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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경의 시네마 크리티크] <아랑곡 餓狼谷 Valley of The Fangs>(1970), 어른들이 꾸는 꿈
[김 경의 시네마 크리티크] <아랑곡 餓狼谷 Valley of The Fangs>(1970), 어른들이 꾸는 꿈
  • 김 경(영화평론가)
  • 승인 2024.08.19 10:2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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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대극’이라는 은유

 

 

<아랑곡>은 정창화 감독이 직접 시나리오를 집필했다. 그래서인지 <아랑곡>은 그의 전작  <풍운의 궁전>(1959)이나 <황혼의 검객>(1967)과 여러모로 비슷한 결을 보여준다. 예컨대 시대적 배경이 과거의 특정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풍운의 궁전>은 삼한(마한), <황혼의 검객>은 조선, 그리고 <아랑곡>은 명나라다. 화려한 궁중이나 복식 등 시대극 특유의 볼거리는 기본이다.

 

<아랑곡> 포스터
<아랑곡> 포스터

<풍운의 궁전>의 구슬아기, <황혼의 검객>의 향녀, <아랑곡>의 송지예 등 청순가련하지만 강단 있는 여주인공들은 그녀들을 돕는 강하고 정의로운 무사와 함께 나라의 기강을 흔드는 간신들이라는 악당들과 맞서 개인적인 위기를 극복해 낸다. 즉, 간신들이 만들어내는 여러 음모와 핍박을 통해 무력해 보이는 개인이 대립하게 되고 개인이 지키고자 하는 정의가 영화의 뼈대가 된다. 이같이 악랄한 빌런과 정의로운 주인공의 대립 구도 속에서 거대 담론이 억압하는 개인이 가혹한 운명에 맞서는 모습이 시대극이라는 안전장치를 통해 접근할 수 있는 내러티브다. 나라와 개인의 내적 동기가 긴밀하게 얽혀있기 때문에 도드라지는 개인에 대한 억압은 지금 이곳이 아닌 과거를 묘사하는 시대극을 통해 허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현실은 은유로만 표현 가능하고, 섣부른 은유는 번번이 정부나 권력 집단의 제재를 받는 것이 다반사다. 그래서 시대극이라는 장르 자체가 은유일 수밖에 없다.

1928년생인 정창화 감독은 일제강점기(10대)나 한국전쟁(20대), 70년대 군부정권의 탄압(30대) 등을 거치면서 한국의 특수한 역사가 그의 인생 전반에 녹아들었고, 결국 박정희 정권의 핍박 때문에 홍콩에서 활동하게 된 계기(40대)가 되었다. 그의 삶은 한국 근대사이고 한국영화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개인의 운명이 거대 서사의 격변 속에 소용돌이치는 것이 그의 영화 속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이유이다.

 

어른들이 꾸는 꿈

<스잔나>로 유명했던 당대의 청춘스타 리칭(리궈잉李國瑛)이 연기한 송지예는 간신들의 모함으로 인해 목숨이 위태로워진 아버지를 구하기 위해  선왕이 아버지 송환에게 하사했던 '면사 철권'이라는 징표를 사용하려고 하지만, 이를 빼앗으려는 간신들의 간악한 칼끝을 피하기가 쉽지 않다. 무공이 뛰어난 의협, 유 여령(료례 Lo Lieh)이 그녀를 도와 충신 송환은 목숨을 구하게 된다.

 

료례와 리칭
료례와 리칭

정창화 감독은 그의 자서전 『The Man of Action(2015)』에서 이 영화를 통해 “어른들이 가지고 있는 꿈”(167p)을 보여주고자 했다면서 “주인공이 밤에 지붕을 타고 날아다니는 장면을 우리가 꿈에서 날아다니는 것 같은 환상적인 장면으로 그리려 했다.”(167p) 고한다. 그러나, 료례가 지붕 위로 날아다니는 와이어 액션은 정창화가 어른들의 꿈을 표현하고자 하는 여러 방법 중 한 가지에 불과했다. 정창화는 일찍이 꿈같은 표현주의적 영상미를 위해 영화라는 매체의 속성을 연구하고 다양한 표현을 시도한 바 있다. 예컨대, <황혼의 검객>에서 허장강이 위로 뛰어오르면서 팔을 자르는 장면에 트램펄린(trampoline)을 사용한 이후 트램펄린은 그가 애용하는 도구가 되었다(138p). <장화홍련전>(1956)에서는 프레임 수를 늘려 슬로우 모션으로 촬영 후 24프레임 일반 영사기에 돌리는 촬영 기법에 우리 전통 놀이기구인 ‘널’을 이용해 수직 속도감을 결합함으로써 장화와 홍련이 “말 그대로 ‘쓰~윽’ 날아 올라가게”(74p) 했다. <아랑곡>의 인상적인 장면에는 그간의 이런 시도들이 효과적으로 사용된다. 예를 들어, 송지예의 사촌 시카이(진량)가 칼에 베이는 장면은 상대 무사가(트램펄린을 사용하여) 화면 위쪽에서 떨어지면서 찔러 들어오기 때문에 빠르고 '의외성' 즉, ‘놀람(surprise)’을 불러일으킨다. 그 밖에도 카메라와 인물을 고정해 놓고 배경만 빠르게 지나가도록 하거나, 배경을 고정하고 인물만 움직이게 하는 등 속도감을 당겼다가 늦추고 부감부터 낮은 앵글까지 끊임없이 눈높이의 변화를 주면서 화면구성을 다채롭게 한다. 망원렌즈를 통한 빠른 줌인, 줌아웃의 반복은 빈티지 스타일로 재해석 된다. 한편 와이드 앵글과 딮 포커스로 여러 사람들이 한 곳에 싸우는 액션 장면을 섬세하게 표현한다거나, 흙먼지를 날리며 달리는 말들의 다리는 낮은 앵글로 잡고 바로 다음 장면에서는 익스트림 롱쇼트로 잡아 산등성이를 달리는 추격 장면을 역동적인 앵글과 편집으로 보여주며, 서부극의 장르 컨벤션인 남북 앵글이나 회화적 미장센을 위한 갈대와 바람, 석상 등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어른들이 꾸는 꿈’을 치밀하게 구현한다.

 

촘촘하고 효율적인 에피소드

 

 <아랑곡>도 <천면마녀>처럼 세밀한 에피소드들이 촘촘하게 배치,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쫓고 쫓기는 관계’라고 요약할 수 있지만 그것을 위한 장면 배치와 편집과 액션을 통해 다양하고 치밀하게 연출된다. 예를 들어, 모녀가 도망치는 객잔과 궁전 신축 노동자들의숙소 등 쫓기는 곳은 다시 서브플롯을 위한 공간과 액션이 된다. 객잔이라는 공간은 수많은 무협영화 속에 반복되는 공간이며 객잔 액션은 어느 정도 정형화되어 있다. 좁은 마루, 격자무늬 창과 문들을 통해 공간이 바뀌고 격투가 벌어지며 와이어를 통해 지붕으로 점프하며 관객의 기대감을 충족시킨다. 또한, 신축 궁전이라는 맥락 속에 취약한 왕권, 영화가 전개되는 볼거리, 쫓고 쫓기는 서사가 풍성해진다. 이곳에서도 궁중의 충신과 간신처럼 패가 나뉘고, '면사 철권'은 갓 찍어낸 무른 벽돌 속에 은닉되고, 비밀 편지는 노출된다. 그러는 동안 건설 현장에 노동자와 무사, 물과 불 그리고 모래언덕이 화면을 채운다. 물론, 이러한 물과 불과 모래언덕은 모두 액션 장면을 위해 알차게 사용된다. 송지예를 연기한 리칭이 <스잔나>에서 불렀던 노래들은 지금도 올드팬들한테는 꽤 유명한데, <아랑곡>에서도 그녀의 재능은 신분을 숨긴 거리의 악사 에피소드를 만든다. 그녀는 객잔에서 면사철권을 숨긴 비파를 연주하며 노래를 부르고, 그녀의 수호자가 된 협객 유 여령도 이 장면에서 그녀에게 매혹된다. 유 여령과 송지예의 러브 라인은 은은하고 암시적이어서 마치 정창화 감독의 인생 영화 <셰인>(1953)의 셰인(앨런 래드)과 마리안(진 아서)처럼 아련하다. 그리고 셰인이 그랬듯 유 여령 또한 영화 마지막에는 정처 없이 떠난다.  아쉬움과 결핍은 기대와 욕망을 낳으니, 우리는 또 다른 협객을 기다린다.

 

 

글·김 경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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