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은 탈주를 꿈꾸는 자를 가만두지 않는다. 영화 <탈주>는 북한이라는 철책 너머로 자유를 향해 도전하는 한 남자의 치열한 여정을 그린다. 쫓고 쫓기는 숨막히는 추격전 속에서, 인간의 근원적인 욕망과 갈등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휴전선 인근 북한 최전방 부대에 10년 만기 제대를 앞둔 중사 규남(이제훈)은 미래를 선택할 수 없는 북을 벗어나 원하는 것을 선택할 수 있는 철책 너머로 탈주를 준비한다. 그러나 규남의 계획을 알아챈 하급 병사 동혁(홍사빈)이 먼저 탈주를 시도하고, 막으려던 규남도 졸지에 탈주병으로 체포된다.
탈주병 조사를 위해 부대로 온 보위부 소좌 현상(구교환)은 어린 시절 알고 지낸 규남을 탈주병으로 체포하여 노력 영웅으로 둔갑시키고, 사단장 직속 보좌 자리까지 마련해주며 탈주를 막으려 한다. 하지만 규남이 본격적으로 탈주를 시작하자, 현상은 한치의 양보도 없이 추격을 시작한다.
탈주하는 자: 자유를 향한 규남의 도전
영화를 보고 나면 내처 달리는 규남의 이미지가 강렬하게 남는다. 영화 오프닝 장면에서 규남은 한밤중 내무반에서 탈출해 초지대를 달린다. 감독은 규남의 탈주 모습을 스크린 좌우뿐만 아니라 전면, 후면, 위아래로 종횡무진 연출한다.

그러나 이 영화는 단순히 탈북하려는 귀순 용사에 초점을 맞춘 작품이 아니다. 감독은 뉴스에서 아프리카 청년이 유럽에 밀입국하기 위해 비행기 바퀴에 몸을 묶었던 사건을 접했다고 한다. 탈출을 위해 수천 미터 상공에서 바퀴에 묶여 영하의 추위와 산소 부족을 견뎌 낸 청년을 보며 감독은 간절함을 떠올렸다. 이는 북한이라는 공간이나 이데올로기로부터의 탈주가 아니라 자유를 향한 불굴의 의지로부터의 탈주라는 관점에서 영화가 제작된 계기였다. 결국 <탈주>는 스스로를 구하기 위해 필사의 도전을 감행하는 인간의 숙명적인 탈주극이다.
감독의 말처럼 “결승점을 향해 달리는 과정에서 장애물을 만나더라도 당황하거나 우회하지 않고 모두가 직진하는 영화”인 <탈주>는 탈북을 감행하는 상황이 아니라 새로운 방식의 삶을 꿈꾸는 모든 사람에 관한 이야기다. 그래서 영화는 귀순병의 구구절절한 사연으로 읽히는 영화가 아니라, 추격전의 긴장감만을 남기고 관객이 자신의 상황을 이입해 서사를 채울 수 있는 ‘뺄셈의 영화’이다.
<탈주>에서 현상은 규남에게 자리를 보장해주며 탈주를 멈추길 설득하고 권하지만, 규남이 원하는 건 안주가 아니라 탈주다. <탈주>는 수없이 실패하면서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한 남자의 이야기를 다룬다. 실패할 자유를 원하는 규남은 말한다. “내 갈 길 내가 정했습니다. 죽어도 내가 죽고 살아도 내가 삽니다. 실패하러 갑니다.” 영화는 수없이 반복되는 실패를 보여주고, 이걸 재밌는 추격 액션 장면으로 풀어낸다. 그래서 영화는 배경이 북한이든 남한이든 상관없이 꿈을 향해 달리는 누군가의 공간으로 설정되며, 분단영화라는 장르를 뛰어넘는다.
추격하는 자: 운명에 맞서는 현상의 딜레마
규남은 목표한 방향을 향해 직진하는 명확한 캐릭터인 반면, 현상은 겉으로 멀쩡해 보여도 내면을 알 수 없는 나선형의 캐릭터이다. 현상은 어릴 적 알고 지내던 규남의 탈주가 발각되자, 오히려 그를 감싸고 높은 지위를 제공하며 자신처럼 북한에서 군인이라는 주어진 운명에 순응해 살 것을 강요한다.

현상은 고위 간부의 아들로 원하는 걸 모두 누릴 것 같지만, 그도 결국 체제의 벽에 갇혀 꿈은 좌절되고 주어진 운명에 순응하며 살아간다. 피아노를 치던 현상은 러시아로 유학을 떠났지만, 결국 운명대로 피아노를 치던 손에 총을 들고 체제에 순응하며 살고 있다. 그래서 현상은 “내 앞길 내가 정했다”는 규남에게 “허튼 생각 말고 받아들여. 이것은 네 운명이야”라고 강요하며, 자신처럼 규남에게도 탈주를 포기하고 안주하는 삶을 살도록 강요한다.
이 과정에서 현상은 규남에게 친근하게 장난치다가도 날 선 눈빛으로 돌변해 제압하고, 여유롭게 클래식을 듣다 부하를 향해 폭력을 행사하는 등 여유로워 보이지만 다급하고, 섬세한 듯 거친 양면적인 면모를 능숙하게 조절한다.

또한 선우민(송강) 캐릭터를 통해 현상의 깊이를 더한다. 둘은 연회장에서 만나 묘한 눈빛을 교환하며, 관객에게 상상력을 자극하고 스토리의 깊이를 더한다. 두 사람은 러시아 유학 시절을 여전히 그리워하고 있으며, 현상이 선우민의 번호를 “내가 사랑했던 개자식”이라는 러시아말로 저장한 것은 이들의 복잡한 관계를 암시한다. 둘은 다른 공간에 있지만, 같은 전자 담배를 피우며 러시아 유학 시절을 그리워한다.
현상은 선우민을 만난 뒤, 잊고 살던 자신의 과거를 상기하며 흔들리는 모습을 통해 묘한 긴장을 자아낸다. 피아니스트의 꿈을 애써 외면하고 적응해야 하는 현실 속에서 끝없이 갈등을 느끼는 현상의 모습은 유려한 감정선으로 표현되어 깊은 여운을 남긴다. <탈주>에서 선우민의 존재는 탈주자뿐만 아니라 추적자의 다면적인 면모를 보여주는 중요한 요소이다.

현상은 내면에서 충돌하는 탈주를 거부하는 풍부한 심리 묘사를 통해 입체적인 매력을 지닌 캐릭터로 완성된다. 이 영화는 단순히 북한 고위직 아들의 정체성 분열만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우리는 어떤 형태로든 주어진 환경에 얽매여 살고 있다. 여기서 매몰된 채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은 한편으로는 탈주를 종용하며 심장 뛰게 하는 규남과 안주하려는 현상이 한 개인 안에서 양분된 두 마음이라고도 볼 수 있다. 우리 속에는 탈주를 꿈꾸는 규남과 안주하려는 현상이 함께 존재하는 것이다.
결국, 바꾸지 못할 운명이라고 누군가는 말했지만, 한번 해보겠다는 굳은 결심을 위해 규남은 빗길, 갈대밭, 흙탕물, 지뢰밭을 계속해서 달리게 만든다. 이는 자신이 열망하는 바를 위해 어디론가 탈주하고자 하는 인간의 보편적이고 근원적인 욕망이다. 영화는 스스로 원하는 미래를 선택하고 나아가며, 그 과정에서 실패도 할 수 있는 자유에 대한 메시지를 담고 있다.
* 사진 출처 : 네이버
글·서성희
영화평론가, 영화학박사. 전 대구경북영화영상사회적협동조합 이사장, 전 독립영화전용관 오오극장 대표, 전 대구영상미디어센터 센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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