리게 하는데, 피셔는 미국의 SF 소설가 러브크래프트의 문학에 대하여 논하면서 다음과 같은 묘사를 한 바 있다: “러브크래프트는 새로운 것을 ‘시간을 거슬러 과거에 묻어둠’으로써 그의 기이한 소설들을 '시간의 밖’에 위치시켰다. 마치 그의 소설 「시간의 그림자」에서 주인공인 피슬리가 유적지 가운데서 자신의 필체로 적힌 텍스트를 접하는 것처럼.”3 그가 인용한 러브크래프트의 소설 속 장면, 즉 주인공이 유적에서 자신의 필체를 발견하는 일은 <듄:파트 2>에서 프레멘 족에 의해 오랫동안 보존되어 온 동굴 속 벽화에서 거대한 샤이 훌루드를 타는 데에 성공한 폴의 모습을 발견하는 일과 정확하게 겹친다. 그러나 위의 인용에서와는 다르게 영화에서 이것을 발견하는 일은 관객의 몫이 되는데, 영화는 정확하게 그것의 목격자 자리에 관객을 위치시킴으로써 연출의 탁월함을 배가한다. 두 숏을 연이어 배치하는 것만으로 말이다. 사막의 모래 언덕을 가로지르며 폴이 샤이 훌루드를 타기에 성공하는 장면은 정확하게 같은 형상의 동굴 속 벽화로 이어지고, 이를 목격하는 시점은 폴도, 프레멘 사람들도 아니다. 이제 막 성공한 폴의 모습에서 동굴의 벽화로 이어지는 시선의 주인공은 정확하게 관객인 ‘우리’다. 즉, 영화는 연이은 숏의 배치만으로 미래가 현재로 실현되는 바로 그 전환의 순간을 목격하는 목격자의 자리에 관객을 위치시키는 것이다.

 그리하여 <듄:파트 2>에서 관객들은 인물들을 통해서 시제 전환을 경험할 뿐만 아니라 시제가 전환되는 순간을 마주하는 목격자로서도 그것을 경험한다. 시선의 주체인 보는 자의 위치 전환을 통해서 말이다. 영화에서 이러한 전환은 한두 번으로 그치지 않는다. 이를테면, 폴이 챠니(젠데이아 콜먼 분)의 피부가 벗겨진 꿈을 꾸는 장면이 그렇다. 먼저, 그는 꿈속에서 앞으로 펼쳐질 미래를 본다. 그는 모래 언덕 위에 서 있는 그녀를 보고, 피부가 벗겨져 쓰러진 그녀를 본다. 이윽고 꿈에서 깨어난 그는 자신이 봤던 꿈속의 미래로 인해서 불안을 느끼고, 폭격 소리에 텐트 밖으로 나와 황급히 그녀를 찾는다. 현재의 그녀는 그가 봤던 미래와 정확히 같은 모습으로 언덕 위에 서 있다. 즉, 그가 꿈에서 봤던 펼쳐질 미래의 순간은 현재가 되어 그의 눈앞에서 실현되고(관객에게는 재현되고) 있는바, 그는 (조금 전) 자신이 볼 것을 봤고 (이제는) 이미 봤던 것을 지금 보는 것이다. 또 다른 전환의 순간은 폴이 생명의 물을 마시고 난 뒤의 장면이다. 생명의 물을 마시고 과거와 미래를 모두 보게 된, 그리하여 거기에서 자신이 나아갈 좁은 길을 봤다던 폴은, 이어지는 장면에서 실제로 수많은 사람 사이를 뚫고 비좁은 길을 만들며 앞으로 나아간다. 자신이 나아갈 좁은 길을 본 것은 폴의 시점이지만, 이어지는 장면에서 실제로 그가 좁은 길을 따라 나아가는 것을 보는 것은 정확하게 관객의 시점이다. 영화는 인파를 헤치고 폴이 만들어 내는 비좁은 길을, 그리고 비좁은 길을 따라 나아가는 폴의 모습을 목격하는 시선에 관객의 시선을 일치시킨다. 따라서 관객들은 조금 전에 폴이 ‘보았다는’ 바로 그 길을 이제 두 눈으로 직접 ‘보고 있는’ 것이 된다.

 

그림 3. 영화 '듄2'의 스틸컷 (사진 출처: 네이버 영화)
그림 3. 영화 '듄:파트 2'의 스틸컷 (사진 출처: 네이버 영화)

 전환이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또 다른 지점은 역시 ‘앎’과 관련되어 있다. 이는 사막이라는 지형과 그곳의 특성을 십분 활용한 감독의 연출력이 빛을 발하는 지점으로, 감독은 모래를 이용해 영화를 보는 관객들의 ‘앎’이 극적으로 전환되는 경험을 만들어 낸다. 먼저, 경사면을 이용한 연출이 그것이다. 황제의 군대를 맞이하는 후반부의 장면에서, 단지 카메라를 아래에서 위로 약간 움직이는 것만으로 관객은 경사진 모래 언덕 위에 홀로 서 있던 폴의 모습이, 사실은 그를 따르는 수많은 이들의 선두에 서 있는 것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러한 인지 전환의 감각은 프레멘 족의 특유한 공격방식에서도 여지없이 강조되는데, 그들은 쉽게 흩날리는 모래의 특성을 이용해 몸을 숨긴다. 모래 언덕 밑에서 갑자기 바닥을 뚫고 솟아올라 등장하거나, 자욱한 모래 폭풍 속에 몸을 숨긴 채 보이지 않던 상태에서 갑자기 나타나 적을 공격하는 식이다. 특히, 황제의 군대를 공격하는 후반부의 장면에서 이러한 인지 전환의 감각이 주는 쾌감은 극에 달한다. 모래 폭풍을 일으키며 샤이 훌루드를 타고 나타나는 장면이 주는 놀라움은, 샤이 훌루드의 가히 압도적이라 할 정도로 거대한 규모나 빠른 속도감에, 또는 그것의 소름 끼치는 외양에 있는 것이라기보다는, 그것이 등장한 순간에 경험되는 바로 그 전환의 감각에 있을 것이다. 정확하게 말하면, 그들은 모래 폭풍을 일으키며 나타나기보다는, 모래 폭풍이 먼저 도착하고 난 뒤에야 비로소 모습을 드러낸다. 즉, 이를 보는 관객의 경험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없었는데요, 있었습니다.”

 없는 줄로만 알았던 이들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은 정확하게 앎이 순식간에 전환되는 경험이다. 도래‘(will be)’ 것이 도래‘(is)’ 것으로 경험되는 시제 전환의 감각 못지않게, 없었던 것이 있었던 것으로 드러나는 인지 전환의 감각은 관객들에게 강렬한 영화적 경험을 가능케 하는 지점으로 기능한다. 이처럼 <듄:파트 2>는 수시로 이루어지는 전환의 경험을 통해 관객들을 사로잡는다. 따라서 이 영화가 반세기도 더 지난 이야기를 바탕으로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2024년이라는 ‘현재에’ 우리에게 강렬하게 경험되고 있는 지점은, 특히나 그것이 압도적이라 할 만한 ‘영화적’ 경험으로 콕 집어 언급되는 지점은, 그것이 관객에게 가능케 하는 연쇄적인 전환의 경험에, 그러한 경험이 주는 동시대적인 감각에 있는 것이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조금 더 자세히 살펴보자. 먼저, 연쇄적인 전환의 감각은 2024년의 관객들에게 새로운 것이 아니다. 그것은 사실상 내용 없는 짧은 길이의 영상을 의미 없이 바꿔가며 재생하는 오늘날 관객의 시청 습관, 즉 엄지손가락의 가벼운 움직임만으로 ‘숏폼’ 콘텐츠를 연속으로 전환하는 동시대의 가장 널리 퍼진 영상 수용 방식을 떠올리게 한다. 이러한 ‘엄지의 움직임(thumb’s moving)’에서 중요한 것은 개별 영상의 내용이 아니라 그것이 수시로 바뀌는 과정에서 경험되는 바로 그 전환의 감각에 있는바, 이는 하나의 내용이 계속해서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끝이 다음의 시작으로 전환되는 사건의 연쇄적인 발발만을 향하는 열망이나 다름없다.

 또한, ‘A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B인’ 구조가 주는 전환의 감각은 영화사에서 새로운 것이 아니다. 그것은 앨프리드 히치콕 감독의 기념비적인 작품 <싸이코>(1962) 이후로 수많은 영화에서 줄곧 활용되어 온 전략으로, 지속되는 것으로서 시간의 흐름을 가지는 영화가 자신을 향한 관객의 보기를 지속시키기 위하여 취해온 전략이기도 하다. 초반부에 여러 군데 ‘떡밥’을 뿌리고, 후반부에 그것을 적절하게 ‘회수’함으로써 견고한 짜임새를 구축하는 것은, 또는 예상하지 못했던 지점들이 나중에 가서야 복선인 것으로 드러나는 구조를 정교하게 설계하는 것은, 오늘날 영화가 관객의 시선을 사로잡기 위해 사용해 온 주요한 전략이기도 하다. 여전히 수많은 영화가 그토록 ‘스포일러’에 민감하다는 사실이 드러내듯, ‘반전’은 영화가 오랜 기간 애용해 왔던, 여전히 애용하고 있는 장치인 셈이다. 그렇다면 영화는 왜 그리도 전환의 감각에 몰두하는 것일까?

 

지각의 자동화가 이루어‘졌던, 지는, 질’ 장소로서의 영화

 이러한 의문은 카이저 파노라마라는 전 영화적 장치의 작동 원리를 떠올려 보는 것으로 어느 정도 해소될 수 있을 것이다. 미술사학자 조너선 크래리의 설명에 따르면, 카이저 파노라마의 “장치 내부에는 모터가 장착되어 슬라이드는 대략 2분 간격으로 회전하며 한 관람객에게서 다른 관람객에게로 이동했다. 슬라이드가 바뀔 무렵이 되면 벨이 울렸다. 따라서 소비자가 원한다면 관람 체험은 [총 25개의 슬라이드가 있고 각각의 슬라이드에 2분씩 할애되므로] 최대 50분까지 지속될 수 있었다.”4 이러한 설명을 통해 우리는 카이저 파노라마를 보는 관람객의 경험이 문자 그대로 하나의 이미지(슬라이드)에서 다음의 이미지로 ‘전환’되는 경험이었다는 것을, 그것도 단 1회의 전환이 아니라 계속해서 반복되는 연쇄적인 전환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따라서 이러한 전환의 연쇄가 주는 감각이야말로 영화 보는 경험의 근본적이고 핵심적인 지점의 하나라 할 수 있을 테다.

 사실, 오늘날 관객들이 보는 것처럼 매끄러운 장면의 이어짐은 영화에서 그리 오래된 것이 아니다. 영화가 편집의 예술이라 언급되는 점을 고려할 때, 우리는 장면들이 연속해서 이어지는 매끄러움의 감각이라기보다는 하나를 보자마자 다음으로 넘어가는 전환의 감각이야말로 영화 예술에 있어 핵심적인 지점임을 깨닫게 된다. 즉, ‘하나의 전체’가 계속해서 연속하는 데에서 기인하는 감각이라기보다는 ‘하나에서 다음으로’ 넘어가는 바로 그 전환에서 유발되는 감각이야말로 우리가 계속해서 영화에 사로잡히는 이유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 이러한 전환의 감각은 일찍이 발터 벤야민이 영화에 대한 수요가 일어나게 된 주요한 원인으로 언급한 것이기도 하다. 벤야민에 따르면, “영화의 정신 분산적 요소”는 “장면이나 화면의 빠른 전환에 기초를 두고 있으며, 이는 관객을 향해 간헐적으로 엄습해” 옴으로써 관객들이 자기만의 연상작용에 몰두하는 것을 방해한다.5 바로 여기에 “영화의 쇼크효과”가 있으며, 이를 통해 영화는 앞선 예술적 시도를―즉, 다다이즘을― 발판 삼아 비로소 자신이 도래할 바로 그 시기를 향해서 도약할 수 있었던 것이다.6

 크래리는 카이저 파노라마에 대하여 “외면적으로 변이를 도입하면서 동시에 기계적으로 주의를 지속시키는 여러 시각적 장치 가운데 하나”라고 설명한다.7 이어서 그는 “[이질적인 것들의] 종합을 강제하는 지각의 자동화가 일어나는 여러 장소들 가운데 하나”라는 점에서 카이저 파노라마를 포함한 (전) 영화적 장치들이 있었던 1880년대~1890년대와 동시대를 같은 선상에 위치시킨다.8 그의 분석처럼, 100년이 넘는 시차를 뛰어넘고도 여전히 건재한 자동화의 기계적 장치들에 여전히 우리가 사로잡혀 있다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다만, 이러한 장치들이 제공하는 전환의 방식이 다소 변화했다는 지점은 주목할 만한데, 그것은 외관상 서로 다른 이미지들 사이에서 이루어지던 전환이, 앞선 것과 다음 것이 자아내는 특유한 연관과 그러한 배치가 유발하는 인식들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전환으로 변화했다는 것이다. 간단히 말해서, 오늘날 우리는 단지 시각적 전환에 사로잡히는 것이 아니라 인지적 전환에 매혹당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듄:파트 2>의 영화적 탁월함은 무엇보다 영화가 제공하는 연쇄적인 전환의 경험에, 그리고 무엇보다 그것이 외양의 전환이 아니라 인식의 전환을 유발한다는 데에 있을 것이다. 시간여행을 다루고 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시간을 초월하여 과거와 미래를 오가는 듯한 인상을 주는 것은 인물들의 물리적인 이동에 의해서가 아니라 과거에 있었던, 그리고 미래에 있을 사건에 대한 그들의 기억이나 예지, 즉 ‘앎’에 의해서이다. “기억을 물려받는” 다는 것이 곧 “수백 만년에 걸친 고통과 슬픔을 알게 되는” 것이라는 사실이 의미하듯, 과거에 대하여 아는 것은 단지 그것을 독립적이고 객관적인 하나의 사건으로만 알게 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마치 거기에 있었던 것처럼, 또는 거기에 있을 것처럼 그것을 아는(겪는) 것으로, 이는 그것과 연관된 모든 관계 속에서만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듄:파트 2>의 탁월함을 이루는 것으로 사운드에 대해서도 언급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무엇보다 언급할 필요가 있는 것은, 이 영화의 음악은 관객에게 ‘들리는 소리’로써가 아니라 ‘울리는 진동’으로써 경험된다는 점이다. 이는 ‘귀’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상영관 안에서의 현존, 즉 ‘신체의 거기 있음’을 통해서 경험되는 것이다. 폴과 제시카의 보는(see) 능력이 ‘눈’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듯 말이다. 미래와 과거를 봄으로써 그것을 아는 그들의 능력은 겉으로 드러난 외양을 목격함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마치 ‘그때, 거기’에 ‘존재 것처럼/존재했던 것처럼’ 이루어지는바 그것은 ‘미래에 있을/과거에 있던’ 사건과의 관련 속에서만 비로소 가능한 것이 된다. 상영관 안에서 영화를 보는 관객의 경험 또한 이와 마찬가지다. 따라서 <듄:파트 2>를 영화관에서 경험해야만 하는 이유에 대해서 필자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이 영화는 눈으로 (스크린을) 보는, 귀로 (사운드를) 듣는 영화가 아니라 ‘신체의 거기 있음’, 즉 상영관 안에서의 현존을 통해서만 경험‘할/될’ 수 있는 영화라고 말이다.

 

1) 「[김윤진의 시네마 크리티크] '보이지 않는 몸'으로서 영화의 지속에 대하여 –1부-」「[김윤진의 시네마 크리티크] '보이지 않는 몸'으로서 영화의 지속에 대하여 –2부-」

2) 필자는 이 글에서 ‘인식하다,’ ‘인지하다,’ ‘알다(안다)’를, 그리고 ‘인식,’ ‘인지,’ ‘앎’을 구분하지 않고 같은 의미로 사용한다. ‘인식’과 ‘인지’는 모두 “자극을 받아들이고, 저장하고, 인출하는 일련의 정신 과정”이라는 의미를 공유하며, “지각, 기억, 상상, 개념, 판단, 추리를 포함하여 무엇을 안다는 것을 나타내는 포괄적인 용어로” 사용된다.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에서 검색.

3) 마크 피셔, 『기이한 것과 으스스한 것』, 안현주 옮김, 구픽, 2019, p.32.

4) 조너선 크래리, 『지각의 정지: 주의, 스펙터클, 근대문화』, 유운성 옮김, 문학과 지성사, 2023, p.229.

5) 발터 벤야민, 『기술적 복제시대의 예술작품』, 심철민 옮김, 도서출판b, 2017, p.88.

6) 발터 벤야민, 위의 책, p.89. (다다이즘에 관한 설명은 p.82-89.)

7) 조너선 크래리, 앞의 책, p.230.

8) 조너선 크래리, 앞의 책, p.231. 국내에는 유운성의 번역을 통해 2023년에 완역되었으나, 크래리가 이 책을 처음 출간한 것은 1999년이었다. 1999년과 이 글을 쓰는 2024년 사이에는 25년이라는 긴 시차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필자는 크래리가 언급한 지각적 종합의 자동화가 지속되고 있는 시기로서 1999년과 2024년이 크게 다르지 않다는 판단하에 동시대로 언급하였다. 사실, 필자가 위에서 언급한 ‘엄지의 움직임’을 고려하면, 크래리가 언급한 “이접적인 것들을 ‘자연스럽게’ 만드는” 자동화의 전략은 1999년보다 오히려 2024년인 현재에 더욱 강화된 듯 보인다.

 

 

글‧김윤진
영화평론가/미술비평가. 2023년 영평상 신인평론상을 수상하였고, 같은 해 GRAVITY EFFECT 미술비평상을 수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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