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불확실성 아래 있는 세계
오늘날 가장 쉽게 떠올릴 수 있는 단어 중 하나는 불확실성이라는 명사일 것이다. 21세기 이후 가장 큰 규모의 팬데믹으로 인한 국가적 차원의 봉쇄정책과 글로벌 산업 가치사슬의 정지는 전세계 곳곳에 직접적이고 치명적인 경제적 타격을 입혔다. 이러한 경제적 타격은 사회인으로서 미래를 설계하는 개개인이 극복할 수 없는 변수를 가져왔으며, 이는 확실하게 예상이 불가능한 (문자 그대로) 불확실성이란 단어로 함축될 수 있는 상황을 일상으로 만들었다.
불확실성이란 말 그대로 확실하지 않거나 또는 그런 상태를 지칭하는 명사로, 경제학에서는 미래에 전개될 상황에 대해 정확한 정보를 얻을 수 없거나 어떤 상황이 발생할 가능성을 명확히 측정할 수 없는 상태를 뜻한다. 물리학에서는 특정한 객체의 정확한 위치를 알 수 없는 상태를 뜻하기도 하고, 철학에서는 확실성을 결여한 상태를 불확실성이라고 규명하기도 한다. 이 때 불확실성은 논리적, 물리적, 수학적으로 예상할 수 없는 상태와 다르지 않다. 즉 불확실성이란 간략하게 앞으로에 대한 정확한 기대를 할 수 없는 상태다.
불확실성과 관련하여 가장 저명한 언급을 한 인물로는 미국의 외교관이자 진보파 경제학자였던 존 케네스 갤브레이스(John Kenneth Galbraith, 1908~2006)를 뽑을 수 있을 것이다. 갤브레이스는 자신에게 대중적인 명성을 안겨준 『불확실성의 시대(The Age of Uncertainty)』(1977)에서 20세기 후기를 ‘사회를 주도하는 지도원리가 사라진 시대’로 진단하고, 이를 “불확실성의 시대(The age of uncertainty)”라고 규정했다. 거시적인 방향성이 사라졌기 때문에 세계시민이 국제사회에 대한 마땅한 기대를 걸 수 없어졌고, 이 때문에 불확실성의 시대가 도래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많은 이들이 ‘거시적인 방향성’을 관습적으로 이데올로기로 치환해 이해하곤 한다. 이를 그릇된 이해로 볼 수는 없으나 갤브레이스가 규정한 “불확실성의 시대”을 정확하게 파악하기 위해서는 그가 언급한 ‘사회를 주도하는 지도원리’가 무엇인지 이해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사회를 주도하는 지도원리’란 갤브레이스가 스스로 대표작이라고 언급한 『새로운 산업국가(The New Industrial State)』에서 개념화한 ‘계획 체제(Planning System)’로 인해 근대국가가 상실하게 된 무엇이다.
갤브레이스가 주장하는 계획 체제는 유보금 등의 잉여자본을 통해 성장한 대기업을 기획 기관(Planning Institution)으로 바라보는 데서 출발한다. 여기에는 한 가지 특징이 있다. 대기업은 유보금 등과 같이 고여있는 대규모 자본을 통해 기술 진보와 같이 이데올로기와 무관한 일정한 방향을 추진해나갈 수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고여있는 대규모 자본이 대기업의 손에 들어가 있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이데올로기와 무관한 일정한 방향을 만들어나간다는 것이다. 그리고 일정한 방향을 유지하는 것은 기술 권력과 같이 여타의 권력기관으로부터 자치권을 절대적으로 유지할 수 있는 가치를 발전시킨다.

자유라는 상실, 통제라는 노스탤지어
유의할 점은 일정한 방향이 생겨나기 위해 필요한 필요충분조건이 고여있는 대규모 자본이라는 점이다. 때문에 대기업은 외형 확장 그 자체가 존속의 목적이 된다. 여기에는 의사결정 상의 중대한 문제가 있다. 오직 존속이라는 목적을 위해 결정되고 실행되는 권력은 다른 가치로 환원되지 않는다. 오직 이윤과 손실만이 있을 뿐이기에 가격통제와 이윤 확보를 위해서는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것은 허용된다” 모든 것은 허용된다는 조건 속에서는 정확한 기대를 걸기 어렵다.
따라서 갤브레이스가 『불확실성의 시대』에서 지적한 ‘사회를 주도하는 지도 원리가 사라진 시대’의 ‘지도 원리’란 우리가 질서 혹은 권력이라고 불러왔던 ‘통제’에 가까운 것이다. 무언가를 통제하고자 계획 체제를 구현했지만, 결과적으로는 지향했던 바와 반대로 통제를 잃어버렸다는 것이 현대사회에 대한 갤브레이스의 견해였다. 이러한 점 때문에 갤브레이스는 기술 권력을 중심으로 수직 계열화된 체제가 주는 단호한 통제가 현대사회에 필요하다고 강변하기도 했으며, 갤브레이스에게 이는 국가의 개입으로 상한을 결정해야 하는 일이기도 했다. 이러한 강변 때문에 갤브레이스는 자신의 견해에 모순이 있다는 후대의 지적에 시달려야 했다.
장황하게 이야기했지만, 결국 불확실성이란 갤브레이스의 지적처럼 지도원리 혹은 통제를 상실한 일종의 기능부전 상태에 가깝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이는 글로벌리즘에 대해 가장 널리 알려진 비평을 가한 사회학자인 지그문트 바우만(Zygmunt Bauman, 1925~2017)의 견해와 맞닿는 부분이 있다. 특히 그의 유작 『레트로토피아』가 지적하는 “실패한 낙원의 귀환”과 상통하는 맥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 둘의 공통점은 무언가 큰 프레임을 제시하던 세력 혹은 흐름이 그 힘을 잃어 제 기능을 하지 못한다는 현실 인지에 바탕한다.
갤브레이스는 경제적 발전으로 인해 기업의 힘을 견제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기관인 정부가 그 힘과 기능을 잃어 힘의 균형이 깨지며 불확실성이 발생한다고 여겼다. 바우만은 ‘국경 없는 자본’ ‘영토 없는 통치’와 같은 자본주의와 글로벌리즘의 부흥이 국가가 담당하던 책임의 영역을 개인에게 떠넘겼다고 지적한다. 갤브레이스와 바우만 모두 상호관계에 바탕하고 있던 관계를 무력화하며 미래에 대한 기대와 예측을 어렵게 만들었다. 달리 말하면, 자유를 통해 얻게된 통제 없는 자유는 지나치게 많은 가능성을 개인에게 몰아넣었다.
궁극적으로 상호관계의 파괴를 통해 얻게 된 제어되지 않은 자유는 삶의 기반을 위협했다는 것이 두 석학의 공통된 견해라고 할 수 있다. 다만, 그 해결방안에 대해 갤브레이스와 바우만의 견해는 확고히 다르다. 갤브레이스는 더욱 강력한 국가를 출현시켜 기업의 득세를 막아야 한다는 주장을 통해 견제를 해결책을 제시한 반면, 바우만은 인간의 삶이 파편화되는 것을 막기 위해 소통의 장을 마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선택했다는 착각과 자율이라는 판타지
<스파이 패밀리>에는 두 석학이 지적했던 문제점이 작품 전반에 낭만적으로 녹아있다. <스파이 패밀리>가 강력한 국가와 소통의 부재라는 자못 심각한 문제를 낭만화하는 방식은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주요한 배경으로 냉전이라는 과거의 유령을 이야기의 배경으로 삼는 것이다. <스파이 패밀리>의 가장 강력한 설정 중 하나는 적대관계에 있는 두 국가가 냉전 벌이고 있으며, 그 중심에는 정보전이 있다는 것이다. 두 국가는 정보전을 중심으로 서로를 견제해야 한다는 강력한 원칙 아래 상대보다 우월한 위상을 확보하는 것을 지상 과제로 삼고 있다.
이러한 설정은 <스파이 패밀리>의 주인공들에게 갤브레이스가 현대사회가 상실했다고 지적했던 ‘지도원리’를 쥐어준다. 주인공들은 각자 자신이 따르는 국가의 승리를 위해 자신을 바치고 있으며, 이는 주인공들의 행동 원리로도 작동한다. <스파이 패밀리> 주인공 로이드와 요르는 각각 ‘웨스탈리스’와 ‘오스타니아’의 스파이로, 양국 간의 전쟁으로 인해 개인사가 파괴된 상황에서 국가에 의해 새로운 일상을 부여받게 된 인물이다. 로이드와 요르는 전쟁이라는 일상을 중심으로 각자의 정보국에 의해 지도원리를 편달받으며 본국에 대한 충성심과 상대국에 대한 적대감을 내면화한다.
로이드와 요르가 처한 상황은 본인들이 무언가를 선택했다고 보기 어려운 맥락 아래 형성되어 있다. 그러나 로이드와 요르는 각자 자신이 수용하고 순응해야만 하는 몫을 두고 책임을 선택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상황을 자주 보여준다. 가령, 로이드는 임무를 위해 무엇을 희생할지 끊임없이 되돌아보며 본인이 가진 자원의 가치를 쉼없이 평가한다. 요르 역시 암살자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스스로 선택했다고 믿고 있으며, 자신 앞에 놓인 상황을 돌파하거나 완수하기 위해 자신의 행동을 끊임없이 수정하며 그 과정을 자율적이라고 믿고 있다.
그러나 이들이 처한 상황과 그들의 판단 기준은 스스로 만든 기준 혹은 원리라고 믿기 어려운 맥락 아래서 구성된 것으로, 이들이 자율적으로 움직이고 있다고 보기에는 대단한 어려움들이 있다. 심지어 <스파이 패밀리>의 중심 무대가 되는 로이드와 요르의 가족 역시 기획된 무대로서, 필요에 의해 구성된 우연의 산물에 가깝다. 다만, 이들이 그 가족에 대한 책임을 지는 과정 자체는 자율적인 과정을 거쳤다고 볼 수 있음에도 정작 그 과정은 스스로 복무의 일부로 인식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들은 과거에 자신이 마주한 상황들에 대한 대응이 자율적인 선택이 아니었다는 점을 필사적으로 부정하며, 자율의 영역을 끊임없이 현실이 아닌 판타지의 영역으로 밀어넣는다.

거대한 착각과 책임으로부터의 도피
로이드와 포저가 자율의 영역을 현실의 일부로 인정하지 않음으로써 얻게 되는 가장 큰 심리적 이익은 현실의 책임을 자신의 손 아래 두지 않는 것이다. 로이드와 요르 모두 주어진 상황을 개선하거나 타개할 수는 있지만, 상황을 스스로 선택하려는 모습은 좀처럼 드러내지 않는다. 이는 그들 앞에 주어진 상황이 개인이 극복하기에는 지나치게 거대하기 때문일수도 있겠으나, 적어도 이야기의 주무대가 되는 가족에 있어서 그들은 임무로 표상되는 ‘지도원리’를 우선에 둔다.
여기서 유의할 것은 로이드와 요르 모두 자신들에게 주어진 가족에 만족하고 있으나 그에 대한 의견을 제출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오히려 가족 집단에 대한 의견을 가장 많이 제공하는 것은 로이드와 요르의 자녀 역할을 맡고 있는 아냐에 가깝다. 로이드와 요르의 대응 방식은 그들이 극복할 수 없는 불확실성 앞에서 지도원리를 내면화하고 착각을 통해 그 불확실함에 대응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 중심에는 가족이라는 공동체에 대한 책임이라는 변동적이고 불확실하며 모호한 무게에 대한 우회 혹은 회피가 있다. 다시 말해, 로이드와 포저는 확실성에 대한 필요를 지속적으로 내면화하고 있기 때문에 유사가족의 일원으로써 상호간 합의가 가능하다.
로이드와 포저에게 유사가족이라는 공동체와, 그 공동체로부터 부여받은 부모라는 직책은 상호작용을 통한 결속과 언약과 규약의 이행을 통한 연대의 책임보단 거대한 착각과 상호간의 이기심이 우연히 맞물리는 집단 독백에 가깝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가장 취약한 구성원은 그 집단 독백에 무방비한 기대를 걸고 있는 자녀다. 혼자 있지 않기 위해 자녀의 직책을 선택한 아냐의 기대는 비록 착각과 집단 독백 속의 우연일지라도 어떤 방식으로든 그 기대에 응답받는다. <스파이 패밀리>는 그러한 가족도 없는 것보다는 낫다는 진부하지만 익숙한 생각으로 우리를 유혹한다.
글‧이현재
경희대학교 K컬쳐・스토리콘텐츠연구소, 리서치앤컨설팅그룹 STRABASE 뉴미디어・콘텐츠 섹터 연구원. 「한류 스토리콘텐츠의 캐릭터 유형 및 동기화 이론 연구」(경제·인문사회연구회) 「글로벌 게임산업 트렌드」(한국콘텐츠진흥원) 「저작권 기술 산업 동향 조사 분석」(한국저작권위원회) 등에 참여했다. 2020 동아일보 신춘문예 영화평론부문, 2021 한국만화영상진흥원 만화평론부문 신인평론상, 2023 게임제네레이션 비평상에 당선되어 다양한 분야에서 평론 활동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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