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쿠데타 이후 한국 민주주의에 대해 다시 고민해본다. 12.3 쿠데타가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은, 민주주의로의 이행의 문제가 아니라, 이행 이후 민주주의의 내부적 위기가 어떤 모습으로 출현하는가다. 선거민주주의가 공고화된 이후, 현단계 전세계의 민주주의가 퇴행을 보여주고 있는 현실에서 보면, 이 퇴행의 양상은 다양하다.
먼저 민주주의 내에서 권위주의적 통치 경향을 보이는 경우들이 많다. 이는 이미 박근혜정부를 통해서도 드러났고, 미국의 트럼프도 포퓰리즘과 결합된 신종 권위주의적 통치로도 나타나고 있다.
다음으로 선거민주주의가 지속적이고 안정적으로 가동되면서도 일당 헤게모니 체제로 유지되는 경우도 있다. 싱가포르와 일본이 아마 대표적일 것이다. 선거민주주의를 통해 지배적인 정당이 장기간 지속적으로 통치를 하는 경우를 말한다.
셋째로, 민주주의 내에서의 비자유주의적 요소들이 팽배하는 비자유주의적 민주주의이다. 선거민주주의라는 정치형식에서는 자유주의적이지만, 경제적, 사회문화적으로 비자유주의적 요소가 강하게 지배하는 경우도 많다. 자유주의적 경향이 충분히 뿌리내리지 못한 경우들이다. 이런 다양한 민주주의 내의 퇴행적 양상과 달리, 12.3 쿠데타는 민주주의의 전복을 지향하는 군사반란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는 점에서 훨씬 퇴행적이다.
12.3 쿠데타, 이전의 군사반란 보다 훨씬 퇴보해
12.3 이후 퇴진, 하야, 탄핵 판결 등이 이루어지는 시점까지를 ‘1차 전환 국면’이라고 해보자. 아마도 12.3으로부터 윤석열의 퇴진(탄핵, 체포, 하야 등)에 이르는 시기가 될 것이다. 이 1차 전환 국면에서, 당연히 국민의 힘 등 보수진영은 이른바 ‘질서 있는 퇴진’이라는 이름으로, 현 권력구조를 유지하면서 타협적 변화를 지향할 것이다.
당연히 12.3 쿠데타에 대한 국민적 분노가 국민적 저항으로 발전하여 체제 변화로 이어지는 것을 반대하는 길이 될 것이다. 1987년 민주항쟁 당시의 노태우를 연상해보자. 심지어 윤석열은 비상계엄이 ‘나라를 지키기 위한 경고성 계엄’이었다는 해괴한 논리로 무장한 채, 탄핵과 퇴진 자체에 저항한다.
그러나 반대로 보다 근본적 전환을 추구하는 대중적 역동성이 분출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타협적 변화와 보다 근본적 변화의 길이 각축을 벌이게 된다. 과거 역사적인 예를 들면, 1987년 6월 민주항쟁을 전환점으로 삼아, 6.29 선언, 여야 간의 협상을 통한 10.27 헌법 국민투표까지의 시기이며, 이후 선거 국면으로 전환하여, 87년 12월 대선으로 이어졌다.
대중적 역동성은 보다 근본적인 전환을 추구
12.3 쿠데타와 국회의 계엄 해제 결의 이후, 12.14 탄핵의 국회 가결까지의 시기가 1차 전환 국면의 제1소시기쯤 되겠다. 이 시기에도 2개 길의 각축이 있었다. 윤석열은 12월 12일, 비상계엄이 ‘나라를 지키기 위한 경고성 계엄’이었다는 해괴한 논리로 무장한 채, 탄핵과 퇴진 자체를 수용하지 않는 담화를 발표하였다.
이에 대항하는 국민적 분노가 더욱 고조되었고 연일 이어지는 탄핵 촉구 집회, 최고조에 이른 12.12 여의도 탄핵 촉구 집회를 배경으로 국힘 의원들이 탄핵찬성파와 윤석열지지-탄핵반대파로 분리되면서, 탄핵은 가결되었다. 이 소 시기에서 국민적 항거는 타협적인 경로를 봉쇄하면서 더욱 근본적인 변화의 길을 열었다고 생각된다. 이제 제2소시기에 해당하는 헌법재판소 판결까지, 2개의 길 사이에 치열한 각축이 이어질 것이다.
1차 전환 국면에서의 우리들의 과제는 2가지 방향을 추구해야 할 것이다. 첫째는, 타협적 변화의 경로를 ‘봉쇄’하면서 더욱 근본적 변화의 경로를 열기 위한 노력이다. 이를 위해, 12.3 이전에 존재했던 교착 구도를 전환하고 확장하는 것이 필요하다. 국민적 분노를 국민적 저항으로 연결하는 것이다. 이미 그런 대중적 분출이 나타나고 있다. 둘째는 분노의 저항화를 넘어서, 희망을 잉태하는 것이다. 박근혜정부에 대한 탄핵 이후 국민이 갖고 있는 ‘허무주의’적 정서를 극복할 수 있도록, 전환의 새로운 비전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먼저, 1차 전환국면에서 중요한 것은 그동안 ‘윤석열 대 이재명’의 좁은 대립구도를—12.3 쿠데타라는 계기적 사건이 촉발한 국민적 분노를 모아내면서—광범위한 ‘민주주의 정상화 연합’으로 바꾸어내야 할 것이다.
앞서 언급하였듯이, 그동안은, ‘적대적 진영정치’라고 부르는 일종의 교착구도가 존재해 왔다. 진보의 입장에서는 안타까웠지만, 윤석열에 반대하는 진영 대 ‘이재명 사법 리스크’를 증폭하며 이 반대를 무마하고자 했던 진영 간의 정치적 교착이 존재했던 것이다. 윤석열의 ‘패착’으로 새로운 계기가 만들어졌고, 국민의 분노가 폭발했다. 이제 이를 계기로 기존의 교착 구도를 더욱 폭넓은 민주주의적 연합전선으로 ‘구도전환’을 해야 한다.
‘연합의 구도전환’ 설정이 필요한 시점
역사의 반복을 막기 위한 보수진영의 응전이 지속될 것이기 때문에, 1차 전환 국면은 복잡한 경로를 밟을 수도 있다. 민주진보진영 역시 박근혜 탄핵과 동일한 패턴을 밀어붙인다는 생각만을 가져서는 안 될 것이다.
더 넓은 탄핵 연합,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과도기의 관리 비전을 제시하고, 비정상적인 비상계엄 시도에 분노하는 국민이 1차 전환의 타협적 경로에 대한 투쟁전선으로 합류하게 해야 한다. 나는 이런 점에서 12.3 쿠데타 이후 ‘연합의 구도전환’이라는 문제설정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이 과정에서 윤석열정부의 탄생과정에서 민주진보진영과 결합하지 않았던 많은 개인과 진영이 함께 하게 될 것이다.
이미 그렇게 가고 있다. 심지어, 윤석열을 지지하면서, 민주진보진영으로부터 이탈했던 많은 시민이 윤석열 정부의 새롭게 드러난 본질을 직시하면서, 변화의 서포터즈가 되게 해야 한다. 이런 점에서 1차 전환 국면은 거대한 대중적 계몽과 탈바꿈의 과정이 될 것이다.
야당도 국란 극복의 리더십을 발휘해야
이처럼 구도전환은 야당이 여당에 대립하는 투쟁정당에서 12.3 쿠데타로 조성된 국란(國亂)극복의 리더로서 재정립되는 것을 포함해야 할 것이다. 이미 윤석열은 ‘기능 부전’ 상태에 들어갔고, 그런 상태는 대통령제를 가지고 있는 대한민국이 국가적 위기에 진입하게 만들고 있다. 또한, 통치체제의 와해는 중요한 국가적 의사결정을 표류하게 할 것이다.
이 과정에서 야당이 국란 극복의 리더십을 보이는 것도 중요하다. 이는 근본적 변화의 길이 열린다면, 차기 민주진보정부가 ‘통합정부’로 출범할 수 있는 기반을 확대하는 데 기여할 것이다. 민주진보가 윤석열의 정치가 아니라 군사적 수준에 의한 준내전적 ‘박멸’ 전략을 넘어서서, 통합과 공화의 가치를 국민에게 보여줄 수 있어야 한다.
진보가 민주를 매개로 연합의 바운더리를 확장하는 것이 필요하다. 어떤 의미에서 0.73%의 차이로 출범한 윤석열 정부는 임기 내내 일종의 준내전적 상황에 놓여 있었다. 이는 통치의 미숙과 실정이 겹쳐져 더욱 악화되었고, 스스로 자멸의 극단적 선택을 한 것이다.
차기 민주정부는 이런 경로의 가능성을 넘어서야 한다. 국란 극복, 그를 위한 통합의 리더십을 준비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현재의 적대적 진영정치의 틀 그 자체가 온존하면서, 윤석열정부에 대한 탄핵과 공격의 칼이 차기 정부에 그대로 던져질 수 있다.
윤석열정부에 대한 탄핵 행동 등 일련의 저항은 그대로 차기 정부 이후 보수적 그룹에 의해 재현될 가능성이 있다. 1차 전환 국면에서, 반(反)윤석열 투쟁의 연장선 상에 서되, 질서와 안정을 바라는 시민들에게 국란 극복의 견인차임을 보여줄 때, 12.3 쿠데타 이전의 교착 구도가 깨어지면서, 진보적 전환을 위한 대중적 기반을 더욱 확대할 것이다.
민주화운동=진보+리버럴 연합
탄핵 연합의 구도를 확장하는 것은 정치적 차원과 시민사회적 차원 모두에서 진행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나는 1970~80년대 민주화운동은 ‘진보와 리버럴 세력의 연합이라고 본다. 더 자세히 이야기하면, 협의의 진보+중도+(권위주의에 반대하는)합리적 보수의 연합운동이었다고 본다.
어떤 의미에서 보수정부의 등장은 언제나 중도와 합리적 보수의 이반과 (협의의) 보수의 연합으로 출범한다고 본다. 12.3 쿠데타 이후 중도적 시선과 합리적 보수주의자도 이 비정상적인 쿠데타에 동의할 수 없다. 이런 점에서 이제 각 세대를 막론하고, 이런 더 폭넓은 연합을 추구해야 한다.
이미 여의도에는 이름도 알 수 없는 ‘기발한’ 이름을 가진 개인과 그룹이 출현해 있다. 1980년대를 돌이켜 보면, ‘아방타당’이라는 말이 유행하였다. 그런 언어에 기대어 보면, ‘아방 집결주의적’ 혹은 ‘아방 확대주의적’ 관점에만 서서는 안된다.
시민사회에서도 기존의 통상적이고 익숙한 연합을 넘어서는 노력이 필요하다. 12.3 쿠데타에 대한 청문회와 수사를 통해서 윤석열 폭정과 ‘반국가적인’ 행위들이 더욱더 드러날 것이고, 국민의 분노는 확대될 것이다. 이런 확대가 연합의 확대로 이어져야 한다.
‘87체제’의 대전환이 희망으로
다음으로 1차 전환 국면에서는 국민적 분노를 배경으로 하는 타협적 경로를 막아내는 것과 함께, 분노를 넘어서 희망을 잉태해야 한다. 윤석열을 넘어선 ‘새로운 대한민국’에 대한 희망을 만들어야 한다. 퇴진이 확정되는 순간, 곧바로 우리 사회는 ‘선거국면’으로 전환된다. 그 기간이 2개월 밖에 되지 않기 때문에, ‘표 획득’의 논리가 작동하게 되고, 그러면 파편화된 선거 승리의 논리만이 지배하게 된다.
그러면 공약은 거의 ‘정책 떳다방’ 식으로 만들어지고, 거시적인 변화의 비전은 실종되고, 승리를 위한 표 계산만이 남게 된다. 그런 점에서 나는 1차 전환 국면에서도 새로운 대한민국의 만들기 위한 희망의 플랜을 만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를 학술적 표현을 빌면, ‘87년 체제’를 넘어서는 새로운 체제를 상상하고 만들어가는 것이다.
1차 전환이 2차 전환으로 가기 위해서는, 우리 사회와 국가의 긍정적 변화에 대한 비전이 필요하다. 이는 12.3 쿠데타 이후의 전환이 단지 정부 주도세력의 교체나, 중앙 정치엘리트의 교체로 종결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것을 넘는, 국가적·사회적 대전환의 희망을 만들어내야 한다.
1차 전환 국면에서, 단지 차기 정부권력을 누가 장악하는가를 둘러싼 경쟁만 이루어지고, 정작 근본적인 구조개혁을 위한 대안적 비전과 정책들이 만들어지지 않는다면, 그리고 그에 대한 국민적 합의와 공감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12.3 쿠데타 이후의 타협적 변화에 대한 미몽이 유지될 수도 있다.
주지하다시피, 지난 박근혜정부의 탄핵 이후 출범함 문재인정부에 대해 지금도 더욱 철저한 개혁이 없었다는 점을 지적하는 사람들이 많다. 현재 우리 사회는 정치적 위기뿐만 아니라, 저출산과 같은 인구 공동체의 소멸위기, 불평등의 극심한 확대로 인한 사회적 위기, 각종 사회적 갈등의 증폭, 차별과 혐오의 확대 등 새로운 위기에 직면하고 있다. 퇴진 이후의 정치적 변화의 과정은 바로 이러한 새로운 대전환의 비전이 경쟁하고 잉태되는 산고의 과정이 될 것이라는 믿음을 주어야 한다.
국가・정치체제에 다원성을 제고하는 개혁
국가적·사회적 대전환은 ‘87년 체제’의 한계를 넘어서는 것을 의미한다. 먼저 국가와 정치체계의 다원적 재구조화의 시대적 필요를 담아내야 한다. 통상 민주화의 과정은 자유화, 민주화, 다원화로 구분된다. 이제 다원적 민주주의로의 이행을 담보하는 제도적 전환이 필요하다.
‘제왕적 대통령제’를 1987년 이후의 정치사회적 변화에 맞게 재구조화하는 것이 필요하다. 물론 시급한 것은, 검찰권력이 기소권을 독점하는 것, 그것이 정치권력과 결탁하면서 그 독점화된 기소권을 정치화해서 악용하는 것을 포함하여, 검찰국가의 제도적 형태를 전환하는 것도 포함한다.
윤석열의 내란이 ‘87년 체제’의 한계가 아주 극단적인 형태로 분출된 것이라는 인식을 가질 필요가 있다. 물론 여기서 더 나아가야 한다. 나는 다원적 민주주의의 새 지평을 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윤석열의 쿠데타는 통치자가 보수적 시민사회 내의 극단적 인식과 요구를 자기화한 데서 출발했다고 생각한다. 또한 의사 파업 그룹처럼 시민사회 내의 이익갈등이 적대적으로 전개되며, 해결 불가능하게 보일 정도로 지루하게 진행되는 상황에서, 이를 박멸해야 할 이익갈등이나, 처단해야 할 대상으로 인식하는 것을 넘어서야 한다. 민주화 이후의 다원적 민주주의는 과거의 권위주의적 획일성을 넘어, 이런 다원성의 인정 위에서 정치를 행하고 국가적 의지를 결집해가는 과정인 것이다.
나아가, 이미 사회문화적으로 우리 사회는 과거와는 다른 다원성이 증대되어 있다. 사회경제적 기반의 변화는 이미 다원적 요소를 우리의 정치사회에도 인입하고 있다. 적대적 진영정치는 12.3 쿠데타와 같은 괴물을 만들어내는 토양이 될 수도 있다. 적대적이기까지 보이는 갈등의 다양성을 인정하고 그 위에서 공존의 정치가 가능한 국가-정치체계의 제도적 방안에 대해, 국민에게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보수의 성찰적 전환의 필요성
1차 전환 국면에서 한국의 보수진영의 성찰적 전환이 새로운 대한민국을 만드는 필요조건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윤석열이 보여준 민주주의와 헌정질서의 파괴 시도가, 윤석열의 일탈만이 아니라, 50여년의 민주화과정에서도 변화하지 않은 보수정당 일반의 본질 중에 내재해있음에 대한 성찰이 필요하다.
그동안 보수는 극우반공 보수, 영남 지역주의적 보수, 외환위기와 이명박정부 이후 이른바 ‘신자유주의적’ 시장 보수로 자신을 지켜왔다. 그런데 여기에 정치를 부정하고 군사적 수단으로서의 계엄과 그것을 정상화하는 탄핵을 반대하는 보수로서의 이미지가 중첩되고 있다. 이런 점에서, 내란의 동조자 혹은 탄핵반대자가 되는 것을 넘어서서, 민주주의의 철저한 수호자로 변화하고, 대한민국의 새로운 경제적, 사회적 위기에 대해 전향적 입장을 수용하는 개혁적 보수로 전환해야 한다.
나는 오래전부터 박세일 교수가 주장했던 ‘공동체 자유주의’가 보수의 이념이 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왔다. 박형준 부산 시장이 주장하는 ‘보수적 공화주의’도 좋다. 이렇게 보수가 진일보한다면, 진보도 진일보할 것이다.
민주주의의 내부로부터의 침식과 약화는 언제나 보수의 퇴행에서 비롯된다. 신진욱 교수가 언급한 바와 같이, “민주주의와 헌법질서의 전복이 정치의 한 수단이 될 수 있다는 사고가 한국 보수정치에 팽배해 있다는 사실이야말로 ‘12.3 쿠데타’의 배경이다.”
이런 점에서 발본적 변화가 필요하다. 정치적·사회적 갈등을 보는 극단적 시선은 이미 광화문의 보수집회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 야당을 ‘범죄자 집단의 소굴’로 보거나, ‘패악질을 일삼은 망국의 원흉’이나 ‘자유민주주의 내부에 암약하는 반국가세력’, ‘대한민국 체제 전복 위협’으로 보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보수 시민사회 집회에서 일상적으로 드러나는 구호이고 인식이다.
문제는 이것이 보수정당 내부의 일부 분파의 인식으로 자리하고 있는 것도 민주주의의 다원성 상 인정할 수 있다. 그러나 12.3 쿠데타는 통치자가 바로 이러한 극단적 인식을 자기화하고 그것에 기초하여 반정치적 군사쿠데타를 시도했다는 것이다. 12.3 쿠데타에서 나타난 바와 같이 경쟁자에 대한 악마화는 윤석열에게서는 ‘반국가세력’처단으로 나아갔다.
미국에서 트럼프 지지자들이 의사당을 난입하는 것은 반(反)의회적 시민반란으로 나타났다고 하면, 12.3 쿠데타는 통치자에 의한 군사적 반란으로 나타난 것이다. 이처럼 정치적 경쟁자를 악마화하는 인식에서 발원한 것이고, 이런 근원적 인식전환이 보수에게 요구된다. 당연히 정치적 경쟁자에 대해 악마화하는 인식은 진보 내에서도 극복될 필요가 있다. 이런 변화 속에서 다원적 정치체계가 비로소 설 수 있다.
‘87년 체제’를 넘어서려면 대중참여 공간 확대돼야
다음으로, ‘87년 체제’를 넘어서는 것은 국가통치와 정치에 대한 대중참여의 공간을 확대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 정치의 대중적 개방화를 향한 제도 설계가 필요하다. 1987년 6월 민주항쟁은 사실 탈권위주의적 열망에 기반한 시민이었다. 그리고 그때의 시민은 대표자인 정치인이나 대표자를 감시하는 시민단체에 대한 ‘위임형’ 시민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높은 정치적 의식으로 무장하고 주체화된(empowered) 대중이다. 이들은 이전처럼 레거시 미디어의 교양에 의해 순치되는 대중이 아니라, 뉴미디어를 통해 연결되고 수평적으로 소통하고 행동하는 지민(知民)이자 정치화된 깨어있는 시민이다.
원래 시민의 정치화는 진보적 지향을 갖는 노사모에 의해 선도되었다. 그러나 이후 일련의 정치적 격변을 겪으면서, 보수적 대중도 정치화된 시민이 되었다. 이런 점에서 보수와 진보를 가리지 않고, 대중은 이전과는 다른, 1987년과는 다른 정치의식을 갖고, 높은 참여의식을 갖는 존재가 되었다. 이런 점에서 ‘87년 체제’의 대의민주주의는 직접 민주주의적 요소를 담아내는 방향으로 개방화해야 한다. 그리고 그런 제도적 비전을 만들어가야 한다.
다음으로 무엇보다, 공고화된 민주주의의 위기는 언제나 대중의 높은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사회경제적 불평등과 민생고이다. 정치가 이를 담아내지 못할 때, 그것은 다양한 정치적 반동들로 나타나게 된다. 특히 지구화의 현 흐름은 모든 국민국가의 경제를 불안정하게 하고, 격차와 불평등을 키우고 있다. 이에 대해서 트럼프식의 폐쇄적 자국 우선주의나 영국의 브렉시트 같은 식의 대응이 나타나고 있다.
서구의 경우, 이런 사회경제적 불만이 난민이나 이주민에 대한 혐오와 차별 정서로 왜곡되고 있다. 극우화되는 정치지도자들은 대중의 사회경제적 불만을 퇴행적인 방식으로 담아내고 정치자원화한다. 12.3 쿠데타 이후의 전환과정에서, 우리 사회가 지구적인 이런 사회경제적 불안정 현상에 대응하여, 더욱 전향적인 복지와 민생경제를 만들어낼 수 있다면, 그리고 사회권의 지평을 넓힐 수 있다면, 지구적인 민주주의의 퇴행의 시대에, 우리가 세계사의 새로운 경로를 개척하는 것이 될 것이다.
교육불평등 개혁의 필요성
다음으로 사회적 대전환의 비전을 담아내는 ‘87년 체제’의 재설계가 필요하다. 이미 많은 경제적 차원에서 확대된 불평등과 격차는 사회적·계급계층적 차원에서 ‘분리’의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부모 세대의 경제적 격차는 교육을 통해 자녀 세대의 교육격차로 이어지고 있다. 교육이 절망이 되어, 부동산 문제와 함께 저출산이라는 국가적 인구위기를 낳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선진국이 되기 위해 추격 과정에서의 우리들의 장점들이 관성처럼 확대되다보니, 이제 선진국이 된 지금에는 ‘대립물’로 전환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이제 민주화 시대가 민주화 이후의 시대로 전환된 지금, 그리고 후진국에서 선진국으로 변화된 지금, 이제 그에 상응하는 우리 사회의 사회운영원리의 개혁이 필요하다. 1차 전환 국면에서의 희망의 플랜은 바로 이러한 사회적 차원을 포함해야 한다.
그리고 이런 대전환의 비전을 만들어가는 과정 역시, 국민적 참여 과정이 되어야 한다. ‘87년 체제’를 넘어서는 전환적 비전을 만들어가는 국민참여적 과정이 전개되어야 한다. 즉, 이 과정은 국회로 논의가 제한되거나 전문가만의 논의가 아닌 ‘정치의 사회화’ 과정이 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새로운 공론장이 필요하다. 정치인과 전문가, 시민이 한데 어우러져 생명이 다한 ‘87년 체제’를 넘어설 대안적 미래를 그려보자. 12.3 쿠데타를 계기로 시작된 거대한 변화가 대한민국의 대전환과 미래로 나아가는 길이 되기를 바란다.
글·조희연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교수로 2014년 재직 중에 서울시 교육감으로 선출되어, 22~23대 교육감을 지냈다. 주요 저서로 『투트랙 민주주의』(1-2권), 『박정희와 개발독재시대』, 『한국의 국가· 민주주의·정치변동』, 『일등주의 교육을 넘어』 , 『병든 사회, 아픈 교육』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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