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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경의 시네마 크리티크]관찰자의 불완전한 시선과 자기 확신-<메이 디셈버>
[김희경의 시네마 크리티크]관찰자의 불완전한 시선과 자기 확신-<메이 디셈버>
  • 김희경(영화평론가)
  • 승인 2024.12.30 10:0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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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끊임없이 타인을 바라본다. ‘관찰’이라는 합리적이고 그럴싸한 명분 아래. 그래서 우리는 관찰자인 동시에 관찰의 대상이 되는 숙명을 안고 살아간다.

관찰자의 시선은 때로 위험하다. 호기심을 넘어 관음증적 시선으로 변질되기 쉽다. 또한 관찰이 끝나면 자체적으로 결론을 내리고, 그 결론에 대해 지나친 자기 확신을 갖게 되기도 한다. 진실 여부와 상관없이.

 

서로가 서로의 관찰자, 그리고 관찰 대상

토드 헤인즈 감독의 <메이 디셈버>(2024)는 관찰자, 그리고 관찰의 대상이 된 두 여성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영화 속 캐릭터는 지극히 영화적이다. 이야기는 떠들썩한 스캔들로 오랜 시간 사람들의 입방아에 올랐던 중년의 여성 그레이시(줄리안 무어), 그레이시 이야기를 소재로 한 영화에 출연하게 된 유명 여배우 엘리자베스(나탈리 포트만)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엘리자베스는 영화에서 그레이식 역을 소화하기 위해 사전 조사 차 그레이시 집에 찾아온다. 그리고 장기간 머물며 그의 가족들과 함께 지낸다. 이를 통해 엘리자베스는 관찰자, 그레이시는 관찰 대상 자리에 서게 된다.

그레이시가 스캔들의 주인공이 된 이유 역시 매우 영화적이다. 그레이시는 36살이었던 시절 13세의 소년 조(찰스 멜턴)와 성관계를 맺고 체포됐었다. 감옥에서 수감 생활을 하던 중, 그곳에서 소년의 아이를 낳기도 했다. 그레이시와 조의 이야기는 신문, 방송 등에서 연일 보도됐다. 그 과정에서 이들은 불특정 다수의 관찰 대상이자 관음증적 시선의 먹잇감이 됐다. 그럼에도 두 사람은 헤어지지 않고, 20여 년이 흘러서도 부부로 살아가고 있다.

 

아이들과 함께 하나의 가족을 이루고 평범한 삶을 살아가는 그레이시와 조. 그렇게 세상으로부터 조금씩 잊힐 때쯤 새로운 관찰자 엘리자베스가 이들을 찾아온다. 그런데 갑자기 찾아온 낯선 관찰자에 대해 이들은 경계하거나 저항하지 않는다. 영화는 이 관찰자를 유명 여배우로 설정해 마음의 문턱을 쉽게 낮춘다. 그레이시 부부에게 엘리자베스는 자신들을 이전과 다른 새로운 스토리로 편입시켜 줄 안내자처럼 여겨진다. 덕분에 엘리자베스는 어딜 가든 관찰자의 역할을 쉽게 수행한다. 자녀들, 마을 사람들을 차례로 만나며 부부에 대한 질문을 던지며 관련 조사도 한다. 이들 역시 쉽고 친절하게 부부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그렇게 그레이시 부부는 낯선 관찰자에게 너무나 쉽게 시선을 허용하게 된다.

엘리자베스는 그레이시에 대한 적극적 관찰, 나아가 감정의 동일화를 시도한다. 그레이시와 조가 관계를 맺은 장소에 가서 혼자 그 감정에 도취하기도 하고, 조를 하나의 도구로 삼아 그레이시의 감정과 경험을 고스란히 자신의 것을 만들려 한다. 하지만 이 또한 한계에 부딪힌다. 그레이시는 종종 히스테리를 부리거나 울음을 터뜨리는 등 정신적인 취약함을 드러내곤 한다. 엘리자베스는 그런 그레이시를 완벽하게 이해하지 못하고, 13세 소년과 관계를 맺은 과거의 마음도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러다 엘리자베스는 그레이시의 아들을 통해 그녀가 어린 시절 겪은 과거의 사건들을 알게 된다. 그리고 그 트라우마를 바탕으로 마침내 관찰의 마지막 조각을 완성한다. 엘리자베스는 그 조각을 완성한 후, 혼자 연기를 펼친다. 과거 그레이시가 조에게 쓴 편지 내용을 카메라를 응시하며 읊는 장면으로, 엘리자베스는 정말 그레이시가 된 듯 뛰어난 연기력을 선보인다. 하지만 그것으로 정말 관찰은 완성된 것일까.

관찰자는 또 누군가에겐 관찰의 대상이 되는 법이다. 엘리자베스가 오롯이 관찰자로서의 위치에 도취하여 있을 때, 반대로 그레이시는 엘리자베스를 관찰하고 있다. 이는 거울 숏에서 잘 드러난다. 엘리자베스가 그레이시의 화장법을 배우며, 두 사람은 함께 거울 앞에 선다. 이때 엘리자베스는 그레이시의 거울 속 얼굴을 빤히 바라보고, 이와 동시에 그레이시 역시 자신을 흉내 내려는 엘리자베스를 응시하고 있다. 그렇게 일상에 점점 더 깊숙이 침투하는 낯선 관찰자에 대해 그레이시는 호의를 베푸는 듯하면서도 민감하게 그녀의 행동을 주시한다. 이 과정에서 그레이시는 낯선 관찰자가 자신을 완벽하게 이해하진 못했다고 확신하게 된다.

 

서툰 시선과 확신 끝엔 필연적 실패가

서로가 관찰자이자 동시에 관찰 대상이 된 엘리자베스와 그레이시. 그 승자는 엘리자베스가 될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영화는 그레이시의 말 한마디로 모든 것을 반전시킨다. 그레이시는 자신을 다 알게 된 것처럼 생각하는 엘리자베스에게 아들이 그녀에게 말한 자신의 과거 트라우마는 거짓이라 한다. 과연 아들의 말이 거짓일까, 그레이시의 말이 거짓일까. 그 혼돈이 찾아온 순간, 엘리자베스는 무너지기 시작한다.

클로징에서 엘리자베스는 영화 촬영 현장에서 그레이시를 완벽하게 연기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영화 밖 관객은 금세 깨닫게 된다. 엘리자베스가 연기하는 그레이시는 우리가 목격한 그레이시가 아니라는 사실을. 결국 관찰자 엘리자베스의 어긋난 시선을 관찰 대상이자 또 다른 관찰자 그레이시가 방어한 셈이다. 그리고 관객 역시 예상을 뒤엎는 결말을 보며 깨닫게 된다. 영화 밖에서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던 관객의 관찰자로서의 시선 또한 얼마나 불완전한 것이었는지. 영화는 그렇게 관찰자의 시선과 자기 확신, 그에 따른 필연적 실패에 대해 날카로운 질문을 던진다.

 

*사진출처: 네이버영화

 

글·김희경
인제대학교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과 교수. 영상물등급위원회 자체등급분류 사후관리위원, 국제영화비평가연맹 한국본부 사무총장, 한국영화학회 대외협력이사, 은평문화재단 이사, 영화평론가, 만화평론가로 활동. 前 한국경제신문 기자, 前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예술경영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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