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06월호 구매하기
모든 인간 안에는 놀이를 갈망하는 ‘아이’가 있다
모든 인간 안에는 놀이를 갈망하는 ‘아이’가 있다
  • 성일권 |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한국어판 발행인
  • 승인 2024.12.30 16:1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오징어 게임2>를 보며 니체를 사유한다
오징어 게임2 포스터. 사진=넷플릭스

생존 게임을 통해 승자독식의 신자유주의 냉혹함을 잔혹하게 보여준 넷플릭스 <오징어 게임>이 3년 4개월 만에 시즌 2로 다시 찾아와 전 세계 시청자들의 극찬과 비판을 동시에 받고 있다. 시즌 2에서도 시즌 1에서처럼 무한경쟁 사회를 비판하는 주제 의식이 뚜렷하지만, 극의 속도감과 긴장감은 시즌1에 비해 아쉬운 측면이 적지 않다. 프런트맨(이병헌)과 딱지맨(공유) 등의 숨겨진 사연, 게임장을 찾아내려는 황준호(위하준) 일행의 추적 등으로 세계관이 확장되면서 배경 설명이 길어진 데다 O·X 투표가 반복돼 긴장감이 떨어진 탓이다. 휴일 밤에 총 7시간 7분에 걸친 분량을 논스톱으로 모두 봤지만, 왠지 전개가 느리다는 느낌이 들었다.

시즌 1에서 드러난 여성 혐오적 요소, 이주노동자 등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전형적인 묘사 등을 둘러싼 비판을 의식한 탓인지 시즌 2에서는 트랜스젠더, 가상화폐 피해자, 미혼모 등 다양한 인물들의 내면적 갈등을 고루 다룬 탓으로 이해된다. 하지만 게임 구성은 조금 더 다양해졌고, 대부분은 내 연배의 사람들이 어린 시절에 즐겨 했던 놀이여서 추억어린 호기심을 자극했다.

 

오징어 게임2 스틸컷. 사진=넷플릭스

이번 작품에서도 제작진의 ‘잔혹하지만 영리한 연출력’이 돋보인다. 자칫 죽을 수도 있는데, 목숨을 앗아갈 무모한 게임이 하필 어린 시절의 ‘아름다운 기억’이 깃든 게임이라니…. 도박, 은행 대출, 사채 빚에 시달리는 456명의 참가자들에게 이 게임은 마지막 희망이자 출구이겠지만, 십중팔구 죽음으로 내몬다. 코흘리개 꼬마가 수백억원대의 건물 주로 행세하는 마당에 고작(?) 456억원을 쟁취하기 위해 하나밖에 없는 목숨을 내걸게 하는 제작진의 의도는 무엇일까?

니체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게임을 삶의 충만한 표현으로 보았다. “진정한 인간은 위험과 놀이를 원하며, 모든 인간 안에는 놀이를 갈망하는 ‘아이’가 있다”는 것이다. 참가자들이 게임이 진행될 때마다 거의 절반씩 살육당하는 잔혹함을 보고도, 또 게임에 나서는 이유는 위험할수록 흥미를 갖는 유아적 욕망이 꿈틀거리는 탓이다(아마도 제작진의 계산된 의도일 것이다). 영화 속 인물들이 목전의 죽음 앞에서도 고난도 게임을 해결할 때마다 환호성을 지르는 장면은 이런 맥락에서 의미심장하다.

봉준호의 <설국열차>가 세계 자본주의의 보편적 디스토피아를 담아냈다면, 황동혁의 <오징어 게임> 시리즈는 ‘머니게임’으로 점철된 한국 자본주의의 민낯을 좀 더 드러낸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게임의 기획자와 게이머들은 재미를 배가하기 위해 사람의 목숨을 언제든지 없앨 수 있는 한낱 장기판의 졸(卒)로 삼고, 참가자들은 졸이 되지 않기 위해 생존게임을 벌여야 한다.

돈이 자본가와 빈곤층이 모두를 어떻게 파괴하는지 보여주는 것이다. 슬래셔(slasher) 장르의 특징을 보여주는 이 폭력적인 시리즈는 세련된 연출로 주목받는다. <배틀 로얄>, <헝거게임> 등 살인 게임 작품을 연상시키는데, 특히 시리즈1은 일본 영화 <신이 말하는 대로>와 비슷해 표절 논란까지 일었다. 하지만 <오징어 게임> 시리즈를 깊이 들여다보면 자못 철학적이다.

 

오징어 게임2 스틸컷. 사진=넷플릭스

자본주의 비판을 담은 디스토피아

<오징어 게임>에는 사드 후작의 잔혹성, 알록달록한 장난감 가게의 화려함, 나치 수용소의 비인간성이 뒤섞여 있으며, 그 속의 메시지는 우리 현실과 맞닿아 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이 어떻게 인간의 영혼을 갉아먹고 결국 인간을 노예로 만드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빨간 작업복 차림의 무장한 감시자들이 통제하는 공간에서 참가자들은 어린이 게임을 하며 목숨을 건다. <종이의 집>을 떠올리게 하는 이 설정에서 패자는 가차 없이 총에 맞아 죽는다.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4인 1조로 다리를 묶어 달리며 진행하는 ‘딱지치기’, ‘제기차기’, ‘비석치기’, ‘달고나’ 그리고 마지막 ‘오징어 게임’까지, 운동회 때에 즐기던 순수한 어린이 놀이는 죽음의 게임으로 변질된다.

이 같은 구성은 두 가지 관점에서 해석할 수 있다. 하나는 우리가 미처 보지 못하는 현실의 잔혹성을 과장되게 드러낸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이대로 가면 마주하게 될 암울한 미래를 경고하는 것이다. 참가자들의 현실적인 부채, ‘번호’와 ‘관리자’라는 호칭, 로또 복권을 연상시키는 게임의 구조가 그것이다. 참가자들이 마구 죽어가는데도 게임을 계속하려는 생존자들의 “나가서 불행하게 사느니, 희망을 꿈꾸는 여기가 더 낫다”는 말은 의미심장하다.

결국 이 작품이 경고하는 것은 신자유주의와 금융 자본주의가 지배하는 세상이다. 바바라 슈티글러가 지적했듯, 이는 “부적응자를 도태시키고 끊임없는 변화에 적응할 수 있는 유연한 인간만을 남기려는” 경제적 다윈주의의 세계다. 육체적 강인함, 영리함, 용기를 모두 갖춘 자만이 살아남을 수 있는 이 게임은, 결국 우리 사회에서 실패자에게 죽음과도 같은 나락으로 밀쳐내는 현실을 상징하고 있다.

 

게임의 두 얼굴, 놀이와 생존 사이

<오징어 게임>이 특히 주목받는 이유는 자본주의 비판과 게임의 본질에 대한 성찰을 교묘하게 결합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현대 사회에서 이 둘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금융가들은 위험을 걸고 베팅하며, 기업가들은 경쟁자를 제압하려 한다. 세계 경제라는 거대한 게임장에서 모두는 정해진 규칙을 따라야 하지만, 그 규칙 자체가 이미 왜곡되어 있다.

니체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게임을 삶의 충만한 표현으로 보았지만, <오징어 게임>에서는 어린 시절의 놀이처럼, 늘 현실 속의 즐거운 게임을 갈망했으나 항상 탈락하기만 했던 참가자들의 어두운 승리 탐욕을 부각시켰다. 당장에 총 맞아 죽더라도 죽음을 불사하는 것은 모든 참가자에게 공정한 ‘게임의 룰’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인간의 놀이 본능은 나이가 들어도 사라지지 않는다. 포켓몬을 하는 아이에서 테이블 축구를 즐기는 회사원, 주식 투자를 하는 투자자까지, 놀이의 형태만 바뀔 뿐 그 본질은 이어진다. 하지만 돈이 개입하면서 게임의 순수성은 훼손된다. 니체가 강조했듯, 게임은 본래 노동으로부터의 해방을 위한 것이었다. “지루함을 피하기 위해 발명된 것이지, 다른 어떤 필요도 충족시키지 않는 순수한 활동”이었던 것이다.

<오징어 게임>이 보여주는 가장 큰 비극은 생존 자체가 게임이 되어버린 현실이다. 승자에게는 견딜 수 없는 죄책감을, 패자에게는 감당할 수 없는 고통을 안기는 이 게임에서, 모두가 자발적 참가자가 되어버렸다. 니체가 『도덕의 계보학』에서 지적했듯, 이는 “고통을 주고받는 잔인한 축제”가 되어버렸다. 결국 빚이라는 이름으로 정당화된 이 게임에서, 모든 참가자는 어떤 식으로든 대가를 치르게 된다. 니체의 말대로, 모든 인간 안에는 놀이를 갈망하는 ‘아이’가 있지만, 현실 속에서 당신이 오징어 신세가 되지 않으려면 ‘빚’지는 인생을 청산해야 한다. 최고 권력자의 ‘철’ 없는 비상계엄령 발동으로 국가 신용도가 떨어지고, 환율이 급등하고, 경제가 얼어붙고, 일자리가 줄어드는 마당에 등장한 <오징어 게임 2>는 씁쓸한 현실을 되씹게 한다.

 

글‧성일권

  • 정기구독을 하시면, 유료 독자님에게만 서비스되는 월간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한국어판 잡지를 받아보실 수 있고, 모든 온라인 기사들을 보실 수 있습니다. 온라인 전용 유료독자님에게는 <르몽드 디플로마티크>의 모든 온라인 기사들이 제공됩니다.
이 기사를 후원 합니다.
※ 후원 전 필독사항

비공개기사에 대해 후원(결제)하시더라도 기사 전체를 읽으실 수 없다는 점 양해 바랍니다.
구독 신청을 하시면 기사를 열람하실 수 있습니다.^^

* 5000원 이상 기사 후원 후 1:1 문의하기를 작성해주시면 1회에 한해 과월호를 발송해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