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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향의 시네마 크리티크] 피난처(sanctuary)를 건너 피난처(refugia)를 상상하기-왕민철감독, <생츄어리>
[이수향의 시네마 크리티크] 피난처(sanctuary)를 건너 피난처(refugia)를 상상하기-왕민철감독, <생츄어리>
  • 이수향(영화평론가)
  • 승인 2024.07.15 1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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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동물, 원’에서 ‘피난처’로

왕민철 감독은 전작 <동물, 원>(2019)에서 청주동물원을 중심으로 그간 주목되지 않았던 동물원의 뒤편에 집중해 우리 사회에서 동물원이 지니는 의미를 살펴본 바 있다. 이 시도는 인간이라는 종의 흥미를 위해서 존재하기 때문에 비판받는 기존의 동물원 담론에서 나아가 실제의 동물원이 처한 현실을 구체적으로 확인해보았다는 점에서 새로웠다. 또 ‘동물원=악의 축’이라는 단순한 논리에서 벗어나 동물원에서 매일 동물들을 마주하는 사육사나 수의사 같은 존재들이 실제로 여러 동물들의 삶을 유지하는 데에 현실적인 도움을 주고 있음도 보여주었다.

전작에서 동물원에 모인 동물들의 다양한 필요와 처한 상황, 건강 관리 등을 확인했던 감독은 <생츄어리>(2024)를 통해 청주동물원이라는 공간을 벗어나 야생 동물들의 생존과 인간과의 공존이라는 측면에서 어떠한 방향성이 옮은 것인가로 문제의식을 확장한다. 요컨대 우리가 집에서 같이 생활하는 반려동물들과 달리 동물원과 같은 공간에서만 만날 수 있는 동물들이 가지는 생물학적 특성과 환경적 필요에 대해 그간 간과된 측면이 있었음을 지적하는 것이다. 감독은 멸종 위기에 처한 동물들에게 동물원이 실제적인 보금자리의 역할을 하고 있음을 의식하면서도 이들을 위한 더 나은 선택이 어떤 것인지를 고민하는 사람들을 등장시킨다. ‘야생’과 ‘사육’이라는 문제의식을 좀 더 전면에 내세운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작품 제목인 ‘생츄어리SANCTUARY’는 동물들의 안정된 서식지로서의 역할에 집중한 공간을 의미한다. 즉, 여러 이유로 본래의 야생 공간으로 돌아갈 수 없는 동물들이 전시과 관람의 대상이 되지 않고도 머무를 수 있는 피난처인 것이다. 현재 국내에는 전무한 이 야생동물보호구역들이 만들어지기를 바라며 힘을 모으고 있는 인물들을 조명한다.

청주동물원의 김정호 수의사는 청주동물원을 야생으로 돌아갈 수 없는 동물들을 보호하는 생츄어리로 바꾸고 싶어하고, ‘곰 보금자리 프로젝트’의 최태규 수의사와 활동가들은 웅담 채취용으로 곰을 사육하던 농가들에서 곰을 구조해 그들을 위한 곰 생츄어리를 만들고 싶어한다. ‘충남야생동물구조센터’와 김봉균재활관리사와 오예은 수의사 등은 다친 동물들을 치료해 야생으로 되돌려보내는 일을 하지만, 영구적인 장애를 입거나 인간에게 순치되어 독자 생존이 어려운 동물들을 위한 생츄어리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이 세 주체가 지닌 각각의 입장을 조명하면서도 동물들에게 단순히 자연방사만이 능사가 아님을 보여주기 위해 영화는 먼저 야생동물들이 어떻게 그곳으로 오게 되었는지의 여정을 그린다. 농수로에 빠져 다친 고라니나 날개가 찢긴 독수리처럼 병들고 상한 동물들을 치료하는 것도 인간이지만, 동물들을 학대하고 잔인하게 버린 것도 인간인 것이다.

 

 

2. 피난처를 상상하여 공존하기

<생츄어리>는 인간과 동물의 공생과 동물권의 측면에서 주목되지 않았던 ‘야생 동물’의 문제를 전면적으로 다룬다는 점에서 신선하다. 반려견이나 가축처럼 인간의 곁에서 공존하거나 동물원에서 오락의 대상으로 놓여진 동물들을 위한 올바름의 측면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여러 방향에서 고찰되었다. 가족이든, 유희의 대상이든 간에 인간에게 직간접적으로 이로움을 주었기 때문이었다. 이들과 달리 인간에게 직접적으로 유익도 되지 않고 분리되어 공생했다는 점에서 그간 동물에 관한 논의에서 야생동물은 빈 기표로 남아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가령, 한국영화에서 ‘고라니’가 활용되는 방식은, 밤에 무서운 소리를 내어 공포를 유발하거나 도로에 갑자기 뛰어들어 인간의 통행을 방해하고 사고를 일으키는 골칫거리에 불과한 것으로 그려진다. 나아가 <부산행>에서처럼 사건의 근원인 좀비의 숙주로 기능한다는 점에서 ‘야생’ 즉, 인간의 손이 미치지 못한 개체라는 부분이 손쉽게 부정성으로 치환되기도 했다.

이렇듯 기존에는 도외시되었던, 인간에게 직접적인 유익을 가져다주지 않는 개체들에게 주목하는 것은 도나 해러웨이의 문제의식과도 연결된다. 도나 해러웨이는 『트러블과 함께하기』(마농지, 2021)에서 생태와 기후 위기를 가져온 인간이라는 존재의 혈통과 계보, 생식과는 무관한 반려종들과의 관계에 대해 주목해 ‘친척을 만들자Make Kin Not Babies!’라고 주장한다. 인간중심주의적 관점에서 벗어나 복수종과의 공생이라는 관점에서 ‘트러블과 함께 하기staying with the trouble’를 원하는 것이며, ‘공산sympoiesis’의 존재로 서로의 삶에 참여해 함께 만들고 얽히는 ‘복수종의 함께-되기’의 사례들을 추가하기를 원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절멸 위험에 빠진 생물종들에 대한 적극적인 돌봄을 요청한다.

 

이러한 관점은 <생츄어리>에서 날개가 다친 부엉이와 다리가 잘린 고라니, 폐사한 청둥오리 등을 보살피는 사람들의 태도와도 맞닿는다고 볼 수 있다. 해러웨이가 인류세를 경계사건으로 설명하면서 다음의 세를 위한 ‘피난처refugia’를 상상했듯이, 이 영화의 인물들이 상상하는 생츄어리는 자본주의와 환경오염의 부정적 상황 속에서도 야생동물들이 살아남고 공생할 수 있을 것이라는 가능성을 엿보게 하는 하나의 관문으로 기능할 수 있는 것이다. “연대를 통한 함께 살기와 함께 죽기는 자본의 명령에 대한 치열한 대응”이라는 해러웨이의 주장처럼 생츄어리가 만들어지기를 소망하는 것 역시 동물들과의 공존에 대해 수의사와 구조사들이 가진 실천적 함의와 맥이 닿아있다고 할 수 있다.

 

3. 다큐멘터리의 방법론과 비장애/이성중심주의적 시선에 대한 비판

<생츄어리>는 다큐멘터리이기 때문에 무엇보다 감독이 카메라에 담고 있는 ‘사실’과 이를 통해 보여주고자하는 ‘입장’을 확인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볼 수 있다. 폴 로다에 따르면, 다큐멘터리를 스토리 중심의 극영화와 구별 짓게 하는 것은 테마 속의 ‘중요한 사실’과 인물들의 성격화와 그들의 ‘견해’라는 측면이다. 또한 다큐멘터리스트는 강력한 사회적 표현의 수단으로 다큐멘터리를 생각하기 때문에 일상적 경험에 접근하는 데에 있어서도 정치적 사회적 의식을 지녀야한다고 설명한다.(『기록영화론』, 영화진흥공사, 1994, 102-103면). 이는 다큐멘터리 장르에서의 주제와 견해가 의식적 측면에서 일정 부분 방향성을 지닐 수밖에 없음을 설명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생츄어리>의 전반부에서는 야생동물과의 공생이라는 문제의식을 보여준다면, 후반부는 ‘안락사’라는 까다로운 주제에 집중한다. 공간과 인력, 자본 등 현실적인 이유로 소생이 불가능하거나 순치되어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이 어려운 동물들에 대해 현재는 안락사라는 방법을 사용하고 있는데 이것이 행해지는 프로세스를 작품 속에서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가령, 앞다리가 다쳐 핸디캡이 생긴 너구리를 그대로 다시 방생하는 것이 개체의 생존에 도움이 될 것이냐를 고민하거나 낚싯줄에 날개가 꺾여 손상이 된 새가 치료 후 제대로 날 수 있을 것이냐를 고민하다가 자력 생존이 어렵다는 결론에 이르자 안락사를 결정하는 것이다. 결정이 나면 주사제를 투여해 죽게 한 뒤, 비닐팩에 사체를 넣어 창고에 하나씩 던져두는 과정들이 여러 동물들에 걸쳐 이어지는데 열린 문틈으로 보이는 산더미처럼 쌓인 비닐팩들이 이러한 결정의 빈번함을 서늘하게 보여준다.

폴 로다의 설명에 따르면 다큐멘터리 방법은 두 가지로, ‘기술적인 혹은 저널리스틱한 어프로치’와 ‘이미지스틱(인상주의적인)한 방법’으로 나뉘며 어느 쪽을 선택하는가는 감독의 개인 취향과 결부된 제작의 목적에 관한 문제이다. 다만, 다큐멘터리의 본질적 목적은 관찰에 놓여 있기 때문에 결론이 제시되어야 하고 고도의 창조적 노력의 방법으로 관찰의 결과가 수행되어야 한다고 본다. 특히 저널리스틱한 방법에 있어 단순한 피상적 묘사로는 충분치 못하며 그의 어프로치에 대한 영감(inspiration)이란 사물의 배후에 있는 의미와 인물의 밑에 흐르는 의의로 나타난다고 설명한다.(위의 책, 105면.)

이 작품은 다큐의 방법론으로서 ‘기술적인 혹은 저널리스틱한 어프로치’에 좀더 치중해 있다고 볼 수 있다. 극중 수의사와 활동가들은 동물들을 어쩔 수 없이 안락사시키는 과정에서 겪는 감정적 동화와 부정성에서 빠져나와 일상적 결정이나 직업적 노동의 한 가지로 치환시키기 위해 애쓴다는 점을 인터뷰로 보여준다. 이는 안락사라는 결정이 내려지는 상황의 양적 비율과 더불어 이러한 과정을 재현해내는 태도가 감상적으로 흐르는 것을 경계하는 것처럼 보인다.

반달곰 반순이를 둘러싼 김정호 수의사와 최태규 활동가의 의견차이는 그런 점에서 두드러진다. 김정호 수의사는 디스크가 심한 반순이에게 치료를 할 수 있는 데까지는 해보려고 하고, 최태규 활동가는 나이가 많고 후 처치도 어려운 반순이의 고통을 모르는 채 아직 식욕이 있다는 이유로 연명을 위한 치료를 계속하는 것에 거부감을 드러낸다. 최태규 활동가는 생태적으로 크게 의미 없는 동물을 내보낸다는 것과 어디까지가 인간의 개입이 가능한 부분인가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다. 이러한 갈등은 인간의 이성중심주의적 시각과 ‘장애-불구’의 맥락에서 동물들을 바라보는 시선이 겹쳐있다고 볼 수 있다.

 

슈나우라 테일러는 비장애중심주의와 이성중심주의가 장애인과 동물들을 억압하는 맥락이 동일하다고 설명하면서, “죽느니만 못하다”라는 가치판단에 따라 안락사를 ‘자비로운 살해’처럼 판단하는 것을 비판한다. 이는 인간이 다른 종들보다 우월하다는 믿음을 유지한 채로, 장애에 대한 가장 두드러진 비장애중심주의적인 두 가지 반응인 장애를 불쌍히 여기거나 장애를 제거하려 하거나로 드러난다는 것이다.(『짐을 끄는 짐승들』, 오월의 봄, 2020, 69-91면.)

그런 의미에서 ‘온전함’이라는 가치에 위배되는 장애 혹은 불구라는 측면과 인간의 이성에 미치지 못하는 동물이라는 측면에서 양자의 이중의 약점을 지닌 곰순이가 안락사를 당하는 현실도 더욱 핍진성을 띤다. 다만, 이 작품에서는 두 사람 중 어느 한쪽의 입장을 지지하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반순이를 보내기 직전, 김정호 수의사가 쓴 편지를 최태규 활동가가 읽어내려가는 장면에서 두 사람의 애도는 동일해 보이기 때문이다. 이어서 화면에 죽은 동물들의 이름과 종, 죽은 날짜를 새긴 나무 위패가 등장하면 저널리스틱한 접근 아래 담담히 가려져있던 이 작품의 정서적 파고가 비로소 드러난다. 다친 동물들을 하나씩 풀어주고 날려 보낼 때, 화면 이쪽 편을 바라보고 있는 수로의 고라니의 시선과 우리의 시선이 마주칠 때, 다큐멘터리로서 이 작품이 지닌 ‘사실’과 ‘입장’ 사이의 어디 쯤에 관객인 우리를 놓이게 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생츄어리>(2024)

*사진 출처: 네이버 영화

 

 

글·이수향
영화평론가. 문학박사. 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 신인평론상 수상. 영상물등급위원회 소위원, 영화와 문학의 관계에 대해 고민하며 대학에서 강의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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