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누군가를 파악할 때 생각보다 많은 것이 필요치 않을 수 있다. 아니, 그렇다고 생각한다는 편이 맞을 것이다. 아주 직관적으로는 외형에서부터 그가 사용하는 몇몇 단어들, 그의 몸에 걸친 무엇들, 그의 사소한 행동들, 이 몇 가지만으로도 그가 어떠한 과거를 살았는지까지 짐작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은 사회의 약속이 작용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 약속이 역사와 사회, 윤리와 정치적 함의까지를 꾹꾹 눌러 담은 것이라면 누군가를 헤아리는 과정은 훨씬 쉽고 빠르게 이루어질 수 있다. 이를 통해 한두 가지 특징만으로 누군가를 잘 아는 이처럼 만드는 것, 분명 착각이지만 꽤나 편리한 방법이긴 하다. 특별한 설명을 부연하지 않아도 떠올릴 수 있는 어떤 모습, 한국 영화 속에서 그려지는 한 세대는 ‘엘리트’ ‘운동권’의 함의를 적극적으로 경유하며 오랫동안 고상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
한국 사회에서 역사적·정치적 혼란과의 동행, 그리고 실천이 세대의 분기(分岐)와 관계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지만 모든 세대가 이 안에서 설명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식민지기의 청년이나 4.19세대, 87세대와 같은 명명은 그 시기에 놓인 젊은이라는 조건만으로 부여받는 명칭이 아닌, 그 사회에서 요구하는 지위와 책무를 업고 문제를 해결해나갈 이들이 얻는 훈장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기대를 마땅히 받아 수행한 이들, 시대적 사명에 공명했던 이들은 적극적으로 의미화되며 오랜 보상을 받았다. 특히 87세대는 바로 이 세대적 책임과 정치적 명운의 깊은 관계를 유지하며 현재에 이르렀다. 이들에게는 대학생 즉 엘리트 지식인이라는 선망 어린 지위가 부여되었고 이를 기반으로 삼아 민주화에 투신했다는 것으로 이들의 과거는 진정성과 도덕성으로 갈음하여 ‘존중’되었다. 고뇌하는 지식인, 이타성을 바탕에 둔 희생, 미처 돌보지 못한 이들 혹은 이런 상황에 대한 죄책감, 스스로 비겁함을 느끼는 고통에 대한 연민 등은 87세대 운동권에서 파생된 정체성의 기제로 자리 잡았다.
이 모습을 한국 영화에서 가장 먼저 확인할 수 있던 것은 5.18 민주화 운동 이후 살아남은 자의 죄책감에서부터였다. 이를 담고 있던 첫 단편 영화 <칸트 씨의 발표회>(1987)에서 ‘칸트’가 보여준 광기의 정체는 <오! 꿈의 나라>(1989)에서의 종수로 인해 명확해졌다.
갑작스레 아는 형을 찾아 미군 부대로 들어온 종수는 전남대생이었다. 광주 시청에서 도망쳐 나온 그는 광주의 상황을 묻는 이들에게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고 한국인을 향한 미군들의 폭력을 바라보며 괴로워했다. 그가 가진 죄책감은 스스로를 갉아먹을 뿐 어떤 행동으로도 이어지지 못했지만, 이 죄책감은 곧 ‘우리’가 가져야 할 것으로 치환되어 있었다.
이상과 현실의 괴리가 커질 때 숨어들었던 공간들
영화 <꽃잎>(1996)에서 의문사한 친구의 동생을 찾아다니던 대학생들은 ‘우리들’로 지칭되었고 그들의 의무감과 슬픔은 곧 우리들의 것이 되었다. 너와 나의 일이 아니었다고 생각할 수 있음에도 괴로워하던 그들의 모습은 그들이 디디고 있던 상황의 폭력성으로 인해 분노해야 한다는 당위를 불러들였고, 비록 깊숙이 개입하지 못한 채 배회만 했을지라도 그 원인인 죄책감을 공감의 영역으로 끼워 넣을 수 있었다.
이러한 공감의 정치는 노동 현장을 그린 작품들에서도 드러났다. 87세대 민주화의 기치가 민중과 공명했다는 점을 생각할 때, 87 이후 일렁이던 789 노동자 대투쟁을 담론의 중심으로 옮겨오고자 했던 당대의 분투를 떠올릴 때 운동권의 고민하는 공간이 노동 현장으로 이동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상과 현실의 괴리가 커질 때 혹은 자신의 신변에 위협이 닥쳤을 때 운동권 대학생들이 택했던 것은 자신의 몸으로 삶을 꾸려가는 이들의 공간에 숨어드는 것이었다. 그들이 갔던 곳은 가리봉동 벌집촌에 살며 주변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의 틈이거나(<구로 아리랑>(1989)), 목숨을 내놓고 노동하는 사람들이 모여 있는 강원도의 폐광촌(<그들도 우리처럼>(1990)), 노조를 꾸리려 분투하는 여공들이 모여있는 공단(<아름다운 청년, 전태일>(1995)) 등과 같이 글로 보아온 이들의 삶을 가까이서 바라볼 수 있는 장소였다.
영화 속에서는 이곳에 자리 잡은 그 누구도 위험한 노동 앞에 선 이들과 섞이지 않았고 착취의 연쇄를 끊고자 싸우지 않았지만, 주목받지 못했던 이들에게 머무른 시선 그것만으로도 운동권은 넘치는 옹호를 받을 수 있었다. 바뀌지 않는 현실에 그리고 이곳에 섞일 수 없는 자신의 처지에 절망하는 쪽을 택하는 연민에도 이렇게 두터운 의미가 얹혔다.
짚어보아야 할 것은 운동권에 대한 이해의 시선, 그러니까 자기 연민을 곧 우리 모두의 아픔이자 죄책감으로 대체하던 그 심상이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진정성의 가치로 자리 잡았다는 점이다. 앞서 언급한 영화들은 동시대성을 담보로 동의를 구하는 것이기도 했다. 그렇게도 아파했고 배회했지만 바꿀 수 없는 현실적 무게는 결국 패배로 명한다 해도 위로와 함께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약 40여 년이 지난 지금, 운동권이라는 표상이 고뇌하는 이들의 필요조건처럼 자리한다는 건 분명 감정의 잔여를 세탁한 결과이다. 운동권으로 짐작할 수 있는 표지만으로도 어떤 인물이 도덕적 우위를 점하는 것은 죄책감과 연민 그리고 그에 대한 공감을 긍정적인 좌표로 가리킨 값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현실이건 아니건 운동권의 아픔은 약자를 보호하고 부조리에 분노할 수 있는 방향으로 진보했을 것이라는 믿음, 이는 고상한 인물을 구성하며 숭상할 수 있는 손쉬운 전제였다.
가령 이런 것이다. <벌새>(2019)에서 민중가요 ‘잘린 손가락’을 부르는 학원 선생 영지는 적어도 팔뚝질을 하며 서울대를 외치는 담임 선생과는 다를 것이라는 믿음을 줄 수 있다. 영지는 세상을 말도 안 되는 일이 너무 많은 곳으로 규정하면서 내가 나를 사랑하는 것이 힘든 일이라 말해주고, 폭력은 견디는 것이 아니라 맞서 싸워야 한다는 것을 알려주는 이였다.
더 이상 만날 수 없게 되었음에도 은희의 삶에 가장 큰 영향을 미쳤던 것은 ‘잘린 손가락’을 부르는 이의 목소리였던 것이다. 영지처럼 80년대를 떠올려야 이해되는 이를 지나 90년대 후반쯤의 학번이었을 <해야 할 일>(2024)의 준희도 다르지 않았다.
갑작스레 인사팀으로 발령이 나면서 준희는 함께 일했던 이들을 어떤 명분으로 해고할지를 고민해야 한다. 그저 자신의 일일뿐이라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2016년의 촛불집회를 보며 대학 때의 집회를 떠올리고 자신과 함께 활동했던 선배가 지금은 보수언론에 들어간 상황을 비꼬는 이에게 그것은 단순한 일이 될 수 없었다. 게다가 힘들 때 찾는 어머니가 자식에게 미안한 마음을 가졌으면서도 스스로 옳다고 믿은 일을 끝까지 지켰던 전 세대의 운동권이라면 더욱 그러할 것이다.
지난 흔적으로 정의의 선취를 누리는 것이 과연 정당한가?
이렇게 운동권은 패배의 부스러기까지도 어둠에 손을 내미는 보호막처럼 위치짓고 스스로를 구원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기대했던 모습으로 남지 않은 이들은 마치 처벌을 받듯 악랄하게 그려지며 대상화되었다. 영화 <제비>(2023)에서 과거 운동권 선배였던 제비를 기다리는 작가와 이에 대비하여 돈을 지상 최대의 가치로 둔 정치인이나 기업인들은 하나의 과거에서 전혀 다른 모습으로 파생된 타락의 다른 이름들이었다.
이들의 속물성을 굳이 내보인 것은 적어도 ‘우리’로 묶일 수 없는 외부자를 규정하기 위한 것이었을 테다.
<나의 피투성이 연인>(2023)에서 과거 운동권이었던 원장의 치졸함은 운동에서 손을 떼고 유학을 다녀와 집안의 도움으로 학원을 연, 운동권의 경로와 빠르게 멀어졌던 이에 대한 내부 평가처럼 보인다.
자신에게 필요한 부분을 충족시켜주는 이에게는 누구보다 친절하게, 그것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고 생각할 때는 빠른 태세 전환을 보이는 원장의 면면들은 오롯이 투신하지 않은 이에 대한 혐오의 시선까지 읽어낼 수 있다. 내부를 벗어난 이들에 대한 부정, 이것으로 내부는 더욱 결속을 다졌고 긍정의 입지를 넓혀갔다.
과거 한 시대의 주인공이었던 엘리트를 그리는 영화 속 세계는 그들의 가치가 아직도 유지될 수 있을 것이란 믿음이 깔린 곳이었다. 희생적이며 죄책감과 수치심을 느끼고 결국 해야 할 일을 망치더라도 도저히 그렇게 할 수 없는 양심이 앞서는 인물은 과거의 한 세대로 선택되어 긴 시간 동안 추앙받고 있다.
그러나 이처럼 손쉽게 인물을 구성하는 전사(前史)로서의 운동권은 이것이 없어도 당연히 이타적일 수 있는 많은 범인(凡人)들의 선의를 무력화시킨다. 적어도 이들의 이타심은 어떠한 이유도 없이 타자를 위할 수 있는 이들의 그것보다 개연성이 크다고 믿는 까닭이다.
이젠 깨져도 이상하지 않을 신뢰를 안고, 많은 인물들은 아직도 영광 어린 역할을 차지하고 있다. 과거의 가치가 현실에서 어떤 방향으로 선회했건 그것을 지키는 이들이 얼마나 남았건 지난 흔적으로 정의의 선취를 누리는 것, 과연 정당한가?
글·송아름
영화평론가, 영화사 연구자. 한국 현대문학의 극을 전공하며, 연극·영화·TV드라마에 대한 논문과 관련 글을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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