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원더랜드>는 무리해서라도 지금까지 본 것은 '더' 사실이야 라고 강조하려는 것 같다. 영화 중후반, 성준(공유)의 등장은 가상의 폭풍우를 견뎌내고 기어이 살아남으려 할 때 그것이 산자의 윤리라고 힘주어 말하려 한다는 점에서는 더욱더. 그러나 여기서 뒤늦게 복기되는 몇몇 장면들은 성준 역의 공유가 실제로 등장하는 맥주 광고에서의 '폭풍' 특수효과일 뿐이다. 어쩌면 ‘원더랜드’라는 이름이 놀이공원을 표방하는 테마파크 이름 그 이상으로 다가오지 않는 이유는 그래서가 아닐까?

이야기를 장악한 기술의 이해도
기억을 삭제하거나 복원하는 것, 기억을 복제하거나 설계하는 것 사이에는 의학과 공학만이 놓여있을까? 기억과 두뇌는 그것대로 따져봐야 할 복잡한 의학적 사항이 있겠지만 기억과 기술(technology)은 그만큼 복잡해도 학문적 개입을 넘어 영화가 점점 관심을 가져가는 쪽으로 기울고 있으니 말이다. 예컨대 미셀 공드리의 <이터널 선샤인>(2004)은 기억을 삭제하거나 복원할 때 사랑이 어떻게 시작하게 되는지를 대놓고 물어본 적이 있었다. 그런데 이럴 경우, 우리는 기억 삭제와 복원에 관여하는 의학적 공학적 정교함에 신경 쓰기보다 그것들을 넘어 흘러나오는 이야기에 더 몰입하고는 했다. 이야기를 듣고 해석할 때 사랑의 힘에 감동하게 될 뿐 공학적 이해도는 전혀 맥을 못 췄다는 말이다. 그래서 공학적 기술적 정교함은 조건으로 남거나 배경이 되기만 했다고 해도 크게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요즘 개봉되는 영화는 공학적 배경 지식을 이야기만큼이나 중요하게 여겨야 한다는 징후가 나타나고 있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특징을 굳이 꺼내지 않더라도 그것이 동원되지 않으면 ‘몰입’에 방해가 될 만큼 공학적 기술적 이해도는 이제 우리의 이야기를 전부 감싸 안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지금 김태용 감독의 <원더랜드>(2024)가 놓치고 있는 공학적 정교함을 말하려는 게 아니다. 오히려 그것의 과대해석에 따른 병폐에 대해서 말하고자 한다. 사랑과 가족이라는 인간적 가치를 되돌아볼 줄 아는 감독이 현재의 인간을 이해할 때 필요한 공학적 이해도를 갖추고 있지 않다면 이젠 인간적 가치를 되돌아볼 줄 아는 감독이라고 평가하기 어려워져서이다. 테크놀로지도 인간적 가치의 일부가 되었다는 뜻이다.

업로드된 어떤 이야기들
<원더랜드> 속 모든 인물에게는 이야기가 잠재해 있다. 이 잠재적인 것은 특정한 상황 속에서 늘 그 정체를 드러내지만 사실 그것은 원더랜드 서비스 기술에 의해서 드러난다고 보아야 한다. 요컨대 여기서 인물들의 이야기는 특정한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서 특정한 기술이 작동하는 방식을 지켜보는 작업이 되었다는 뜻이다. 바이리(탕웨이)는 불치병 환자다. 하지만 원더랜드 서비스를 통해 자기 죽음을 딸 지아(여가원)에게 숨길 수 있는 길이 열린다. 이 영화에서 등장하는 인물들의 이야기는 모두 이러한 전제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실제로 연도를 확인할 수 없는 미래 상황에서 유일하게 알 수 있는 정보는 ‘원더랜드’ 서비스가 일상이 된 세상이라는 정도다. 알다시피 이 서비스는 인공지능과 기억 복제 기술이 융합한 형태쯤으로 보이는데 얼핏 보기에 상당히 그럴싸해 보이기도 하지만, 오히려 잘 들여다보면 기술적 허점이 이야기 몰입에 방해를 주기도 한다. 그러함에도 이들의 개별적인 일화는, 사랑하는 이를 떠나보낸 자의 삶을 적극적으로 재창조하려는 노력을 엿보이고 있으며 이 노력에 미래 기술이 비중있게 개입하고 있다는 사실을 관객에게 주입시키려 한다.

혼란에 의한 갈등
하지만 남은 자의 노력이 원더랜드 서비스에 의해 완성된다는 것은 잘 드러나지 않는다. 당연히 모든 기술적 발전에는 효과와 부작용이 공존하기 때문일 것이다. 실제로 바이리가 자기 죽음을 숨기기 위해 신청한 원더랜드 서비스는 결국 남아 있는 딸과 그녀의 어머니(니나 파우)에게 큰 혼란을 준다. 그녀의 어머니는 원더랜드 속 바이리에게 딸 지아에게 너의 죽음을 더 이상 숨길 수 없다며 선을 그으려 한다.
한편 태주(박보검)와 정인(배수지) 역시 혼란을 겪긴 마찬가지다. 식물인간 상태에 있었던 태주를 그리워하다 원더랜드 서비스를 신청하게 된 정인은 태주가 깨어나자 혼란을 겪는다. 그녀는 태주의 코마 상태가 죽음과 다르지 않다고 여겼기 때문에 서비스를 신청하게 된 것이고 그래서 태주가 깨어났을 때의 혼란을 피하지 못했다. 모르긴 해도 정인은 태주를 만난다는 것이 곧 사랑의 의미를 되찾는 일과 다르지 않다고 믿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인공지능화된 태주에게 길들어 사랑을 편의로 바꿔 이해하게 된다. 그건 말하자면 영상 속 태인에게 적응하게 된 정인이 여전히 실제 태인과 영상 속 태인을 오인하게 되면서 필연적으로 겪을 수밖에 없는 혼란이었다. 서비스를 이용하는 인물들은 대부분 이러한 혼란을 겪어야 하는 상황에 내던져지고 그들이 어떤 생각과 선택을 하는지 이 영화는 주시하려 한다.

과잉해석의 징후
이런 이유 탓에 영화의 서사는 혼동의 축을 갖는다. 영화 속 원더랜드는 사랑하는 이의 죽음을 견디기 위해 택한 자구책이 망상인지 아니면 가상의 랜드에 터를 마련해 주는 인간적인 배려인지를 묻는다. 그런데 이것은 미래의 기술적 성취를 이미 과잉 해석한 결과다. 죽은 자들의 기억을 디지털로 복원시킨다는 기술은 앞서 지적한 대로 신의 영역에 도전하는 것과 다르지 않아 보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애초 영화의 도입부에서부터 원더랜드에 업로드된 사람들은 자신이 죽었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한다는 설명을 들은 터다.
그래서 이 영화는 이른바 ‘구글 신’, 이제는 chatGPT4o가 <Her>의 '사만다'로 명명되는 현대 기술을 향한 신화의 산물이 계속해서 진화한 우화로도 읽힌다. 말하자면 이 영화는 신이 관여하는 죽음에 대한 관습이 어떻게 유지될 것인가를 당돌하게 예측한다. 결정적인 것은 원더랜드에 업로드된 후 자기 장례식을 지켜보고 있는 용식(최무성)의 상황에서 드러난다. 그 에피소드는 죽음과 삶의 경계가 디지털 기술로 인해 붕괴하였지만, 장례식과 같은 관습 예법은 여전히 남아 있을 수밖에 없다는 걸 보여준다.

기술을 믿어야 하는 이성적 선택
그러나 관습의 문제로 향하던 과잉 해석은 갈피를 잃는다. 이런 혼란은 정란(성병숙)과 진구(탕준상)의 이야기와 바이린과 딸 지아의 상황을 빗대어 보면 확연히 드러난다. 원더랜드에 업로드된 손주 진구에게 게임 캐릭터에게 아이템을 구매하여 장착시키듯 모든 것을 아낌없이 지원해주던 할머니 정란이 끝내 진구만 남기고 죽게 되자, 서비스 종료라는 명목하에 진구는 그대로 버려진다. 반면 고고학자로서 살아가는 바이린의 원더랜드 상황은 서비스가 종료된 이후에도 집요할 정도로 세세하게 묘사된다. 물론 두 에피소드는 원더랜드 서비스가 가져올 부작용 중 가장 있을 법한 하나의 사례를 보여준 것에 지나지 않을지 모른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기술 발전으로 이루게 될 성취가 소위 '그럴싸해 보이는 두 상황'과 어떻게 밀접한 관계를 갖느냐는 것이다. 앞서 공학적 기술적 정교함이 떨어진다고 했으니, 남은 것은 다음과 같이 생각해 보는 것밖에 없다. 기술 때문에 죽음을 극복하여 살 수 있게 된다면, 죽음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기술을 믿어야 한다는 것. 그런데 이성으로 유도되는 기술의 발전이 예상을 넘어서는 결과를 만든다고 해도 인간이 극복할 수 없는 죽음을 정복하게 되었을 때, 우리는 그 기술로써 죽음을 극복했다는 믿음을 기어코 완성할 수 있을까? 그러면 이성으로써 믿음을 지속해 나아가는 모습이 우리의 미래 모습이라고 할 수 있어야 할 텐데 그것이 정말 가능할까? 불행히도 이성이 믿음으로 채워진다는 건 또 다른 형태의 맹목이 발생할 수밖에 없음을 뜻한다. 미래의 인간들은 신이 부재 하는 세상에서도 끝끝내 원더랜드 서비스를 맹목적으로 신청하고 있다는 비판이 가능한 이유다. 미래의 그들은 어쩌면 원더랜드 서비스를 신의 대체물로 보고 있을 수도 있다.

믿음의 기술이 가진 부작용
그렇다면 그건 최악이다. 이성이 맹목으로 바뀐다면 미래의 그들은 타인을 더 깊은 수준에서 사유하지 못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정인이 코마 상태에서 깨어난 태주를 겪어보고 “너 나한테 왜 막해?”라고 소리칠 때 받은 불길한 느낌은 바로 거기에서 연유한다. 그건 상대방을 이해 못 해서가 아니라, 상대방이 자기에게 맞춰주었다는 사실을 자각하지 못해서, 즉 A.I. 비서로서의 태주에게 길들어 내뱉은 말로 들리기 때문이다.
결국, 원더랜드 서비스 이용자들은 다음과 같이 맹목적으로 생각하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는 사랑하는 이의 죽음을 어떤 식으로든 기록하지 않고서는 어떤 일도 이어나갈 수 없다. 하지만 그런 의존적인 태도는 죽은 자에 대한 기억을 산 자의 입맛대로 연장한 결과다. 여기서 이율배반적인 태도가 강하게 충돌한다. 죽은 자의 기억을 제한된 영역에 가두어 놓았으면서도 갇히지 않은 상태의 자유로운 반응을 기대하고 있다는 것. 이런 모순적인 태도를 이미 감지한 해리(정유미)가 원더랜드에 업로드된 부모를 대하는 태도에는 그런 씁쓸함이 담겨 있었다. 업로드된 죽은 자의 기억과 삶은 원래대로의 반응을 불가능하게 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여기서 업로드된 기억을 주체적으로 말하려면 어떻게 이야기해야 할까. 다시 말해서 원더랜드에 업로드된 자들의 삶은 그들의 관점에서 볼 때 또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무엇보다 원더랜드에 업로드된 당사자들 역시 죽음 때문에 사랑하는 이를 결단코 떠나지 않겠다는 결심에 따라 그 선택을 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건 ‘기술적 성취와는 별개의’ 이야기라는 비판적 시선을 거둬내고 보아도 ‘기술적 성취를 과대해석하더라도 보고 싶은’ 이야기를 하고야 말겠다는 김태용 감독의 고지식한 상상력의 결과에 불과하다. '테크놀로지도 인간적 가치의 일부가 되었다'는 의미는 여기에 깊이 관여한다. 깨어난 태주로부터 창조된 A.I.로서의 태주의 정체성을 끝내 수습하지 못한 이유는 그 의미를 전혀 이해하지 못한 탓이 크다. 결국 <원더랜드>가 그려내고 있는 미래 사회의 기술을 선뜻 이해하거나 쉽게 공감할 수도 없었고 더 나아가 허탈함을 감출 수 없게 되었던 이유 역시 바로 그 의미가 누락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젠 하고싶은 이야기만을 보여주기 급급한 과대해석만으로는 창의적 해석의 재미를 유도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고지식한 상상력은 상세한 기술적 검토를 누락한 채 남발하기만 하는 그야말로 정치권에서나 쓰는 국면 전환용 꼼수처럼 결말이 뻔히 보이는 한계에 미련하게 봉착하게 되고 말 것이다.
글·지승학
영화평론가. 문학박사. 한국영화평론가협회 홍보이사, 2011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영화평론 부문으로 등단. 현재 고려대 응용문화연구소 연구교수로 재직
- 정기구독을 하시면, 유료 독자님에게만 서비스되는 월간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한국어판 잡지를 받아보실 수 있고, 모든 온라인 기사들을 보실 수 있습니다. 온라인 전용 유료독자님에게는 <르몽드 디플로마티크>의 모든 온라인 기사들이 제공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