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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우성의 시네마 크리티크] 보는 것의 무력감과 매혹 <미래의 범죄들>
[정우성의 시네마 크리티크] 보는 것의 무력감과 매혹 <미래의 범죄들>
  • 정우성(영화평론가)
  • 승인 2024.10.15 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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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아이의 시신을 해부하는 일종의 행위 예술을 하기 전, 그것을 행하는 예술가 중 하나인 카프리스(레아 세두)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모두 해부를 보고 싶어 합니다. 신체는 텅 비어있고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죠. 신체의 공허함을 확인하고 의미로 채워 넣기를 원하죠. 해부는 스스로를 보는 것입니다. (중략) 브레켄이 우리의 시체입니다.” <미래의 범죄들>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이자 클라이막스에 해당하는 이 장면에서 의미심장하게 등장하는 대사들은 곧 영화의 핵심 의도를 직접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예컨대 플라스틱을 먹고 소화할 수 있는 진화된 인간이자 아들이며 창작물인 브레켄에게 자기 욕망을 투여하던 랭(스콧 스피드먼)이 해부된 아들의 신체 내부에서 인간 진화의 증거나 ‘내면의 아름다움’이 아닌 인간 내면의, 자신의 공허함만을 확인하는 것처럼 말이다.

자기지시적인 이러한 공허함은 <미래의 범죄들>을 바라보는 관객에게도 적용된다. “우리 모두는 해부를 보고 싶어 한다”라는 카프리스의 단언처럼, 관객은 영화 중반부터 예고 된 어린아이의 시신을 해부하는 쇼를 기대하고 기다린다. 살해당한 아이의 시신을 해부하는 것을 볼거리로 만드는 비윤리적 행위를 기대하게 하는 것은 볼 수 없는 것, 보면 안 되는 것을 허구라는 면죄부 안에서 안전하게 보고자 하는 뒤틀린 욕망이기도 하면서, 이야기의 논리로 제시된 클라이막스를 예측하는 관객으로서 기대할 수밖에 없는 구조 안에 놓여 있는 피할 수 없는 욕망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안전한 울타리 안에서, <미래의 범죄들>를 보며 우리 관객이 마주하게 되는 것은 무엇일까?

 

출처: 네이버 영화
출처: 네이버 영화

우리가 보는 것

먼저 <미래의 범죄들> 속 고통을 못 느끼거나 새로운 장기를 생성하는 가속 진화 신드롬을 겪는 인간들이 등장하는 먼 미래의 디스토피아적 세계에서, 새로운 장기를 제거하는 수술을 볼거리로 향유하는 인간들의 모습은 데이빗 크로넨버그의 전작인 <비디오드롬>(1983)과 비슷한 문제의식을 지적하고 있다. 미디어를 통해 선정적이고 폭력적인 이미지에 둔감해지는 것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또한 플라스틱을 먹는 진화 된 인간들의 단체가 등장하여 정부와 갈등을 빚는 구성은 환경 파괴를 둘러싼 정치적 관계를 비유적으로 드러내는 것 같다. 그리고 행위 예술, 개념 예술을 하는 예술가가 등장하고 이를 메타적으로 바라본다는 점에서 예술에 관한 예술이기도 하다.

하지만 <비디오드롬>이 선정적이고 폭력적인 미디어의 영향력을 우려하는 영화라고 한다면 그러한 메시지를 지닌 <비디오드롬> 자체가 매우 선정적이고 폭력적인 영화라는 자기모순을 지니고 있음을 생각해야 한다. <미래의 범죄들> 또한 같은 모순으로 우리를 유혹하며 숨기지 않고 폭력적이고 비윤리적인 행위를 전시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환경을 둘러싼 정치적인 알레고리 또한 마찬가지이다. 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환경 파괴를 우려하는 것도, 환경 단체의 목적을 위해 수단을 가리지 않는 태도를 비판하는 것도 아니며 이것이 미래의 범죄가 될 수 있음을 경고하는 것 역시 아니다. 인간을 둘러싼 이러한 정치적인 문제들은 겉모습만 바뀌어 나타나는 현재의 범죄, 더 나아가 과거에도 있던 과거의 범죄일 뿐이다. 결국 우리 관객이 볼 수 있는 것은 브레켄을 해부했을 때 랭이 보았던 것처럼 잡히지 않고 미끄러지는 의미화의 실패, 공허함 그리고 그 사이로 비치는 나의 모습이다.

 

출처: 네이버 영화
출처: 네이버 영화

내가 나를 보는 이러한 자기지시적 행위는 크로넨버그의 영화에서 늘 반복되어 온 장치이다. 조금 거칠게 과장하면, 그의 영화 속 핵심 구도가 바로 그것이다. <스캐너스>(1980)의 케머런과 데럴, <비디오드롬>의 맥스와 오블리비언, <데드 링거>(1988)의 쌍둥이, <폭력의 역사>(2005)의 톰과 조이처럼 말이다. 크로넨버그가 만든 짧은 단편인 <데이빗 크로넨버그의 죽음>(2021)은 그 길이만큼 이러한 문제의식을 함축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영화에서 크로넨버그는 직접 배우로 등장하여 죽은 자기 모습을 본다. 그리고 마치 <오데트>(1955)의 엔딩처럼 시신과 얼굴을 맞댄다. 대신 <오데트>처럼 부활한 시신과의 신체적 접촉이 아닌 죽음으로 남아 있는 시신과의 접촉이다. 여기서 관객은 크로넨버그가 아내의 사별한 경험을 투영한 것이라 읽을 수도 있고, 죽음을 바라보는 실존적 문제를 볼 수도 있으며, 과거가 되어 사라진 것을 기록한 이미지를 바라보는 관객과 영화의 관계를 읽어낼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가 직관적으로 느낄 수 있는 것은 공허함, 무력감, 슬픔 그리고 차가우면서도 따뜻한 시신과의 접촉에서 오는 모순적 감각 그리고 내가 나를 본다는 자기지시적 행위의 기묘함뿐이다.

클라이막스의 쇼와는 다른 행위 예술이 등장하는 천 개의 귀 장면을 보면 그러한 생각은 더욱 명확해진다. 눈과 입을 실로 꿰매고 온몸에 귀를 붙이고 춤을 추는 퍼포먼스를 하는 예술가가 있다. 그것을 바라보는 카프리스와 또 다른 관객은 귀가 별로라고 말하며 두 개의 귀 외에 다른 장식들은 기능을 하지 않는다고 비판한다. 실제로 예술가의 ‘보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듣는 것에 집중하라’는 메시지와 달리 우리가 집중하게 되는 것은 천 개의 귀의 모습과 춤의 몸짓이 주는 기묘한 시각적 감각이다. 개념 예술에 관한 비평 같이 느껴지는 이 장면의 다른 핵심은 보는 것이 아니라 듣는 것에 집중하라고 말하며 결국 보는 것에 집중하게 만드는 자기 모순적 구도이다.

 

출처: 네이버 영화
출처: 네이버 영화

보는 것의 무력감과 매혹

여러 개의 귀를 보임으로써 듣는 것을 강조하려던 예술가처럼 <미래의 범죄들>의 인물들은 보여 주려고 보려고 애쓴다. 플라스틱을 먹고 소화할 수 있는 인간들이 모인 단체를 이끄는 랭은 스스로 새로운 인간의 존재를 증명할 수 있음에도 아들의 시신을, 쇼를 통해 보여 주려고 한다. 쇼를 보러온 관객들도 보고 있음에도 반지처럼 생긴 카메라를 통해 기록해서 보려고 한다. 영화 속에서 강조되는 ‘내면의 아름다움’ 또한 마음과 같이 보이지 않는 무언가를 보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신체 내부에 존재하는 내장의 아름다움을 내면의 아름다움이라 해석한다. 그러나 귀를 보여 줌으로써 듣는 것을 강조하려던 행위가 우스꽝스러운 것처럼 <미래의 범죄들>에서 또한 보려고 할수록 볼 수 없다. 그들이 보게 되는 것은 외면 안에 있던 다른 외면의 아름다움일 뿐이고, 인류의 미래를 보는 것이 아닌 인간의 미래이자 나의 미래인 죽음을 보는 것이다.

그렇다면 보는 것을 부정하느냐? 그렇지 않다. 크로넨버그는 어쨌거나 보여 준다. 보려고 하면 할수록 볼 수 없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만큼, 인간의 내장, 아이의 살해, 죽은 아이를 해부하는 비윤리적 쇼를 시각화한다. 보는 것의 무력감을 드러내는 것만큼 보는 것의 매혹을 숨기지 않는다. 사울(비고 모텐슨)이 잔혹하고 선정적인 쇼의 피사체이면서 평소에 검은 옷으로 몸을 가린 수도사의 모습인 것처럼 말이다. 즉 모순적인 구도로 세계와 그것을 비추는 예술의 양가성을 가감 없이 드러낸다. 영화의 엔딩은 그것의 가장 명징한 예시이다.

<미래의 범죄>들의 마지막,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사울이 잠에 든 상태로 고통에 찬 신음을 내자 카프리스가 그를 깨운다. 사울이 꿈을 통해 고통을 느꼈고 거기서 체험한 육체적 고통이 어땠는지 묻는 카프리스의 질문에 사울은 자신이 꿈의 일부분이 되어가고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것을 증명하려는 듯 플라스틱 바를 먹기로 한다. 브레켄과 랭의 꿈을 꾸었기에 자신이 꿈의 일부분이 되었다면 그들처럼 플라스틱 바를 먹을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카프리스는 증명을 위한 가장 확실한 방법인 시각적인 기록을 위해 카메라로 그 행위를 촬영한다.

마침내 사울이 플라스틱 바를 먹자, 이전의 불편한 식사와 다른 묘한 평온함의 순간이 찾아온다. 카프리스의 카메라는 그 평온의 순간을 담기 위해 천천히 사울의 얼굴로 다가간다. 그는 마치 칼 드레이어의 잔 다르크와 같은 기이한 표정을 짓는다. 미래를 안다면 미래가 아닌 현재에 속하기에 환희에 찬 미소인지, 고통의 눈물인지 모를 그의 얼굴을 비추는 영상은 꿈과 현실, 죽음과 구원, 고통과 쾌락 사이 어딘가에서 중단된다. 그렇게 중단됨으로써 미래의 이미지, 모순적이고 양면적인 세계의 어느 한쪽도 아닌, 공허하면서 충만하기도 한 잠재성을 지닌 이미지의 기괴한 아름다움을 비추며 끝이 난다. 결국 영화가, 카메라가 보여 주는 이미지란 바로 그것임을 증명하면서 말이다.

 

 

글·정우성
2021년 영평상 신인평론상을 받았다. 현재 예술강사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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