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녀의 그림 속 여인들은 당당하고 화사하다. 바라보고 있으면 여인들이 금세라도 튀어나와, 내게 어깨동무를 하며 야유회를 함께 가자고 할 것 같다. 그녀들의 의상은 자유분방하고 도발적이다. 다수의 고객을 위한 대중적인 프레타포르테, 관중과 평론가의 시선을 의식한 오트 쿠튀르 컬랙션과는 달리, 그녀가 창조해낸 의상은 어떠한 형식에도 구애받지 않는다.
빨강, 파랑, 노랑, 하양의 원색의 원단을 재단하고 조각내어 두른 그녀들의 의상에서는 디자인의 규칙과 질서라는 게 없다. 화가가 창조해낸 여성들의 눈빛은 몽롱하고 몽환적이며, 길쭉한 키에 긴 목과 팔, 가느다란 손가락은 남편과 아이를 위해 밥 짓고 청소해야 하는 현실 속 여인과는 거리가 멀다.
잔뜩 부푼 버닝이나 챙이 넓은 모자를 머리에 쓰고, 목과 팔에 화려한 액세서리를 칭칭 감은 채 어디로 외출을 하려는 걸까? 그녀들은 무릅까지 올라온 부츠의 끈을 동여매고 떠날 채비를 하고, 이를 기념해 스냅사진을 찍는다. 영화의 하이라이트처럼, 화려한 미장센(Mis en scene)으로 기록되는 순간이다.

화가 강혜정의 인물들은 밑그림 없이 직관적으로 창조된 까닭에 언뜻 보면 키치적인 요소가 강한 앤디 워홀의 팝 아트를 연상시키지만, 이렇게 말하면 화가에게는 대단히 실례될 듯 싶다. 워홀은 배우 사진과 만화 등 대중적 이미지를 차용하며, 실크스크린 기법을 통해 그들의 이미지를 반복적으로 묘사한 반(反) 회화적인 상업 작품들을 주로 내놓았으나, 강혜정의 그림은 회화적이며, 예술 중심적이다. 워홀이 색을 달리해 반복적으로 그린 마릴린 먼로의 초상화들은 카메라를 향해 살짝 입을 벌린 섹스심벌의 비주체성이 다분하게 느껴지지만, 강혜정의 그림 속 여인들은 대중과 관중, 평론가의 시선을 떨친 ‘길들여지지 않은’ 옷차임으로, 주체적으로 결정하고, 활동하는 모습들을 보여준다.
유감스럽게도 화가의 그림에서는 남자들의 존재감은 거의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남자인 필자에게 어떤 불편함도 주지 않는다. 화가는 “왜 남자들은 꿔다놓은 보따리처럼 존재감이 없느냐”는 질문에, “어렸을 적에 4자매가 알콩달콩 지냈고, 지금도 자주 만나다 보니, 여자들을 주로 그리게 된 것일 뿐, 결코 남자를 배제한 것이 아니다”고 말한다. 그러니까, 그녀의 그림은 자매들의 알콩달콩한 이야기를 품고 있는 셈이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녀의 작품들은 오브제의 디테일을 단순화한 절제미와 동적인 입체감을 살린 영화적 미장센 기법이 두드러져 엿보인다. 평소 인물들과 배경을 관찰하길 좋아하는 화가는 그녀 만의 시선으로 이를 단순화하고 생략하고, 또한 강조하고 변형하며 자신의 독보적인 그림 세계를 구축했다고 볼 수 있다.
캔버스에는 그녀만의 색채 세계가 녹아 있다. 강렬한 색감이 전체적으로 느껴지고, 인물과 배경은 노란색과 푸른색, 빨간색, 회색, 황색으로 선명하게 채색되어, 마치 꿈 속의 세계에 들어선 것 같은 기분을 준다. 발랄하고 힙한 분위기가 화폭에 가득하지만, 인물들의 머리와 얼굴, 목과 팔, 몸, 다리는 뼈가 없는 연체동물처럼 꺾이고 휘고, 늘어지고 흐느적거려 왠지 나른하고, 평화스러운 멜랑꼴리마저 주기도 한다.

자매들과 함께, 정오의 호사스러운 점심을 나눈 오후 2시 쯤, 좀더 멀리 바람을 쐬러 갈 요량으로 채비를 갖춘 장면이 연상된다.
그녀의 그림들은 잘 읽힌다. 작품을 어떻게 이해하느냐는 것은 관람객의 몫이지만, 그녀의 그림들은 즐겁고 편하다.
다른 화가들의 그림에서 흔히 엿보이는, 오브제를 베끼다시피 똑같이 그리는 모더니즘의 단순함이나, 화가 자신도 모르고 평론가도 이해못하는 포스트 모더니즘의 미스터리를 담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마니에르 드 부아르>의 16호인 『길들여지지 않는 예술』에서 런던에서 가장 저명하고 트렌디한 사치 갤러리(The Saatchi Gallery)를 비롯해, 프랑스 독일 등 해외에서 주목을 받고 있는 작가의 작품을 배경 그림으로 선택한 것은 그의 작품이 기존의 화법(畫法)에서는 발견하기 힘든 뭔가 ‘길들여지지 않은’ 예술을 지향하고 있다고 판단되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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