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과연 네가 이 이야기의 주인공이 될 수 있을까?” 대답하지 않는 퓨리오사(안야 테일러조이)는 거의 말을 하지 않는다. 대신 보기만 한다. 그녀의 어머니가 살해당할 때 디멘투스(크리스 헴스워스)가 “고개 돌리지 말고 똑바로 봐야지”라고 한 말을 지키듯, 잔인한 처형장면을 눈앞에 두었을 때도 고개를 돌리지 않는다. 퓨리오사는 눈을 감지 않고 보는 자이다. 그리고 새장 같은 우리 안에서 그것을 바라보았던 것처럼, 갇힌 채 보는 자이다. 그녀는 디멘투스의 이동 감옥에 갇히거나, 임모탄 조가 부인들을 가둔 인간 금고 속에 감금되거나, 시타델 또는 황무지라는 지평선이 사방으로 끝없이 펼쳐진 사막 한가운데에서도 밀실에 있는 것만 같다. 이는 물리적인 닫힌 공간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퓨리오사는 반복되는 운명 안에 갇혀 있다.
오프닝에서 퓨리오사와 그녀의 어머니가 디멘투스의 소굴에서 탈출해 적들의 추적을 받는 장면이 있다. 같이 도주하는 것이 어렵다는 판단을 한 어머니는 퓨리오사와 머리를 맞댄 후 도망치라고 한다. 하지만 도망치던 퓨리오사는 총소리를 듣고 되돌아간다. 이는 4부에서 어머니가 잭(톰 버크)으로 바뀌어 다시 반복된다. 퓨리오사와 잭은 머리를 맞대고 우정과 사랑을 나누며 같이 도망칠 걸 약속한다. 하지만 디멘투스의 책략에 걸려 잭이 무기농장에 고립되고, 퓨리오사는 이전과 같이 도망치지 않고 잭을 구하러 간다. 하지만 전쟁이 반복되듯 어머니의 끔찍한 죽음은 잭에게도 똑같이 찾아온다.

5부의 ‘복수, 그 너머’ 또한 4부 ‘집으로’처럼 1부 ‘도달불능점’의 변주이다. 퓨리오사의 어머니가 납치된 딸을 쫓아 저격 총을 들고 사막을 달린 것을 뒤집어, 퓨리오사가 어머니가 그랬던 것처럼 자신이 잃어버린 것을 되찾기 위해 디멘투스를 쫓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녀의 어머니가 결국 실패한 것처럼, 퓨리오사도 자신이 잃어버린 것을 찾는 데 실패한다. 막의 제목처럼 집으로 돌아가는 것과 완전한 복수는 불가능한 무언가다. 그 때문에 죽음 앞에선 디멘투스는 “내가 죽어도 넌 여전히 슬픔에 빠져 있을 걸”이라 빈정거리며, “(잃어버린 것을) 전부 돌려줘”라고 말하는 퓨리오사에게 “불가능해”라고 단언한다.
퓨리오사는 실패, 불가능성, 밀실과 같은 이야기 구조에 갇혀 있다. 영화는 1부가 4부와 5부로 변주되어 반복된 것처럼 실패하는 인물에 관한 이야기를 구조화한다. 혹은 우리의 삶과 그것을 반영한 이야기가 지닌 형식을 가시화한다. 이야기에 관한 메타적이고 자기반영적인 <3000년의 기다림>에서 요정에게 소원을 세 번 비는 이유가 보편적인 3막 구조가 지닌 설정-대립-해결을 지시하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이는 진(이드리스 엘바)이 들려주는 요정으로서의 이야기도 세 번 반복되며 이야기 형식의 절대성을 강조한다. 그것을 잘 알고 있는 이야기 연구자 알리테아(틸다 스윈튼)는 자신이 진의 주인공이 되어 소원을 비는 순간이 오자 난감해한다. 소원을 비는 이야기는 교훈극이고 결국 실패할 수밖에 없는 결말을 맞이하기 때문이다.

반복과 실패의 문제는 <매드 맥스: 분노의 도로>의 맥스에게도 나타난다. 퓨리오사가 보는 자, 알리테아가 듣는 자라면 맥스는 조력자이다. 그는 퓨리오사(샤를리즈 테론)를 도와 끝없는 도주를 반복한다. 이야기의 변곡점 전까지 총 세 번의 추격-액션 시퀀스를 똑같은 구도로 되풀이하며, 싯누런 사막과 푸른 하늘 사이에 영원히 갇힌 것처럼 내달린다. 결국, 목표지점에 도착했을 때 그들을 맞이하는 것은 실패이다. 풍요의 땅은 사막이 되어버렸고 퓨리오사는 무기력하게 주저앉아 울부짖는다. 하지만 그들은 멈출 수 없다. 추격을 피하고자 어쩔 수 없이 다시 도주의 이야기를 반복해야만 한다. 이때 맥스가 제안한다. 추격과 도주라는 구도를 바꿔 도망쳐 온 곳으로 돌아가자고. 마침내 그들은 도망이 아니라 맞서 싸움으로써 구원을 쟁취한다. <3000년의 기다림>의 알리테아도 소원을 빌고 들어주는 주인과 요정의 계약자 관계가 무효화 되는 자기지시적 소원으로 반복되는 고리를 끊는다. 세 번이 아닌 사랑을 고백하고 그것을 증명하는 두 번의 소원만으로 규칙과 진의 감옥과 같은 병을 깨트린다.
<퓨리오사: 매드맥스 사가> 또한 룰을 깨트린다. 잔인한 처형장면을 “고개를 돌리지 말고, 눈을 감지 말고 봐”라고 했던 명령을 어기고, 발단-전개-위기-절정-결말로 이루어진 이야기 구조를 5개의 막으로 드러내 절정 부분을 도려낸다. 퓨리오사가 디멘투스의 고간을 우스꽝스럽게 가리고 있던 인형 리틀D를 잘라내듯이 영화의 동력이 되는 과장된 남성성, 클라이막스의 쾌감을 거세한다. 예컨대 영화에서 가장 극적인 지점은 어디인지 한 번 생각해보자. 어머니를 잃는 1부인지, 잭을 잃는 4부인지, 복수에 성공하는 5부인지 애매하다. 어느 하나 도드라지지 않으며, 구성상 이야기에서 절정 부분이어야 할 디멘투스와의 전쟁을 내레이션과 몽타주로 간단하게 넘겼기 때문이다. 또한, 디멘투스가 패망하는 장면묘사도 없다. 즉 복수의 과정 없이 복수의 동기와 처벌의 결과만 보여준다. 여기엔 어떠한 절정도 없다. 디멘투스와의 길고 긴 대화를 멈추고 복수를 실행하는 순간을 보자. 카메라는 거리를 벌려 롱 숏으로 둘을 비춘다. 그러면 역사가의 내레이션과 함께 신화적 복수는 극적인 감각이 아닌 거리를 두고 듣는 설명적인 말로 남는다.
고문과 살해, 절단된 신체, 구더기 가득한 시신의 끔찍한 이미지와 B급 코스튬, 개조된 기계의 기괴한 매력을 페티시화하고 과잉의 남성성과 폭력성을 적극적으로 전시하던 영화는 가장 중요한 순간에 거리를 두고 고개를 돌린다. 그렇게 절정과 쾌감을 거세한 만큼 그 이후에 따라오는 슬픔과 허무함도 없다. 디멘투스의 고백처럼 “만족할 때까지 복수하기 위해, 컴컴한 슬픔을 씻어 줄 자극을 찾는” 닫힌 구조, 반복의 고리, 끝없는 전쟁을 멈출 수 없다면 그것을 보는 방식을 바꾸는 것이다. 거리를 두거나 보지 않고 듣는다. 또는 “만족을 모르고 매번 더 강한 자극을 필요로 하는” 관객을 보는 자 퓨리오사에 투영한 것처럼 (영화를) 보는 행위를 자기반성적으로 사유한다.

물론 <퓨리오사: 매드맥스 사가>는 1억 7천만 달러 제작비의 액션 영화라는 점을 잊어선 안 된다. 3부에서 굴욕자들과 벌이는 전투 장면을 보면. <매드 맥스: 분노의 도로>에 맞먹는 극단적 액션과 다양하게 변주되는 전투 방식 거기서 오는 이미지와 운동의 활력과 화려함, 완급 조절, 자연스럽게 이해시키는 퓨리오사와 잭의 드라마까지 완벽한 시퀀스다. 또한, 오토바이, 트럭, 자동차가 지닌 금속성의 아름다움과 그것들이 눌리고 찢기고 폭발하는 쾌감은 절정 그 이상의 것을 선사한다. 하지만 이와 동시에 몰입에 방해되는 이야기의 막을 나누고, 주인공은 무기력하게 실패를 반복하며, 클라이막스가 없는 엔딩에 도달하는 양가성을 지닌 이상한 상업 영화가 된다.
이 영화는 <매드 맥스: 분노의 도로>가 아니다. 선명하고 극적인 이야기와 하늘, 모래, 쇠, 불이라는 미니멀한 이미지 구성, 긍정적인 가치를 직설적이고 극단적인 액션에 담는 스타일과 다른, 부정적이고 부조리하고 모순적인 세계의 구조를 담는 영화다. 다시 “과연 네가 이 이야기의 주인공이 될 수 있을까?”라는 질문으로 돌아오면 그 답은 영화의 엔딩이 보여준 것처럼, 이야기가 종료된 이후에 찾을 수 있는, 이승에 없는 구원과 같은 것이다. 퓨리오사의 주체적인 이야기는 이야기가 끝나며 시작된다. “죽음이 삶을 통해 메아리로 돌아오는 것”이라는 역사가의 말처럼 말이다. 그렇게 <퓨리오사: 매드맥스 사가>는 프리퀄로서가 아닌, 온전한 하나의 작품으로서 희망이 없이 끝없이 실패를, 전쟁을 되풀이하는 인간의 황무지 같은 세계를 담은 이상한 상업 영화이자 최상의 이상함으로 남는다.
글·정우성
2021년 영평상 신인평론상을 받았다. 현재 예술강사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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