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의 오프닝은 중요하다. 어떠한 이야기의 정보도 제공되지 않은 상태에서 오프닝 시퀀스는 감독이 설계한 세계 안에 본격적으로 진입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조너선 글레이저의 영화 <존 오브 인터레스트>(2024)는 이러한 관객들의 기대감을 배반하며 동시에 막연한 공포를 심어준다. 아이러니하게도 타이틀이 뜬 뒤에 이어진 다음 장면은 3분가량의 블랙 화면이다. 어두운 극장의 좌석에 앉아 첫 장면이 시작되기를 기다려야 하는 무력한 관객들에게 블랙 화면 너머로 들리는 기이한 소리는 굉장히 불쾌하다.
관객들에게 있어 이미지가 소거된 소리에 상상이 더해지려는 시도조차 어려운 이유는 영화를 구성하는 질료가 턱없이 부족하기 때문일 것이다. 아니 제공조차 되지 않았다. 그나마 소리의 실체라도 추적하기 위해 발버둥치지만, 사실 관객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런 상태에서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시작된다. 다음 장면은 숲속에서 평화롭게 피크닉을 즐기는 가족들의 모습이 그려진다. 나른한 오후의 초록빛 풍경에 우리는 피부로 느꼈던 불쾌감은 금세 잊어버리고는 그 세계에 동화되고야 만다. 그간 <쉰들러 리스트>, <인생은 아름다워>, <사울의 아들>, <피아니스트> 등의 이른바 ‘홀로코스트 영화’는 폐허가 된 공간을 비추는 것을 중점으로 뒀지만, <존 오브 인터레스트>에는 그런 이미지 자체가 부재하다. 심지어 아우슈비츠라는 이름의 특수성은 평범한 일상과 눈치채기 어려운 적의가 뒤섞인 풍경이 되어버린다.

형형색색의 꽃이 만개한 정원과 그 사이를 뛰노는 아이들, 단란한 부부의 일상은 높은 담벼락 너머의 현실과는 철저하게 구분된다. 감독은 계속해서 피어오르는 검은 연기와 누군지 모를 비명소리가 들려오는 외부의 공간을 공백으로 남겨둔다. 영화는 독일의 나치 장교인 루돌프(크리스티안 프리델)와 아내 헤트비히(산드라 휠러)의 서사를 중심으로 이어가는데, 그들의 천진한 일상에는 가끔씩 불쾌한 진실은 표정을 감추다가 빼꼼하고 고개를 내민다. 루돌프가 아이들과 함께 강가에 나가 노는 장면을 살펴보자. 한 폭의 그림 같은 풍경 안에서 아이들은 강가의 바깥에서 루돌프는 강 한가운데에 들어가 여유롭게 낚시를 하고 있다. 거세진 물살과 함께 루돌프는 자신의 발밑에 위치한 무언가를 발견하고는 흠칫 놀라며 아이들을 급하게 데리고 집으로 귀환한다.
그가 발견한 것은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떠밀려온 타다 만 시체의 일부다. 아이들의 몸에 붙어있던 검은 재들은 씻겨 나가지만, 그중에서 일부는 욕실의 표면에 달라붙어 있다. 결국 그것을 다시 물로 흘려보내야 하는 것은 루돌프의 집에서 근무하는 유대인 하녀다. 또한, 외부에 위치한 불편한 진실은 높다란 벽을 사이에 두고 루돌프 가족의 일상에 스며들어 있지만, 아무도 인식하지 못한다. 가시화되는 시점은 그들의 집에 놀러 온 헤트비히의 엄마에 의해서다. 뭉게뭉게 피어오른 검은 연기는 외부인인 헤트비히의 엄마가 연신 기침을 하게 만들고, 밤마다 들려오는 총성과 창문에 비친 붉은빛은 잠에 들 수 없는 고통으로 다가온다. 결국 딸인 헤트비히에게 편지 한 통만을 남긴 채, 그녀의 엄마는 평범한 악으로 물든 공간을 벗어난다. 이는 루돌프가 다른 지역으로 전출되는 상황에서 아내인 헤트비히는 아우슈비츠의 집을 지키겠다는 장면의 맥락과는 상반된다. 상술했던,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떠밀려온 재가 섞인 강물 앞에서 두 사람은 시시한 말다툼을 한다. 그들에게 있어 중요한 것은 강물 아래에 가라앉은 시체의 재가 아닌 그들의 평화에 관한 문제다.

조너선 글레이저는 굳이 루돌프가 집 내부의 전등을 모두 소등하는 장면을 굳이 두 차례에 걸쳐 공들여 보여주며, 외부인과 내부인을 경계 짓는 태도에 대해 언급한다. 첫 번째 장면에서 카메라가 공간을 비추는 시선은 외부에서 내부를 지켜보는, 약간의 거리감을 가지고 있다. 아직은 공간 안으로 진입하기를 버거워하며, 경계하고 머뭇거리는 느낌이다. 다시 등장한 두 번째 소등 장면에서 카메라는 루돌프의 뒤를 따라간다. 이는 영화를 보는 관객들의 태도를 대변하는데, 검열된 풍경에 익숙해지면서 루돌프와 함께 내부 곳곳을 누비게 되는 것이다. 더불어, <존 오브 인터레스트>에는 열화상 카메라로 촬영된 독특한 장면이 있다. 루돌프가 잠에 들지 않는 어린 딸에게 동화책 「헨젤과 그레텔」을 읽어주는 장면과 이상하게 호응하는 열화상 카메라로 촬영된 소녀의 모습은 마치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는 이미지처럼 보인다. 신기한 점은 소녀가 자전거를 타고 어떤 집 안으로 들어가자, 표정이 존재하는 하나의 객체로서 비춘다는 점이다. 유대인 소녀는 아우슈비츠의 거리에서 한 명의 존중 받아야 할 인간으로서 존재할 수 없음을 암시한다.
기존의 홀로코스트 영화들과는 궤를 달리하는 <존 오브 인터레스트>에서 유달리 꽃의 존재가 부각되는데, 감독은 만개한 꽃의 봉오리를 익스트림 클로즈업으로 제시하기도 한다. 태초부터 이미지와 소리를 바탕으로 발전된 영화의 특성 안에서 관객들 역시 루돌프 가족들처럼 시체가 타들어가는 냄새를 맡을 수 없다. 마치 꽃내음으로 뒤덮어 진실을 가린 것처럼 말이다. ‘냄새’는 눈으로는 재현할 수 없는 감각의 영역인데, 전출되었던 루돌프가 다시 아우슈비츠로 복귀를 명받고 어둠 속에서 무언가를 존재를 인식한 뒤에 구토하는 장면은 그래서 인상적이다. 기다란 복도 끝에 내려앉은 어둠을 물끄러미 응시하던 루돌프는 다시 계단을 내려가지만, 이상한 냄새를 맡은 듯 구역질을 하고는 속에 있던 것들을 게워낸다.

루돌프의 구토 장면 이후에 등장한 다음 장면은 매끄럽게 이어지지 않는다. 갑작스럽게 현재의 시점이 삽입되고, 사람들은 청소용품을 들고 어떠한 공간으로 진입한다. 구토라는 행위 뒤에 청소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배치되면서 마치 그들이 루돌프가 게워낸 무언가를 치우는 것처럼 보인다. 아우슈비츠 수용소를 보존한 박물관을 청소하는 이들을 통해 루돌프가 머물던 시간 안에서 보여주지 않았던 벽에 그을린 자국과 유대인 포로들이 남긴 소지품 등의 흔적을 보여준다. 그러고서 카메라는 다시 루돌프가 있던 그 계단 앞으로 되돌아온다. 벽 너머의 불편한 진실은 루돌프의 육체를 통과해 구토라는 이물질로 형상화되지만, 그는 그 복도의 어둠 속에 존재하는 그것을 영원히 인식하지 못할 테다. 그것은 <존 오브 인터레스트>가 진정으로 말하고 싶은 또 다른 이름의 공포임에 틀림없다.
글·이하늘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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