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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장을 나온 동물들의 이야기
공장을 나온 동물들의 이야기
  • 장윤미 | 문화평론가
  • 승인 2024.04.30 1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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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훔친 돼지만이 살아남았다』, 향기 외, 2021, 호밀밭

1. 고기와 생명 사이

인간에게 동물은 두 가지로 나뉜다. 먹을 수 있는 것과 먹을 수 없는 것. 먹을 수 있는 것은 고기라 부르고 먹을 수 없는 건 반려동물 아니면 야생동물로 부른다. 사랑하기 때문에 반려동물을 먹지 않고, 문명인이기 때문에 야생동물을 먹지 않는다.

또 하나는 깨끗한 동물과 더러운 동물. 최첨단 시스템 아래서 자라 도축된 동물은 깨끗하고 위생적이지만 관리와 통제 영역에서 벗어난 동물은 잠재적 바이러스 덩어리나 다름없기에 병에 걸렸을 경우 인간의 영역으로부터 최대한 먼 곳으로 추방하거나 살처분해야 한다.

닭, 돼지, 소가 고기가 되는 것을 의심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애초에 고기가 되기 위해 태어난 동물 아니냐며 말하는 사람도 많다. 중요한 건 그들의 삶이 아니라 고기의 등급과 맛이므로. 마블링이 많을수록, 색깔이 붉을수록, 도축 연령이 낮을수록 맛있는 고기라는 믿음을 근거 삼아 사람들은 형태 없이 붉은 살덩이만 진열된 정육 진열대 앞에서 고기를 고른다.

하루에 수천억 마리의 동물이 죽어 고기가 되는 세상에서 고기가 되지 않은 동물들이 있다. 돼지 새벽이, 암탉 잎싹이, 그리고 다섯 마리 수소다. 이들은 다른 동물처럼 공장식 축산 시스템 아래서 태어났지만, 본능대로 살다 죽을 수 있도록 허락된 생추어리(Sanctuary)(1)에서 인간의 돌봄을 받으며 자연스럽게 늙어가고 있다.

고기가 될 동물에게 이름을 부여하는 것, 보금자리를 만들어주는 것, 늙어 죽을 때까지 돌보는 행위는 욕망 추구와 착취가 생존 방식인 자본주의 세계관 아래서 그저 낯설기만 하다. 그러나 새벽이, 잎싹이, 다섯 마리의 꽃풀소가 공장이 아닌 풀밭을 뛰어다니며 인간과 살을 비비는 모습을 보게 된다면 당신은 아마도 종과 종 사이, 생명과 자본 사이에 괄호 쳐 있던 폭력과 잔인함을 읽어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깨달음은 ‘지금 내가 먹는 것은 무엇인가?’의 질문에 대한 작은 대답이 될 것이다.

 

2. 공장 아닌 농장에서 사는 새벽이

‘새벽이 생추어리’는 우리나라 최초 생추어리로, DXE(동물해방단체) 활동가들이 양돈장 분만사에서 공개 구조한 돼지 새벽이를 위한 공간이다. 아기 돼지 하면 떠오르는 건 두 가지다. 분홍 피부와 동그랗게 말린 꼬리. 그러나 새벽이는 둘 다 가지지 못했다. 양돈장의 열악한 환경 때문에 새벽이의 피부는 곰팡이균으로 썩어갔고, 태어나자마자 마취도 없이 잘린 탓에 꼬리는 뭉툭했다.

공장식 축산 시스템에서 태어난 돼지들은 태어나자마자 마취제 없이 어금니가 뽑히고, 전기 펜치로 꼬리가 잘린다. 이는 새끼 돼지들이 서로를 물어뜯는 것을 막기 위한 조치다. 그러나 돼지의 안전을 위한 조치라고 생각하면 곤란하다. 잠재적 고기가 될 돼지에게 상처는 경제적 손실로 직결되기에 이를 방지하기 위해서 가장 간단하고 돈 들지 않는 방법을 선택한 것뿐이다.

새벽이는 해가 뜨면 더위를 피해 진흙 목욕을 하고, 나른한 오후에는 코로 땅을 파며 호기심을 해결하고, 해가 지면 집으로 돌아가 잠을 청한다. 하지만 이 일상이 언제까지 이어질지는 아무도 모른다. 국가 이익과 직결되는 ‘구제역 청정국가’ 지위를 지키기 위해서 과학적 근거 없이 이루어지는 살처분과 예방적 살처분 명령이라도 내려지면 새벽이는 산 채로 묻혀야 하기 때문이다. 새벽이 생추어리의 위치는 현재 비공개다. 공개하지 못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어떻게 해서든 살아남아 전략적 예방책이라는 이름으로 자행되는 살처분의 끔찍함과 동시에 ‘근거 없음’을 오로지 ‘살아 있음’으로만 증명해야 하기 때문이다.(2)

 

3. 고기 아닌 흙이 된 잎싹이

잎싹이는 도계장으로 실려 온 산란계 사이에서 구조된 암탉이다.(3) 구조 당시 막 병아리 태를 벗기 시작한 크기라 고기용으로는 값어치가 없어 도축장 컨베이어 벨트에 올라가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가 있을 공간은 없었다. 공장이든 도계장이든 돈이 되지 않는 잠재적 고기는 도태(4)가 원칙이기 때문이다.

한국의 양계업은 표면적으로는 개인 사업이지만 (대)기업의 위탁을 받은 곳이 대부분이라 기업의 논리에 의해 운영이 좌지우지된다. 대량생산을 이유로 기업은 가능한 많은 병아리를 양계장에 밀어 넣고 농장주는 어쩔 수 없이 몇만 마리의 병아리를 빽빽하게 계사로 밀어 넣는다. 다른 나라에 비해 높은 사육 밀집도, 빠른 도축 시기는 예전부터 문제점으로 꼽혔지만 본청이나 다름없는 기업과 기업에 힘을 실어주는 국가 정책에 개인이 저항한다는 건 무모한 일이나 마찬가지다.

농장 운영에 있어 사룟값은 가장 큰 비용을 차지하는데 닭의 출하 시기, 즉 도축 시기가 하루라도 미뤄지면 소비되는 사료양은 그만큼 늘어나고 이는 고스란히 농장주의 경제적 손실로 이어지기 때문에 농장주는 어쩔 수 없이 기업의 논리에 맞춰 가능한 많은 닭을 생산해야 하고, 최대한 빨리 죽여야 한다.

닭고기를 가장 많이 먹는다는 한여름에 살아남은 잎싹이는 활동가가 마련한 마이크로 생추어리(개인이 운영하는 작은 보호소)에서 지내다 같은 해 가을 밀양의 한 농가에 입양되었다. 그리고 2년을 더 살다 2023년 야생 담비에게 습격당해 죽었다.(5) 고작 2년밖에 자유를 누리지 못한 꼴이니 이러나저러나 어차피 죽을 목숨이었다고 말한다면, 그건 지극히 인간 중심의 편협된 생각이다. 인간의 두 해와 닭의 두 해는 같지 않을뿐더러 공장에서 태어나 병아리 태를 벗기도 전에 공장에서 죽임을 당한 것과 자연에서 살다 자연에서 죽은 것은 결코 같다고 말할 수 없다.

 

4. 죽음 아닌 삶이 도움인 꽃풀소

머위, 메밀, 부들, 엉이, 창포는 동물해방단체 ‘동물해방물결’에 의해 구조된 수소들이다. 구조 전 살던 곳이 불법 개 농장이었으니 얼마나 열악했을지 짐작만으로도 충분하지만 공장식 축산에서 지냈다고 해도 이들의 삶이 별반 다를 것 없긴 마찬가지다. 도축 가능한 시기 직전까지 고기양을 늘리기 위한 목적으로 본능에 어긋나는 동물성 사료를 강제 주입 당하고, 몸의 무리를 견디며 살다 2년도 채 못 살고 도축될 테니 말이다.

소 역시 닭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쓰임에 따라 젖소와 육우로 구분되는데 젖소는 우유용, 육우는 고기용이다. 우유를 얻기 위해 암소는 임신과 출산을 반복해야 하는데 이를 위해 인간은 젖소를 강제 임신시켜 우유를 착취하고 우유 생산량이 떨어지면 가공용 고기로 도축한다. 젖소에서 제외된 암소와 우유를 생산할 수 없는 수소는 육우가 되어 풀 대신 성장촉진제와 고기 맛을 좋게 하기 위한 각종 동물성 사료가 섞인 사료를 먹고 살다 2년 전후로 하여 도축된다. 참고로 소의 자연수명은 15~20년이다.

다섯 마리의 소를 위한 생추어리를 만들 때 우여곡절이 없었던 건 아니다. 무엇보다 지역주민을 설득하는 것이 어려웠다. 이 지역은 오래전부터 대부분 축산업 종사자로, 이들에게 소란 재산이자 교환가치 수단이었고, 소비와 구조라는 상반된 입장 앞에서 자신들이 이어온 생계 방식을 비난받는 것 같아 불쾌감도 느껴야 했다. 그러나 생추어리의 궁극적 목적이 나와 적을 구분하는 것이 아니라 종을 초월하며 서로가 서로를 돌보며 함께 사는 보금자리를 만드는 것이란 말에 마을 주민들은 마음을 움직였다.

생추어리에서 아빠와 함께 다섯 마리 소를 돌보는 일곱 살 아이는 소가 어떤 도움을 주냐는 질문에 “잘 살아주는 것”이라 말한다. 그 이유를 묻자 “우리는 소를 살리려고 데려왔으니까 잘 사는 것이 우리를 도와주는 것”이라 대답한다.(6) 아이에게 이곳은 종을 초월해 잘 먹고 오래 사는 것만으로도 서로에게 도움이 되는 게 자연스러운 세계임이 분명해 보인다.

 

5. 내가 먹는 건 불균형의 총체적 산물

고기를 먹는 행위 자체는 비난의 대상이나 이유가 될 수 없다. 문제는 종 차별주의를 앞세워 동물의 집단 도살을 합리화하는 인간중심주의, 자연의 순리를 훼손하는 것에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 극단적 자본주의 시스템이다. 공장식 축산업은 이 세계관이 어떠한 결과를 초래하는지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자본주의의 최대의 이익을 끌어내는 것이다. 그리고 이익을 내기 위한 가장 확실한 방법은 대량생산을 통한 대량 판매다. 문제는 자연에서 균형을 이루며 살던 것들에 자본의 논리를 대입하여 인간이 개입되는 순간 균형은 깨진다는 점이다. 모든 생물에겐 그들만의 생태계가 있고, 이 안에서 생의 주기에 따라 살고 또 죽는다. 이 안에서 벌어지는 모든 것은 이상한 것도 없고 비정상적인 것도 없다. 본능에 따라 사는 동시에 다른 존재와 균형과 조화를 이루려고 애쓰다 자연스럽게 소멸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공장식 축산은 아니다. 이 시스템 아래서 닭이, 돼지가, 소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인간의 힘이 개입되지 않는 과정이 없다. 효율성을 이유로 자연교배 대신 인공수정을 하고, 위험성을 이유로 움직이지 못하게 케이지나 스톨(stall)에 가둔다. 생산성을 이유로 동물성 사료를 먹이고, 질병 예방을 이유로 산 채로 살처분을 한다. 이 과정을 거쳐 살아남았지만, 평균 수명에 1/10도 살지 못한 채 동물은 도축장에서 참혹한 죽임을 당한 후 고기가 되는 것이 이들의 최후다.

과정마다 발생하는 문제는 균형이 깨져 일어나는 불균형한 현상이지만 공장식 축산은 이 모든 불균형을 손실로 간주하고 불균형을 또 다른 불균형으로 억제하거나 아예 제거해버린다. 결국, 우리가 현재 누리고 있는 풍족함이란 결국 인간의 힘으로 자연을 파괴하고 불균형을 억압해 얻은 것이다. 그럼에도 내 배가 부르니, 양질의 고기를 먹고 사니 건강하고 풍요로운 삶을 살고 있다고 진심으로 말할 수 있을까.

지구는 참을 만큼 참았고, 버틸 만큼 버텼다. 지금 당장 지구가 어떻게 된다고 해도 이상할 것이 없다. 타인의 몸을 해쳐 내 몸을 살리는 것이 결국은 자신의 몸을 해치는 것이라는 걸 나중에야 깨닫는 어리석은 인간이 되지 않길 부디 바랄 뿐이다.

 

 

글·장윤미
문화평론가 겸 소설가. 인하대 한국학과 박사 졸업. 강원문학 소설부문 신인상 수상으로 소설가로 등단. 저서로 독서 평론에세이 『우세한 책들』. 장편소설 『또 다른 세계로 가는;플랫폼』이 있다.


(1) 동물보호구역으로 번역할 수 있지만 본래의 뜻을 유지하기 위해 대개 영어 발음 그대로 쓰곤 한다. 공장식 축산 환경과 반대되는 개념으로, 동물이 평생 가능한 한 온전하게 살아갈 수 있는 공간을 가리킨다.
(2) 새벽이의 구조부터 생추어리 마련까지 관련한 내용은 『훔친 돼지만이 살아남았다』(호밀밭, 2021)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3) ‘도계장을 나온 앞탉-잎싹이’,<경향신문>, 2021년. 11월 9일자.
(4) 경제적 가치가 없는 가축을 죽이는 것을 뜻한다.
(5) 서울애니멀세이브 인스타그램, https://www.instagram.com/p/CpTphh8pnVr/
(6) 다큐멘터리, 「나의 친구, 다섯 들풀」, https://www.youtube.com/watch?
v=8kReySAFN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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