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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재의 시네마 크리티크] 직시하려는 노력 〈마이 보이〉
[이현재의 시네마 크리티크] 직시하려는 노력 〈마이 보이〉
  • 이현재(영화평론가)
  • 승인 2024.12.27 15: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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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 보이〉 포스터
〈마이 보이〉 포스터 (출처: 네이버영화)

영화는 멀리서 서서히 클로즈업되는 한 여인(이태란)의 모습으로 시작한다. 통곡을 억누르고 눈물만 흘리는 여인의 사연이 무엇인지 알기도 전에 영화는 여인만을 비춘 채, 신경을 긁는 이상한 소음이 긴 시간을 함께한다. 그리고 다음 쇼트에서 관객은 소음의 발음지가 여인의 아들로 추측되는 한 소년(이석철)의 머리를 깎는 ‘바리깡’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이 소년 또한 무언가 사연을 담고 있는 듯하지만, 영화는 오프닝 시퀀스가 끝날 때까지 내적인 알맹이를 관객에게 보여주지 않고 그저 소년의 물상에만 집중한다. 관객은 오프닝 시퀀스가 끝나서야 이 두 모자의 사연에 여인이 낳은 또 하나의 아들 ‘이천’(조왕별)이 깊이 관여되어있음을 깨닫는다.

전규환의 <마이보이>는 다분히 시네필리의 자세와 외향을 지향하는 듯한 오프닝으로 시작한다. 실제로 영화는 러닝타임 내내 ‘유령과의 조우’를 교차편집으로 그리며 <애니멀 타운>, <댄스 타운>, <무게>등의 작품에서부터 쭉 이어지고 있는 전규환의 인장을 확실하게 찍고 있다. 또한 <마이 보이>는 메트로놈을 틀어 놓은 듯이 단단한 장르적 편집을 고스란히 따르지만, 정작 서사적 내용과 플롯은 장르적 관습과 그 궤를 반대하며, 날카롭게 대치한다. 그러나 이 영화는 마지막 클라이맥스를 찍는 결말에서 이제껏 관객이 봐온 모든 것을 배반한다. 지금까지 물상만을 집중해서 보여주던 ‘이천’이 갑자기 감정적인 과잉으로 관객을 압도하는 것이다.

더구나 영화는 차곡차곡 쌓아놓은 감정을 정리하기 위해 이 시퀀스를 넣은 것도 아니다. 오히려 영화는 그 감정의 과잉을 관객한테 던져놓은 체, 엔딩크레딧을 올려버린다. 관객은 오피닝 시퀀스에서 봐왔던 시네필리와는 너무도 다른, 하지만 압도적인 엔딩에 당황할 수밖에 없다. 오프닝과 엔딩의 거리가 너무도 멀리 때문이고, 그 사이를 매우고 있는 것 또한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 빈 간격에 관객은 질문을 강요받는다. 왜 전규환은 이런 판이한 엔딩으로 관객을 당황하게 하는 것일까?

전규환은 감독을 시작한 <타운 3부작>부터 리얼리즘의 미학을 추구해왔다. <모차르트 타운>의 주요한 물상을 이루는 주인공 오성태와 주유랑의 캐스팅은 단순히 장르적인 캐스팅을 피하기 위함이라기보다, 감독이 직접 밝혔듯이 “진짜 사람들의 모습에 다가가기 위한” 하나의 수단이었으며, <무게>에서 관객을 당혹스럽게 만들었지만, 끝내 아름다웠던 노골적인 판타지시퀀스 역시 감정적인 리얼리즘을 전달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이처럼 전규환은 우리 주변에 있는 흔한 사물들의 모습에 관심을 가지고, 그것을 어떻게 새롭게 이야기할 것인가에 관심이 있는 작가이다.

이렇듯 전규환의 리얼리즘은 장르적인 관습을 분해하여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고 싶은 감독의 욕망과 충돌하며, 관객에게 새로운 감각과 주변의 사물에 대한 통찰을 요구하는 중요한 에센스이다. 즉, 그에게 중요한 것은 우리가 흔히 볼 수 있지만, 관심이 부족해서 혹은 자세히 보지 않아서 제대로 보지 못한 것들을 드러내는 작업이라 할 수 있다. 이는 전규환에게 영화적인 미학들은 우리 주변의 모습을 꾸밈없이 직시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이자 방법론이다. <마이보이>가 조왕별의 죽음과 직면한 가족과 주변인들의 모습을 그리면서 그 감정을 정리하지 않은 채 갑작스런 과잉으로 관객을 당황하게 하는 것도 이러한 전규환의 자세에서 비롯된 듯하다.

<마이보이>는 유천의 죽음을 받아들여야만 하는 가족의 슬픔을 그리고 있다. 다만, 전규환답게 기존의 가족영화가 가진 서사를 거부하고, 가족의 소통을 철저히 차단하고 갈등을 뻔한 극 중 장치로 해결하려 들지 않으며, 유천이 죽어서도 그 감정을 정리하지 않는다. <마이보이>는 이런 가족의 모습을 그리기 위해서 지알로 필름이 자주 사용했던 ‘지연의 전략’을 사용한다. 영화는 ‘유천’(이석철)의 형 ‘이천’을 보내기 위해 치루는 의식을 거행하게 하면서도 ‘이천’을 휠체어를 끌고 여행을 떠나는 이로 그린다든지, 이천과 유천이 함께했던 낚시를 연계하는 장소로 이동시킨다든지, ‘이천’이 길을 가면서 자전거를 타는 사람들을 마주하게 함으로써 다리를 쓰지 못하던 ‘유천’을 떠올리게 하는 방식으로 이천과 유천을 영화 끝까지 떨어뜨려 놓지 않는다.

이러한 지연의 전략은 ‘이천’의 어머니와 사고로 죽은 아버지의 지인인 도공(陶工)에게도 고스란히 적용된다. 영화가 끝날 때까지 어머니는 소리없는 눈물을 멈추지 않고, 도공은 아내의 눈총과 질투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우는 어머니를 외면하지 않는다. 이러한 전략의 사용은 유천이 죽을 때까지 지속된다. 즉, 관객은 유천이 식물인간으로 누워있는 시간부터 죽는 순간까지, ‘유천’이 관련된 사람들의 시간을 함께하는 것이다. 그리고 영화는 이러한 ‘유천’이 관련된 사람들이 겪는 모습을 물상에 집중한 이미지, 유령과 아직 남은 사람을 대조하는 교차편집 등의 영화적 표현으로서 예술적인 성취를 하는 것처럼, 그렇게 ‘유천’이 관련된 사람들이 겪는 고통과 슬픔을 클라이맥스까지 지연시킨다.

그리고 ‘유천’이 죽자 영화는 ‘이천’에게 더이상 영화적인 표현을 허용하지 않고, 감정을 폭발시킴으로써 그들이 겪었을 고통과 슬픔을 고스란히 전시한다. 이 장면은 어찌 보면 <레 미제라블>에서 ‘I Dreamed a Dream’을 부르던 앤 해서웨이의 가난의 스펙터클이 보여준 다분히 포르노그래피적인 외설을 떠오르게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장면이 포르노그래피로 소비되지 않을 수 있는 까닭은 전규환이 앞에서 보여준 시네필리에 대한 단호한 거부이기 때문이다. 그동안 쌓아왔던 상징과 기호들의 표현을 거부하고 그들이 느끼는 슬픔과 고통을 직시할 것을 강요하는 이 장면은 돌출적이지만, 역으로 전규환의 씨네필리가 리얼리즘에게 '시혜의 의지'를 드러낸 장면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렇기에 이 마지막 장면은 다분히 문제적으로 보인다.

나는 이 마지막 장면에서 당황했었다. 러닝타임 내내 감정적 과잉이 충만할 수 있는 이미지를 형성하는 차인표, 이태란과 이석철을 충돌시키고, 노련하게 ‘유천’과 관련된 사람들이 겪는 고통을 지연시키며, 끝내 자신의 인장을 확고히 찍는 장면들을 일시에 무너뜨리는 장면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이러한 전규환의 선택을 지지하는 바이다. 비록 자신의 미학을 통째로 무너뜨린 선택이지만, 그가 진정으로 하고 싶었던 사람들에 대한 꾸밈없는 직시가 이 장면에 있다고 인정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글‧이현재
경희대학교 K컬쳐・스토리콘텐츠연구소 연구원. △동아일보 신춘문예 영화평론부문 △한국만화영상진흥원 신인평론상 △게임제네레이션 비평상에 당선되어 다양한 분야에서 평론 활동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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