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집단 기억의 또 다른 편린
비상계엄이 선포되자마자 많은 사람들이 국회로 몰려들 때, 내 머릿속에는 유혈 사태가 그려졌다.
계엄군은 그들이 교육받은 매뉴얼에 따라 저항하는 시민들에게 실탄을 발사하고, 고열에 녹아 휘어진 철덩어리처럼 늘어진 육신들이 아직 살아있는 자들의 품에 질질 끌려 시위대 저편으로 옮겨지고, 늙은 여인들이 통곡하고, 말없이 하늘을 올려다보는 늙은 신사들의 비애를, 온 얼굴에 파인 주름이 달빛 속에서 더욱 깊은 음영을 드리우며, 젊은이들은 흥분해 길가의 모든 사물을 무기로 개조하고, 이내 여기저기서 살육의 비명이 들리는 그런 아비규환을 나는 상상했다.
대한민국 현대사에 대한 상처의 트라우마를 갖고 있는 사람이라면 그런 상상부터 했으리라고 나는 감히 예단한다. 아니, 어쩜 내가 군부 독재를 경험해보지 못한 세대이기에 과도한 상상력을 발동시켰을 수도 있겠지만, 나의 상상이 객관적이지 않거나 근거가 없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내 상상대로라면, 제멋대로 흘러 비정형으로 눌어붙은 바닥의 핏자국과, 미처 밟히지 못한 살점들의 징글맞은 입체감이 아스팔트 위를 가득 메워, 이제 더 이상 아무 말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이들의, 비참하다고 하기에는 너무 순간적이고, 숭고하다고 하기에는 너무나 허망한 삶의 끔찍한 잔향을 풍기며 그들의 부재를 증명할 것이었다.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죽음에 대한 공포에 질려 순한 양처럼 계엄군의 통제를 과도할 정도로 신실하게 따르게 되었을 것이고, 어머니들은 자식들을 시위대에 합류시키지 않으려 현관 문턱에서 앞치마를 맨 채 무릎을 꿇었을 것이고, 아버지들은 말없이 출퇴근을 반복하며 계엄군의 입장만을 대변하는 신문을 읽는 것밖에는 딱히 할 수 있는 일이 없을 것이고, 딸들은 거리에서의 성추행이나 성범죄를 당할 것을 걱정하는 부모에게 반항했을 것이고, 아들들은 가족에 대한 사랑과 국가에 대한 본능적 책임감, 말하자면 민족정신 같은 것 사이에서 치열하게 갈등하며, 계엄 상황에서조차 포탄을 맞지 않을, 백열전구가 켜진 간이 포차에서 친구들과 삼삼오오 모여 독한 술을 마시고 또 마셨을 것이다. 그들의 콧속에서 올라오는 알코올 냄새는 그 시대의 집단 기억의 또 다른 편린으로 추억되었을 것이다.
우리가 오늘의 이 ‘필연’에 이르기까지
그러나 그런 고전적인 비극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 비극이 우리 민족에게 너무나 익숙한 것이기에 그런 상황을 만들 시 계엄이 실패할까봐 권력자들은 걱정했던 걸까, 아니면 단순히 대통령이 정말 ‘철이 없어서’ 그가 세운 작전이 아주 말도 안 되는 것이라 현실성이 전혀 없어서 그랬을까, 그것도 아니라면 ‘일부러 게으르게 행동한’ 계엄군 청년들의 고요하고도 엄중한 항명이 상부로부터 제지받지 않았기에 가능했던 공동체적 기적이었을까.
셋 중 어느 것이든, 나는 감사하는 마음이다. 그러나 나의 감사가 그렇게 드라마틱하지는 않다. 나는, ‘계엄’하면 생각나는 필연적인 현상들을 비껴간 요즈음의 상황 속에서 또 다른 필연을 본다. 역사를 논할 때에는 가능세계(~했다면 이라는 가정으로 상정하는 세계)가 의미 없기에, 역사적 작용들로 인해 이미 존재하게 된 것이 곧 필연이다. 해서 나는 내 앞에 놓인 현상에 늘 집중한다. 역사의 주인은 다수이지, 개인이 아니다. 역사의 변수는 다수의 사유와 인격이지, 개인의 리더십이 아니다. 해서 나는, 역사적 필연을 대할 때 늘, 모든 이웃에 대해 묵상한다. 우리가 오늘의 이 ‘필연’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함께하는 시공간을 스쳐 지나갔을 모든, 가시적이거나 비가시적이거나 내적이거나 외적인 변수들이 만들어낸 함수를 사랑하는 마음을 먹는 것이다. 삼차함수가 아니라 한 1억차 함수쯤 되겠다.
계엄 선포 당일, 나는 제주도에서 휴가를 보내고 있었기 때문에 국회 앞에 가지 못했다. 애타는 마음으로 몇 시간 뒤 출발하는 새벽 비행기를 마구 알아보는데, 비행기 좌석이 초 단위로 매진되기 시작했다. 결국 내가 우물쭈물하는 사이 새벽 비행기는 만석이 되었고, 기적적으로 취소표가 하나 나와 아침 비행기를 예약할 수 있었다. 그 후 약 30분 뒤에 계엄령은 해제되었다. 한시름 덜었다 생각하고, 가격이 조금 더 저렴한 저녁 비행기로 예약을 바꾸고 바닷가를 거닐며 많은 생각을 했다.
‘이 허망한 상황은 뭘까?’ ‘이러려면 왜 계엄이라는 엄청난 카드를 꺼낸 걸까?’ ‘대통령은 정말, 아무런 생각이 없는 걸까?’ 나중에 들려오는 속보를 보니 내 생각이 크게 틀린 것은 아니었다. 대통령은 자신의 지위와 그 지위에서의 업무 수행을 ‘놀이’로 생각했던 것이었다.
즉, 이 자에게 계엄은 ‘이 짜증나는 백성들, 무섭게 해!’ 정도의 의도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적어도 이 자 개인의 의식 구조만 따져보자면 말이다. 국민에게 계엄은 엄청난 것이었지만, 권위주의와 선민의식에 젖어 있으며, 검사로서 지닌 불특정 다수에 대한 생사여탈권을 빌미로 타인 위에 군림하는 것이 이 자에게는 그저 손을 씻고, 세수를 하고 카페에 가서 커피를 마시는 정도의 일상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이러한 깨달음은 나에게 공포도, 분노도 유발하지 않았다. 건국 이후 줄곧 병적 엘리트주의와 천민 자본주의, 이 둘의 합작으로 만들어진, 민주사회를 빙자한 계급주의 사회의 비굴한 전통에 대한 싸늘한 비애감이 내 가슴 속을 가득 채웠다.
비굴한 시민을 양산했던 시대정신
나는 우리나라의 비극을 다소 독특한 관점에서 고찰한다. 가난한 나라였던 시절, 억척스런 부모들은 자식들에게 “너희들은 나처럼 살지 말아라”라고 수없이 말했다. 이 말의 의도는 물론 좋은 것이지만, 특정 의식이 집단화되게 된다면 그것은 사회병리현상이 되기 십상이다.
선거가 아니라 성적을 통해 반장을 시키는 학교 문화, 모범생을 과하게 우대하고 모범생이라면 인성까지 좋을 것이라고 예단하는 학교 문화는 당시 우리나라를 지배했던 학력 만능주의의 훌륭한 예시이며, ‘사’자 직업이 잘 먹고 잘 산다는 의식과 유교의 입신양명 사상이 결합한 결과로서 학력만능주의, 물질만능주의, 그리고 전통적 유교 사상의 다양한 측면들이 뒤섞인, 개발도상국 시기 대한민국의 시대정신이 만들어졌다.
이러한 시대 정신은 비굴한 국민을 양산했다. 여기에서 비굴하다 함은, 자기 자신의 가치관과 인생관, 자기 삶의 역사를 소중히 여기는 법을 잊고 그저 ‘높으신 분’ 앞에 고개 숙이고 보는 문화가 탄생했다는 것이다. 모든 사람이 다 똑같이 소중하다는 것을 관념적으로는 알지만, 실제 생활에서는 더 많이 배운 사람, 더 많이 가진 사람, 더 ‘때깔 좋은 사람’ 앞에 작아지는 것이 마치 제2의 본능처럼 된 생물들이, 가난하고 그렇기에 억척스러울 수밖에 없었던 대한민국 민초들의 병든, 그러나 그들 스스로 병든 것이 아니기에 비극적인, 영혼의 한 단편이었던 것이다.
권위의 감옥에 갇힌 이가 권좌의 감옥에서 춤을 추고
그런 영혼들이 사회의 중하위 계층 대부분을 점유하고 있던 시대에 윤석열은 서울대 법대를 갔고, 검사가 되었으며, 검찰 조직 내에서도 나름대로 승승장구했다. 이 자는 무서울 것도, 거리낄 것도 없이 남 앞에서 다리 벌리고, 술 내놓으라고 하고, 배를 내밀고 시뻘건 얼굴로 고함을 질러대고 다 풀어진 넥타이로 아무에게나 어깨동무를 하며 살았다.
그런 식의 무비판적인 삶이 몸에 배인 자가, 대통령이라는 지위에 반드시 요구되는 보편 인간에 대한 사랑과 연민, 인격과 생명을 각별히 존중하는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겠는가. 불가능한 일이다. 우리는 권위의 감옥에 갇힌 이를 권좌의 감옥 위에 올려놓았다. 이중의 감옥 속에서 죄수는 춤을 추었다. 그 춤을 보는 국민은 그를 비웃었고, 그가 계엄이라는 폭력을 행했을 때에도, 심지어 ‘고요한 항명’을 했던 계엄군들에게조차도 그는 존중받지 못하는, 구시대의 유산, 유명한 책 제목을 빌리자면 ‘오래된 미래’가 되어 있었다.
나는 그가, 국민이 그를 얼마나 경멸하는지를 깨닫기를 바라지 않는다. 다만 그가 21세기 민주 국가 시민으로서 얼마나 가당찮은 삶을 살았는지를, 감옥 속에서 그 좋아하는 술을 한 방울도 마시지 못하는 고통 속에서 깨닫기를 바랄 뿐이다.
계엄 해제 이후에도 촛불 집회는 이어졌다. 나는 그간 젠더(특히 가짜 미투)관련 취재를 하며 2030 남성들의 우경화 정서가 상당하다는 점을 미리 알고 있었기에, 광장에 나오는 이들은 대부분 4050 남녀일 것이라고 막연히 예상했었다.
그러나 내 눈으로 확인한 결과는 달랐다. 20대, 심지어는 10대 청소년들까지도 광장에 나와 창의적인 복장과 기발한 소품으로 분위기를 한껏 달구고 있었다. 나는 새삼스럽게 깨달을 수 있었다. 우리 국민은 분열할 필요가 없는 국민이라고. 그리고, 국민은 국민끼리 스스로 만들어낸 갈등에 의해 분열한 것이 아니라, 일제 시대 부역자 청산 미완성으로부터, 그에 이은 군부 독재로부터 시작된 정치권의 분열이 권력의 맛에 맞게 분열시킨 것이라고. 어쩜, 우리 국민은 진정으로 분열되었던 적은 한 번도 없는 한민족이라고.
그런 생각이 들자 비로소 마음이 놓였다. 정치·시사 계통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긴장하며 산다. 그리고 그 긴장을 해소시켜 주는 것은 한 잔의 커피도, 달달한 케이크도, 맛있는 음식도 아닌 독자와 시청자들, 크게는 국민, 더 크게는 역사의 긍정적 흐름 또는 그러한 조짐이다.
우리 젊은 시위를 하나의 예술로 해석하며
나는 정치·시사 방송인이며, 칼럼니스트이고 저술가이다. 현직 서양화 작가이기도 하다. 서양화 작가로서 말한다면, 우리의 시위는 하나의 멋진 퍼포먼스였다. 현대미술은 캔버스라는 네모 모양의 경계를 초월한다. 행위가 예술이 되기도 하고, 여러 사람의 집단적 행동이 예술이 되기도 한다. 그 이유는 이렇다. 현대미술은 단지 시각적 아름다움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미술 그 자체로서 동시대의 문화·정치·사회현상들을 비평하고 이게 감각적으로 개입하는 행위이다. 그런 면에서 나는, 그날의 시위, 그리고 오늘까지도 이어지고 있는 이 젊은 시위를 하나의 예술로 해석하는 바이다.
우리나라는 모든 면에서 비정상적일 정도로 빨리 발전한 나라이다. 모쪼록, 이번 계엄 사태를 계기로, 그것이 있기 전보다 더욱더 아름다운 역사를 만들어 나가기를 염원하며 글을 마친다.
글·권윤지
대학에서 철학과 서양화를 공부했다. 저서로는 2023년 출간된 『파괴할 수 없는 것』이 있고, 개인전을 3차례 가졌다. 진실과 인간에 대한 사랑을 바탕으로 세상을 예술가적 시선으로 바라보고, 예술적 감수성을 통해 세상에 도움이 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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