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과 사를 구별해야 하는 것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위정자의 필수 덕목이다. 로마 시대 연극에서 배우들이 배역에 맞는 페르소나(가면)를 쓰고 무대에 오른 것은 배역에 충실하기 위함이고, 중국의 경극과 월극, 우리나라의 탈춤 역시 역할에 맞는 가면을 쓰고 열연을 했다.
배우들은 자신의 얼굴에 씌운 페르소나의 배역에 맞춰 근엄한 왕 노릇을 하기도 하고, 충성스러운 신하, 간교한 배신자, 가증스러운 범법자, 애욕에 불타는 연인 등의 연기에 집중했다. 얼굴에 검은 숯덩이나 하얀 횟가루를 바를지언정 맨얼굴의 연기자는 없었다. 연기자들이 자연인으로서 아무리 멋지고 개성적인 외모를 지녔을지라도, 무대에서는 각기 맡은 배역의 페르소나에 몰두해야 연극이 성공을 거둘 수 있다.
서구 법정에서 법을 다루는 법관들이 하얀 가발을 뒤집어쓰고 재판을 진행하는 것과, 우리 법정의 경우 가발을 쓰진 않지만 검은 법관복을 입는 것은 개인의 사감(私感)을 떨치고, 법관으로서의 공적인 페르소나에만 집중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만일에 검사와 판사, 변호사같이 법을 다루는 자가 사감과 사욕에 사로잡혀, 공정과 정의의 저울추를 제멋대로 결정한다면 그건 공적인 페르소나를 포기하는 것이다. 만약 정의의 페르소나가 없는 법조인이라면, 우리 사회의 ‘건강성’을 위해, 국민 앞에 머리 숙이고 ‘가짜’ 법복을 벗어야 할 것이다.
검사 출신의 대통령이 나온 뒤 우리 사회에는 자신들의 페르소나를 망각한 법관들이 유독 많다. 죄인을 심문하고, 증거주의에 입각하여 기소해야 할 검사들은 최고 권력자의 ‘적들’에 대해선 무소불위의 막가파식 수사와 기소를 남발하고, 권력자와 그 가족에 대해선 송곳 드릴로도 뚫을 수 없을 철벽 쉴드를 쳐주며, 판사들은 상식선에서 납득하기 힘든 판결 방망이를 휘두른다(상식에 어긋난 판결이 너무 많지만, 여기서는 지면상 언급하지 않으련다).
검찰총장이라는 자(者)는 명품가방을 수수한 최고 권력자의 배우자 김 여사에 대한 소환조사 여부를 묻는 말에 “법 앞에 예외도, 특혜도, 성역도 없다”라고 답했지만, 수년 전부터 김 여사가 연루된 도이치모터스 주가조작 의혹에 대한 수사를 차일피일 미뤄온 걸 보면 그저 여론에 떠밀려 대충 버무리는 언어의 유희로 들린다. 국민권익위원회가 김 여사의 명품가방 수수 의혹에 대해 “대통령 배우자는 청탁금지법상 제재 규정이 없다”며 사건 조사의 종결을 결정한 것은 추후 검찰과 법원의 판단에 지침으로 작용할 것으로 보인다.
신고가 접수된 지 6개월가량 만이자, 법정 신고 사건 처리 기한(최장 90일)을 훌쩍 넘긴 116일(업무일 기준) 만에 마지못해 내놓았다. 국민권익위를 ‘김 여사 권익위’로 전락시킨 권익위 위원장도 한때는 공정과 정의를 내세웠던 판사와 변호사 출신이지만 자신을 임명한 최고 권력자 앞에서 공적 페르소나를 제대로 지켰는지 의문이 든다.
사회 공동체라는 ‘무대’에서 법관역을 맡은 자들이 배역을 제대로 소화하지 못하는 것은 극본을 쓰고, 그 배역을 부여한 총감독의 책임이 크다. 대선 당시, 손바닥에 임금 ‘왕(王)’자를 쓰고 TV토론에 나오다가 결국 자신의 바람대로 이 나라의 ‘왕’이 된 최고 권력자를 보면, 이 나라 법관들이 공적 페르소나를 망각할 수밖에 없는 필연성을 새삼 다시 확인한다.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한국어판 7월호에는 저명한 문화·예술 평론가 겸 기자인 에블린 피예에가 에른스트 칸토로비치의 『왕의 두 신체(The King’s Two Bodies)』라는 고전 저작을 인용하여, 루이 16세 노릇을 하는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의 ‘철’없음을 질타한다.
권력의 최고 정점에 있는 왕은 자연인의 얼굴이 아닌 역할에 맞는 페르소나를 뒤집어써야 하는 배우들이나 판검사, 공직자들과 달리, 공(公)과 사(私)의 구별이 없이 하나의 페르소나를 갖는다. 사인(私人)으로서의 몸과 공적 역할로서의 몸을 동시에 가진다는 것이 칸토로비치의 주장이다.
조선왕조실록을 작성한 사관(史官)이 왕이 자신의 실수를 적지 말라고 지시한 것까지 실록에 적은 것은 왕에게는 공과 사의 구별이 없다고 봤기 때문일 것이다. 태종 4년(1404) 2월 8일, 사관은 “(왕이) 친히 활과 화살을 가지고 말을 달려 노루를 쏘다가 말이 고꾸라짐으로 인하여 말에서 떨어졌으나 상하지는 않았다. 좌우를 돌아보며 말하기를, ‘사관이 이를 알게 하지 말라.’고 하였다”고 적었다.
영국의 청교도혁명 당시 혁명파가 내세운 ‘찰스왕의 이름으로 찰스를 벌한다’는 논리도 같은 맥락이다. 윤석열 대통령도 술 마시길 좋아하고, 어퍼컷을 날리며 농담하길 좋아하는 자연인 윤석열의 신체와 헌법이 부여한 대통령으로서의 신체가 공존한다.
하나는 개인적 페르소나이고, 다른 하나는 공적인 페르소나이지만, (그의 손바닥 글씨처럼 왕이나 다름없는) 국가 최고 권력자로서의 그는 불행하게도(?) 두 개의 신체를 동시에 갖는 바람에 공사를 따로 나눌 수 없다. 물론, 최고 권력자도 보통의 인간처럼 희로애락을 갖는다. 하지만 자신의 자연적인 ‘희로애락’을 위해 깜짝쇼같은 것으로 정치를 희화화한다면 어떻게 될까?
칸트로비치에 따르면 자연적인 신체는 정치적인 신체보다 하위에 있으며, 그에 속해 있다. “왕의 인간적인 면이 왕의 신적인 면을, 그리고 필멸성이 불멸성을 압도할 때 왕은 폐위된다.” 영국의 왕실이 이 책을 금서로 지정한 이유는 어쩌면 두려운 진실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더 이상 ‘신적인’ 왕이 존재하지 않는 민주주의의 시대에 살고 있다. 국민의 손으로 직접 뽑고, 헌법이 권력을 부여한 최고 권력자에게는 자연적인 신체와 공적인 신체의 건강한 조화가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대통령 윤석열의 페르소나는 그래야만 한다.
글·성일권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한국어판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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