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인류는 수많은 종류의 풀과 식물과 열매 중에서 안전한 먹거리를 찾아 숱한 시행착오를 겪어 왔다. 예컨대 아래 두 버섯을 보라. 겉모습은 거의 똑같다. 왼쪽 버섯은 먹을 수 있으나 오른쪽은 독버섯이다. 어떻게 고대인들은 약초와 독초를 식별할 수 있었을까? 일일이 맛보고 결과를 파악할 수밖에 없었다. 임상경험을 나누며 실패를 점점 줄여나간다. 그러나 가족이나 부족 단위로 정보를 공유하고 기억에 의존하다 보니 확산은 더뎠다. 이렇듯 얼마나 많은 시간과 시도가 있었는지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거듭된 실수와 경험이 쌓여 전승되다가도 정보의 단절이나 유실 때문에 비슷한 오류와 실패는 여전하였다. 지금도 낯선 곳에 가면 어떤 음식을 먹을지 결정하는 데 신중하다.

고대 신화와 민담에 빈번히 등장하는 음식 모티브는 인류의 오랜 의식 가운데 남아있는 치명적인 경험에 뿌리를 둔다. 가뭄이나 자연재해로 먹을 음식이 없어서 죽기도 하지만, 독이 든 식물이나 동물 때문에 목숨을 잃기도 한다. 안전한 먹거리와 지속적인 식량 확보가 얼마나 중요한지 거듭 확인하게 된다. 그 과정에 얼마나 많은 희생이 있었는지 또한 부작용 또한 무수히 견뎌냈을 것이다. 이렇듯 대가는 혹독했으며 과정은 길었다. 고대 인류가 음식에 관하여 겪었던 수천 년의 시행착오가 신화와 전설 가운데 ‘먹다’ 또는 ‘먹지 말라’는 주제로 녹아들어 있다. 따라서 신화 속의 음식 모티브에는 생존에 관한 인류의 집단 무의식이 녹아든 것이다. 세계 곳곳의 신화와 민담에 음식 주제가 거의 항상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2.
고대 한국의 단군신화에도 음식은 등장하여 상징적 기능을 충실히 수행한다. 잘 알려진 대로 마늘과 쑥이 범과 곰에게 주어졌고 그들은 반드시 그 식품을 먹어야만 관문을 통과할 수 있다.
옛날에 환웅이 풍백 우사 운사를 거느리고 신단수 아래로 내려와 세상을 다스리고 교화하였다. 어느 날 곰 한 마리와 범 한 마리가 환웅에게 사람이 되기를 청하였다. 이때 환웅이 신령스러운 쑥 한 다발과 마늘 20개를 주며 “너희는 이것을 먹되 햇빛을 백 일 동안 보지 않으면 사람의 형상이 되리라” 말하였다. 범과 곰은 먹으며 기(忌)하였다. 범은 금기를 지키지 못했고 곰은 삼칠일 만에 여자로 변하였다. 그러나 혼인할 상대가 없어 신단수 아래에서 잉태하기를 빌었다. 이에 환웅이 사람으로 변신하여 웅녀와 결혼하여 아들을 낳았다. 그가 단군왕검이다. <『三國遺事』 기이(紀異) 제1편 >
사람이 되고 싶은 범과 곰은 마늘과 쑥을 일정 기간 복용해야 한다. 인간 세계에 진입하기 위한 첫 과정에 등장하는 식량이다. 수많은 야생 약초와 과일을 제쳐놓고 하필 마늘과 쑥일까? 아마 식용 가능성은 확인되었고 그 효능성에 대한 검증이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단군신화를 배태한 고대 한반도인들의 집단적 실험 정신이랄 수 있겠다. 곧 마늘과 쑥의 특정 성분과 약효가 조상의 출현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쳤을 것이라는 그야말로 신화적인 상상이다.
마늘은 동물적 성질을 없애며 역병이나 나쁜 기운을 막아주는 영험한 식물로 간주되었다. 특히 남성의 고환과 유사한 생김새는 마늘에서 다산과 정력을 떠올렸고 그 상징으로 여긴 것이다. 한편 전혀 다른 문화권이지만 유대 현자들은 마늘을 훨씬 구체적으로 파악하고 있다. 마늘은 “포만감을 주고, 몸을 따뜻하게 하며, 얼굴을 밝게 하고, 정액을 증가시키며, 장내 기생충을 죽인다.” 고대 한반도 조상들이 유대교 전통을 알 리 없었겠으나 마늘에 대한 임상 실험은 어느 정도 확인된 것으로 보인다. 마늘은 이미 사람에게 안전한 식품으로 활용된 상태였고 단군신화가 범과 곰에게 마늘을 꾸준히 먹게 한 것은 장기간 식용 가능성을 파악하려는 실험에 가깝다.
쑥은 어떤 점에서 단군신화에 포함되었을까? 쑥은 동북아가 원산지이며 ‘약초의 왕’으로 불릴 만큼 효능이 뛰어나다. 학명(artemisia)에서 알 수 있듯 쑥에는 그리스 여신 아르테미스의 면모가 어른거린다. 아르테미스는 여성의 생리, 임신, 출산 등을 관장하는 신이다. 그리스 신화에서 쑥은 아르테미스에게 바치는 신비로운 약초다. 단군신화와 동양 전통에서도 쑥은 역시 아르테미스의 역할과 유사하다. 쑥의 효능은 사람이 되는 과정에서 동물의 거친 야성 곧 각종 세균의 침투를 막고 사악한 기운을 물리치는 등 새로운 생명을 잉태하기 위한 과정이다. 그러니 쑥의 섭취를 통한 정화는 모성적 기능을 강화한다고 말할 수 있다. 쑥은 곧 몸의 정화와 생명의 탄생을 준비하는 단계다.
단군신화에서 범과 곰은 마늘과 쑥을 장기간 복용하는 임상의 당사자인 셈이다. 범에게 마늘과 쑥은 자극적인 데다가 오래도록 ‘햇빛을 볼 수 없는’ 상황을 견디지 못하고 뛰쳐나갔다. 실패한 임상 사례다. 그러나 곰에게 마늘과 쑥의 효능은 엄청난 것이었다. 두 식품을 꾸준히 혹은 규칙적으로 복용하자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고 그 결과 사람으로 탈바꿈한 것이다. 마늘과 쑥의 일정한 공급이 가져온 신비로운 현상이었다.
3.
에덴동산 이야기에서 ‘먹다’ 동사 아칼(אכל)이 핵심이다. 하느님은 동산의 열매 중에서 선악과를 먹지 말라고 명한다(창세기 2:17; 3:1, 11, 17). 선악과는 문자적으로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다. 주로 뱀과 여자의 대화를 비롯하여 창세기 2-3장에서 21차례 ‘먹다’가 언급된다. 그 중의 네 차례는 ‘먹지 말라’는 부정형이다. 그 나무의 열매를 먹으면 반드시 죽을 것이라는 섬뜩한 경고와 함께. 사실 먹지 말라는 금지는 애초부터 위반을 전제한 명령이다. 왜냐하면 사람은 먹어야만 살 수 있는데 먹지 말라는 명령을 준수하기란 불가능에 가깝기 때문이다. 만일 먹으면 죽는다는 경고에도 그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다.
여기에 ‘먹다’와 ‘죽다’의 대조항과 맞물려 역설이 증폭된다. 곧 ‘먹다’는 근본적으로 살기 위한 본능적 행위인데 (선악과를) 먹으면 결국 ‘반드시 죽으리라’는 명령은 이율배반이다. 먹지 않으면 죽는 사람에게 먹지 말라는 것은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암시한다. 아담과 하와는 뱀의 유혹에 넘어가 ‘먹지 말라’는 선악과를 먹고 말았다(창세기 3:6). 두 사람에게 ‘먹지 말라’는 명령은 지킬 수 없는 계명이며 유혹이다. 그렇다면 선악과는 금지된 열매이기에 독초인가? 그동안 기독교는 선악과를 사과로 인식해왔다. 한편 유대교는 무화과, 복숭아, 포도, 석류, 올리브, 심지어 밀, 보리 등의 가능성까지 타진하며 토론하지만 특정한 열매라고 단정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선악과를 지칭하면 사람들은 그 나무를 저주하며 비난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선악과를 밝히지 않는 이유는 다른 데 있다. 그것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가 식물이라기보다 은유이기 때문이다.
아람어 성서(Peshitta)를 번역한 조지 람사는 생명나무와 선악과를 인체의 신경과 모든 지식을 가리키는 상징으로 이해한다. 후자는 ‘선과 악 사이의 모든 지식을 알게 하는 나무’로서 지식의 총체를 가리키는 수사법이다. 곧 메리즘(merism)이 그것이다. 따라서 선악과는 과일이 아니라 예컨대 ‘의의 열매,’ ‘거짓 열매,’ ‘빛의 열매,’ 또는 ‘악의 열매,’ 사망의 열매’ 등과 같은 은유로 봐야 한다(호세아 10:12-13; 에베소서 5:9; 야고보서 3:18; 잠언 22:8; 로마서 6:21). 단군신화에서 범과 곰은 두 종류의 구도자를 상징하고, 마늘과 쑥은 하늘의 뜻을 깨우치라는 구도의 상징물로 풀이하는 견해도 있다.<변찬린, 「성경의 원리 上」 3.5>
신화에서 ‘먹다’는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욕구인 음식에 관한 주제다. 침샘을 자극하는 음식은 자연에 즐비하다. 싱싱하고 파릇파릇한 잎사귀와 탐스럽고 먹음직한 과일은 손짓하며 허기진 사람을 유혹한다. 그렇다고 검증되지 않은 풀이나 과일을 함부로 먹을 수 없다. 잘못 먹으면 중독이나 마비가 오고, 심하면 죽음을 피하기 어렵다. ‘먹기 위해서’ 독의 유무, 곧 ‘유익한지 해로운지’ 식별할 지식이 요구된다. 신화는 안전한 먹거리를 위한 지식을 얻기까지 수많은 희생자가 있었고 오랜 시간이 필요하였다고 말한다. 선악과 이야기와 마늘과 쑥의 단군신화는 고대인들의 국지적인 경험담이 아니라 사느냐 죽느냐의 문제였다. 그 실험과 여정이 전혀 만만치 않았음을 시사한다.
4.
포이어바흐는 1866년 "The Mystery of Sacrifice, or man eats what he is"라는 짧은 논문을 발표하였다. 종교적 희생에 관하여 냉철하게 분석한 글이다. 간추리자면 사람은 평소 먹는 음식을 신께 바친다. 그러니 희생 제사는 사람의 음식으로 신을 양육하는 것과 같다. 제의의 성격에 따라 바치는 음식은 달라진다(레위기 1-7장). 심지어 제물에 정성을 다하는 경우, 사람이 스스로 신께 바칠 제물이 되기도 한다(창세기 22:1-19). 이 점에서 사람은 무엇을 먹느냐에 따라 그의 정체성이 형성되며(Man is what he eats) 동시에 사람은 자신의 정체성을 먹고 산다(Man eats what he is). 사람이 먹는 음식이 그의 신을 결정한다. 사람의 됨됨이는 무엇을 먹는지에 달려있다. 포이어바흐의 주장을 모두 수긍하기 어렵지만 "Der Mensch ist, was er ißt"에 압축된 함의는 고대 신화의 ‘먹다’를 이해하는 데 시사점이 있다.
앞에서 다루었듯 고대 인류에게 ‘먹다’는 목숨을 거는 모험이었다. 그러니 무엇을 먹느냐에 따라 그가 어떻게 존재하는지 결정된다는 포이어바흐의 주장은 과장이 아니다. 생존을 위해 먹어야 하지만, 신체가 마비될 수도 있고 심지어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 독초에 민감한 고대인들의 두려움과 공포가 ‘먹다’는 동사에 투영되어 있다. 그것은 안전한 먹거리를 확보하기 위해 수많은 시행착오와 헤아릴 수 없는 대가를 상징한다. 따라서 ‘먹다,’ 또는 ‘먹지 말라’는 갈림길에서 서서 선택할 문제가 아니다. 더구나 옛 민담과 전설에 등장한 주인공이 겪게 되는 흥미진진한 이야기 소재로 머물지 않는다. 인류 앞에 놓여있는 수많은 ‘먹을 것’ 중에서 어떤 들풀이나 과일이 나의 허기진 배를 채우고 육체와 목숨이 안전한지를 묻는 진지한 모색이자 수행이어야 한다. 포이어바흐의 주장처럼 내가 먹는 음식이 곧 나다. Homo est quod est. 이 점에서 ‘먹다’는 인류의 경험 중 가장 오랜 기간 지속되는 탐구이자 시행착오다. 놀랍게도 지금 어딘가에서 이와 같은 원시적인 실험과 실패가 벌어지고 있다.
‘먹다’ 또는 ‘먹지 말라’는 대부분 고대 신화에서 확인되듯 친숙한 금기이자 달콤한 유혹이다. 창세기의 묘사처럼 ‘먹음직하고, 보암직하고, 탐냄직하지만’ 먹으면 죽을 수 있고, 그렇다고 먹지 않고 언제까지 버틸 수도 없다. 사람은 먹지 않으면 죽는다. 안전한 음식을 찾는 인류의 삶 속에 마늘과 쑥이 있었으며, 사과라고 알려진 선악과가 있었다. 약초는 먹고 독초는 먹지 않는다. (더러 독초를 먹고 죽는 어리석은 부류가 있지만). 인류가 터득하려는 지혜의 길은 멀고 수행은 끝나지 않았다.
글·김창주
한신대 신학부 교수. 히브리 유산을 인문학으로 푸는 글을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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