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는 시간을 멈추거나 되감을 수 있다. 운동장에 나란히 일시 정지된 아이들의 모습은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도 시간을 변용하는 시네마의 마술을 부리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내 모든 것이 즐거운 놀이로 밝혀지며 멈춰 있던 아이들이 움직이기 시작한다. 그들 뒤편에서 흔들리는 나뭇가지는 애초부터 인위적으로 멈출 수 없는 시간을 가리킨다. 물이 아래로 흐르듯 우리들의 삶은 흘러가는 시간 위에 놓인다. 술래가 된 카메라는 나뭇가지와 시냇물의 잔잔한 움직임을 포착한다. 시간의 자장 속에 있는 것은 인간만이 아니다. <악을 존재하지 않는다>의 배경이 되는 숲 또한 그 속에 시간의 물줄기를 감추고 있다.
긴 시간 동안 숲을 올려다보는 오프닝 숏은 나뭇가지를 바라보는 인물에 대한 궁금증을 자아낸다. 하지만 많은 비평문이 지적하듯 시선의 주인은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그루터기에 올라 하늘을 바라보는 하나(니시카와 료)의 이미지가 결합되지만, 매끄러운 트래킹숏과 우두커니 멈춰선 아이는 쉽사리 하나의 몽타주를 이루지 못한다. 앙상한 나뭇가지를 어루만지던 애처로운 선율은 아이의 등장과 함께 침묵으로 돌아선다. 영화를 통틀어 세 번 반복되는 기묘한 시선의 주체를 미리 단정 지을 필요는 없다. 오히려 숲의 이미지 전후에 나타나는 아버지와 딸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건망증을 앓는 타쿠미(오키마 히토시)는 딸의 흔적을 뒤쫓으며 아이가 걸었던 길을 걷고, 아이가 보았던 것을 본다. 그들이 공유한 광경이 의문의 트래킹숏에 담긴 숲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동일한 장면의 반복은 단순히 부녀가 같은 대상을 보았다는 사실 이상을 가리킨다. 과거를 반복하는 현재를 통해 우리는 두 인물 사이의 간격, 시간의 흐름을 살필 수 있다.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의 카메라는 이따금 자동차의 후방에서 인물이 지나온 길에 주목한다. 이 독특한 화면이 처음으로 나타날 때 타쿠미는 또다시 아이를 찾으러 가는 중이었고, 곧 반복되는 숲의 이미지와 결합한다. 누군가 걸어간 길을 뒤따르는 것은 앞선 이와 시선을 공유하고, 무엇보다 지나간 시간의 물결을 거스르는 행위다.
숲이 간직한 시간성은 글램핑 회사가 개최한 설명회에서 본격적으로 은유된다. 정화조 건설 과정에서 산에 흐르는 물이 갈등의 중심으로 떠오른다. “상류는 분명 하류에 영향을 주기 때문에 상류에 사는 사람에게는 책임이 있다.” 자연 파괴를 둘러싼 언쟁을 고려한다면, 산의 높낮이에 시간성을 덧입히는 것은 어렵지 않다. 지금 우리가 사는 방식은 후대에 영향을 주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자연을 보전할 책임이 있다. 설명회는 자본에 대항하는 자연이라는 외피를 두르고 있지만, 그 이면에는 과거와 현재, 현 세대와 미래 세대의 관계가 녹아있다. 물은 낮은 데로 흐른다. 그리고 시간은 언제나 미래를 향해 흐른다. 이로써 시간의 흐름은 책임의 문제와 결합한다.

영화 속 모든 인물은 누군가를 뒤쫓는다. 어른들은 실종된 아이를 찾고, 아이는 유유히 모습을 감춘 사슴의 발자국을 따라 숲을 향한다. 시간을 거스르는 행위의 인과관계는 사슴, 아이, 어른 순의 선형적 흐름을 그린다. 설명회에서 균형을 강조하는 타쿠미의 발언은 이 구도와 일맥상통한다. “이곳의 주인은 엄밀히 따지면 모두 외부인이다.” 세계에는 인류에 앞선 자연이 있다. 과거의 흔적을 향하는 이들은 모두 최종장에서 그들을 지그시 바라보는 대지모(大地母)를 마주한다. 타쿠미에게 균형이란 뒤늦게 세계에 뛰어든 인간이 자신의 선행 존재에게 갖추는 예의와 같다. 공석으로 남겨둔 시선의 주체 자리에 영험한 자연을 대입해 볼 수 있다. 대지 위에 피어난 와사비를 정면으로 직시하는 인물들은 자연의 시점을 구현하는 영화의 특성을 반영하는 듯 보인다.
하지만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때로 시선의 메커니즘에서 자연을 철저히 배제한다. 현실과 마찬가지로 영화 내에서 인류는 마땅히 지켜야 할 균형의 질서를 도외시한다. 어린아이가 사라지자 온 동네 주민들이 수색에 나선다. 총에 맞아 사체조차 방치된 새끼 사슴의 경우와 대조적이다. 서사의 축을 형성하는 두 개의 사건 모두에서 끝내 사슴은 비가시화된다. 사슴을 만지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오직 그것이 인간에게 해롭기 때문이다. 타쿠미는 비가시화된 존재의 행방을 묻는 말에 자신의 무지를 깨닫는다. 신념이 무너져 내린 곳에 피어오른 분노, 이것이 그가 자연의 이름으로 타카하시를 처단한 이유일지도 모른다. 살인의 순간이 담긴 롱숏은 멀찍이서 모든 상황을 지켜보는 숲의 시선처럼 평온하다. 자연의 부르심에 응답한 전령은 사슴의 혼을 안아 올려 아득한 어머니의 품으로 향한다. 그러나 인간 대 자연이라는 도식화된 틀은 총체적인 삶의 순간들을 단선적인 생태주의 서사로 환원할 위험이 있다.
이에 비해 디제시스 전반을 한데 아우르는 연기 이미지는 문명과 자연의 불가분한 관계를 내포한다. 축사에서 소똥이 내뿜는 열기는 국수 가게의 뜨끈한 김을 거쳐 담배 연기로 이어진다. 아이가 실종된 이후 산장 굴뚝에서 피어오른 인간의 흔적은 흥미롭게도 살인 사건이 벌어진 호수의 안개를 닮아있다. 무엇보다 영화에 배어있는 짙은 상징성은 모든 사건이 한 인물의 개인사로 환원되는 것을 거부한다. 당혹스러운 결말을 한 꺼풀 벗겨내기 위해서는 시간성에 균열을 내는 어린아이에 주목해야 한다. 환상적인 톤으로 전개되는 하나의 꿈 몽타주는 영화의 선형적인 시간 구조를 넘어선다. 연못, 새, 깃털, 발자국, 사슴 이미지의 연쇄는 그녀가 이후 실제로 사슴을 마주하는 과정으로 현실화된다.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에서 발자국을 따라가는 행위는 과거의 누군가를 뒤쫓는 행위였지만, 그녀에게는 꿈이 예언한 미래를 향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스산한 달빛 아래 유유히 흐르는 마지막 숲의 이미지는 과거를 거스르지 않는다. 발자국을 뒤쫓은 끝에 타쿠미는 딸을 찾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전히 그는 한없이 과거로 침잠한다. 딸이 잠들기 직전, 타쿠미는 모녀의 다정한 일상이 담긴 사진을 바라보았다. 하나의 어머니는 그 빈 자리로 짐작하건대 가까운 과거에 목숨을 잃었거나 가족을 떠난 것으로 보인다. 이제 사랑하는 사슴은 숨을 거두었고, 아버지는 향수에 젖은 채 흘러가는 시간을 붙잡으며 영원히 과거로 회귀할 뿐이다. 딸의 예지몽이 선형적 시간의 지평선 너머로 뻗어나간 것과 대조적이다. 하마구치 류스케의 캐릭터는 언제나 타인과 세계를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불가지론의 향기를 풍긴다. 그러나 동시에 영화는 세계의 알 수 없음이 아닌 그 세계에서 살아가는 자들의 다음 행보에 주목한다. 여기서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의 탁월함을 엿볼 수 있다. 영화는 자연을 바라보는 명확한 정답을 제시하지 않는다. 그보다 인간과 자연이 같은 세계에 놓여 있으며, 시간이 공통된 삶의 조건임을 드러낸다. 사슴의 탈을 쓴 채 미래로 나아가던 아이가 죽음을 맞았다. 그렇다면 타쿠미가 진정으로 잃어버린 것은 과거를 맴도는 삶에서 다음 시간으로 나아갈 힘이다.
하마구치 류스케는 인터뷰에서 카메라가 누구의 시선도 대신할 수 없다고 말했다. 세계 어디에나 흐르지만 명확한 실체를 갖지 않는 시간의 유일무이한 성질은 이질적인 시선들이 맞부딪히는 영화의 모호한 빈자리를 메꾼다. 그렇다면 감독은 왜 이토록 카메라 배후의 시간을 강조하는 것일까? 잔잔히 흐르는 시냇물과 빠른 속도로 질주하는 지하철의 이미지가 충돌하는 장면 전환에서 그 이유를 짐작해 볼 수 있다. 차에 탑승한 모든 인물은 오로지 전방만을 주시한다. 자동차의 빠른 속도가 인물과 주변 환경을 단절시키기 때문이다. 교통, 통신 수단이 점점 발전함에 따라 현대인은 더더욱 빠른 속도를 강제 받는다. 인간이 디지털 이미지와 고속 교통수단 속에 갇힐수록 그들 주변의 비가시화된 존재는 점점 더 희미해져만 간다.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자연과 문명, 두 세계 모두를 아우르는 상위 질서인 시간을 통해 우리가 빠르게 지나치며 놓친 존재들에 빛을 비춘다.
글·김현승
영화평론가. 2022 영평상 신인평론상으로 등단하였다. 현재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이론과 예술전문사에 재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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