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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승의 시네마 크리티크] 악을 비추는 거울, <존 오브 인터레스트>
[김현승의 시네마 크리티크] 악을 비추는 거울, <존 오브 인터레스트>
  • 김현승(영화평론가)
  • 승인 2024.07.09 0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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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시간 동안 검은 화면을 유지하는 <존 오브 인터레스트>의 오프닝 숏은 스크린에 일말의 재현도 허용하지 않는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모습을 가리는 두꺼운 벽에서 알 수 있듯 영화가 역사적 비극을 대하는 태도는 확고하다. 카메라는 역사의 증인이 될 수 있는가? 영화는 실제 사건을 재현할 수 있는가? 경악스러운 현실을 있는 그대로 관객에게 제시하는 것은 과연 바람직한가? 이미지는 스스로 말할 수 있는가? 조나단 글레이저 감독은 세계대전 이후 본격화된 길고 긴 논쟁에 명확한 답변을 제시한다. 참상을 의도적으로 배제하는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노골적인 재현 없이도 영화 예술이 역사적 의미를 창출할 수 있다는 확신이 담겨 있다.

영화의 독특한 화면 구성을 분석하기 위해 재현되는 것과 재현되지 않는 것의 경계를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담벼락으로 차단된 두 공간은 각각 재현과 비재현의 영역을 담당한다. 카메라는 푸르른 녹음으로 가득한 벽의 내부, 나치의 주택가를 기이할 정도로 선명하게 포착한다. 과도한 고해상도 이미지가 야기한 불쾌함은 시네마가 사건의 모든 것을 재현할 수 있다는 어긋난 믿음을 반영한다. <존 오브 인터레스트>가 실내 공간을 포착하는 방법도 이와 유사하다. 유행처럼 번진 ‘관찰 예능’ TV 프로그램처럼 영화는 인물이 이동하는 모든 방에 카메라를 배치한다. 인물의 동선을 끈질기게 뒤쫓는 화면에서 일상의 작은 단면조차 놓치지 않겠다는 욕망을 읽을 수 있다. 공간 전체를 포착하던 카메라는 각도를 조금씩 바꿔가며 인물과 대화 일체를 3D 프린팅하듯 포획한다.

하지만 집착에 가까운 재현에도 관객의 이목은 언제나 재현 영역 너머를 향한다. 재현의 윤리를 의식한 듯, 수용소의 참상은 언제나 스크린의 가장자리만을 간신히 비집고 들어온다. 음향 효과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외화면이 이토록 강력한 장력을 지니는 이유는 단순히 비명이 상상력을 자극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예민한 관객이라면 루돌프 회스(크리스티안 프리델)가 나치친위대 제복을 입고 등장할 때 이미 영화가 다루는 역사적 맥락을 파악할 수 있다. 관객은 실체가 없는 듯 보이는 비명의 정체를 분명히 알고 있다. 지금껏 전쟁의 비인간성을 다룬 영화들의 관습에 따라 학대당하는 피해자의 행방을 찾는 것은 자연스럽다. 그런데, 나치의 만행은 일제의 야만성을 다루는 한국 역사영화만큼이나 관객에게 너무나 친숙한 주제가 되었다. 상투가 되어버린 ‘악의 평범성’은 말할 것도 없다. 앵무새처럼 유사한 역사의식을 되풀이하는 영화는 작품 전체가 교과서적인 교훈으로 환원될 위험성을 갖는다. <존 오브 인터레스트>가 가해자의 일상을 비추며 단순히 ‘악의 평범성’을 고발하는 데 머물렀다면, 지금과 같은 뜨거운 찬사는 나오지 않았으리라 생각한다.

 

이와 달리,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과감한 연출을 통해 클리셰가 된 과거에 새 생명을 불어넣는다. 열화상 카메라로 촬영된 이미지가 대표적이다. 회스 소장의 딸은 강제로 노역하는 포로들을 위해 안전지대 밖에 사과를 가져다 놓는다. 영화는 네거티브 열화상 카메라로 소녀의 고귀한 행동을 포착한다. 이 독특한 이미지는 외양만으로 충분히 매혹적이지만, 이질적인 이미지를 어떻게 자연스럽게 연결한 것인가에 대한 궁금증을 자아낸다. 바로 이 지점에 <존 오브 인터레스트>의 결단력이 돋보인다. 영화는 놀랍도록 장면 전환이 튀는 것을 개의치 않는다. 아이가 두 번째로 사과를 놓고 돌아오는 길에 주목해보자. 밖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소녀를 열화상 카메라로, 집 안에서 딸을 반기는 엄마의 시선은 일반 카메라로 촬영된다. 이 투박하고 갑작스러운 교차에서 영화 전반을 가로지르는 내부와 외부의 대립을 살필 수 있다.

‘낙원’과 홀로코스트를 구분 짓는 두꺼운 벽처럼 이미지의 전환이 내외부의 경계를 가리킨다면, 열화상 카메라에는 ‘외부인’의 시선이 담긴다. 만약 모든 시선이 주체를 갖는다면, 이 암울한 이미지는 안전지대 바깥에서 한 줌의 재로 변해버린 피해자가 바라본 세상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혹은 하마구치 류스케가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2023) 인터뷰에서 밝히듯 “카메라가 누구의 시선도 대신할 수 없다면”, 색채를 잃고 뭉뚱그려진 소녀의 실루엣은 불쾌감을 자아내는 과도한 선명함과 대비되는 ‘차마 재현할 수 없는 이미지’를 가리킨다. 유골 가루를 비료로 주는 섬뜩한 장면에 비추어 본다면 두 가지 모두로 간주할 수도 있을 것이다.

 

영화의 대미를 장식한 마지막 시퀀스에서도 감독의 대범함을 느낄 수 있다. 악인이 복도 끝의 어둠을 바라본 뒤, 그의 시선이 이내 동시대의 아우슈비츠 기념관의 모습으로 대치된다. 이 다소 뜬금없는 몽타주가 평단의 열렬한 호응을 불러일으킨 이유는 무엇일까? 전범의 사지를 절단하며 길티 플레져를 자극하는 타란티노식의 처형에 비하면 <존 오브 인터레스트>의 단죄는 참으로 정적이다. 나치의 주역은 구토를 내뿜고 그저 한없이 지하로 침잠할 뿐이다. 대학살을 주도한 인물이 구토한다는 점에서 <액트 오브 킬링>(2013)의 마지막 장면을 떠올린다면, 시대를 넘나드는 몽타주는 회스에게 자기 자신의 추악한 모습을 직시하게 만드는 거울과 같다.

악인과 그의 가족들이 스스로를 바라볼 기회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서사가 진행되며 그들은 몇 번이고 영화가 감춰왔던 불편한 진실을 목도한다. 잠을 자던 회스의 장모는 우연히 창문 밖에 솟구치는 불기둥을 보게 된 뒤 황급히 마을을 떠난다. 그녀가 남긴 편지의 내용은 끝내 공개되지 않지만, 편지를 찢는 딸의 표정을 통해 그녀가 시대가 낳은 괴물들에게 느꼈을 혐오감을 유추해볼 수 있다. 양심의 소리를 들을 줄 아는 어머니와 달리, 아우슈비츠의 “여왕”은 어떻게든 자신의 낙원 속에 영원히 머물고자 애쓴다. 아이들은 포로가 군인에게 뒤쫓기는 광경을 목격했음에도 그것의 참혹함을 이해하지 못해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회스는 이 끔찍한 가정 내에서도 가장 삭막한 감성을 지닌 인물이다. 영화는 누구보다 성실히 상부의 명령을 따르는 남자의 모습을 여러 차례 그려낸다. 흥미로운 점은 회스가 언제나 그를 둘러싼 주변 환경 전체를 메타적으로 바라본다는 사실이다. 수영장 파티가 열릴 때 그는 자신이 일궈놓은 성공을 누리는 가족 구성원을 흐뭇하게 바라본다. 이후 반복되는 직부감(over head shot)에서 그는 책상에 앉아 효율적인 학살을 고민하고, 고위 간부 회의에 참석해 또 다른 대규모 살인을 계획한다. 심지어 히틀러가 개최한 만찬 파티에서 그는 높은 곳에 올라 악마들이 춤을 추는 모습을 내려다본다. 하지만 충분히 객관성을 담지할 수 있는 높이에도, 자신을 비롯한 전범들의 실상을 낱낱이 바라보았음에도, 그에게는 어떠한 심경의 변화도 찾아볼 수 없다. 이 모든 게 당연하다는 듯, 역사는 원래 승자의 기록이라는 양 약간의 복통만을 느낄 뿐이다.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최후의 수단으로 반성을 잊은 악마를 역사의 심판대 위에 세운다. 가해자를 참수하는 통쾌한 처형은 역시나 없다. 영화는 재현과 비재현의 영역을 넘나들던 관객의 손에 단죄를 맡긴다. 현재와 과거의 몽타주가 분노해야 할 것에 분노할 힘을 재가동시킬 수 있다면, 관객을 향한 영화는 노골적인 재현 없이도 역사적 의미를 창출할 수 있다.

 

 

사진 : IMDB

 

 

글·김현승
영화평론가. 2022 영평상 신인평론상으로 등단하였다. 현재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이론과 예술전문사에 재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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