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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주의 문화톡톡] 선악과, 다시 논하다
[김창주의 문화톡톡] 선악과, 다시 논하다
  • 김창주(문화평론가)
  • 승인 2025.01.13 10:0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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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로몬은 다윗을 이어 왕위에 오른다. 아버지에서 아들로 계승되지만 그 성격은 판이하다. 다윗은 크고 작은 전쟁을 통해 확립한 군사적 왕권이고, 솔로몬은 지혜와 공정한 재판을 통한 문사적 왕권을 대표한다. 아버지가 뛰어난 군사력 위에 중앙집권적 행정, 안정적인 경제력 등 이스라엘의 하부구조를 탄탄히 세우자 아들은 겸손한 신앙심 위에 성전과 왕궁을 짓고 지혜를 표방하여 내실을 다졌다. 둘은 이스라엘의 황금시대를 상징한다. 일부 독자에게 낯설겠지만, 창세기 서두의 선악과 논의는 솔로몬 시대의 인문학적 성찰과 본원적 사유를 반영한다.

솔로몬은 ‘잠언 삼천 가지, 노래 천다섯 편’을 지었고 구약성서 <잠언>. <전도서>, <아가>, 외경 <지혜서> 등의 저자로 알려졌다. 그의 지혜는 아라비아나 이집트 현자들보다 뛰어난 명성을 얻었다(열왕기상 4:30-32). 코란에 따르면 ‘짐승과 새와 기어 다니는 것과 물고기’와 대화할 수 있었고<Quran 27:18> 각종 식물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었다. 문자대로 믿기는 어렵지만 후궁 칠백과 첩 삼백 명은 그의 뛰어난 지혜와 명성에 기인한 측면이 있다. 솔로몬의 지혜에 관한 과장된 수사에 가려 당시 이스라엘의 문화적 성숙과 인문학 역량을 간과하기 쉽다. 고대 사회에서 최우선 과제는 안전과 생존이다. 군사, 경제, 정치 등으로 안정적인 삶을 누리게 되면서 솔로몬의 등극으로 인해 인문학적 소양이 급격히 성장한 것이다. 수많은 시인이 인생과 절대자를 노래하고, 지혜자들이 삶의 본질을 논의할 수 있었다. 

예컨대 이 땅은 언제 누가 만들었을까? 그렇다면 사람은 어디에서 왔으며 어디로 갈까? 사람은 왜 죽어야 하며 죽음 이후 어떻게 되는가? 유한한 인간이 영원히 사는 방법은 없을까? 선과 악은 어디에서 비롯되었고 그 경계를 어떻게 구별할 수 있을까? 왜 남자와 여자의 삶은 다른가? 왜 뱀은 발이 없이 배로 기어 다닐까? 이와 같은 질문들에 대한 응답이 창세기 서두에 집약되어 있다. 솔로몬 시대가 이룩한 문화적 성숙과 인문학적 사유는 이렇듯 ‘처음’ 또는 인생의 ‘원리’에 대한 질문과 토론, 그리고 성찰을 길러냈다. 

소위 ‘선악과’ 주제가 이 대목에 포함되어 있다. 앞서 다룬 바 있는 “엑시스 문디”의 다른 버전 또는 확장판에 해당한다. 하느님이 만든 에덴동산의 두 나무, 곧 ‘생명 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가 눈에 들어온다. 정확히 말하면 전자는 ‘생명’에, 후자의 초점은 ‘지식’(דַּעַת)에 있다. 길가메시 서사시에 영원한 생명을 주는 나무가 전해지나 선악과는 창세기 외에 찾기 어렵다. 과연 어떤 지식일까? 선은 무엇이며 악은 어디에서 비롯되었을까? 도덕적이며 인문학적 질문이 들어있다. 흔히 선악과를 두 가지 대극적인 개념의 이분법으로 한정하는 것은 성서에 대한 오해다. 선과 악 ‘사이’의 모든 지식을 일컫는 수사법이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유대교와 기독교가 창세기의 독특한 수사를 문자적으로 이해하고 수용한 측면도 있다. 다섯 살 어린이의 질문을 떠올려보라. 주변 사물에 대한 단순 호기심부터 인생과 우주에 관한 심오한 질문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질문이 쏟아진다. 이처럼 사람의 알고 싶은 욕망은 비단 선과 악의 문제에 한정되지 않는다. 솔로몬 시대 지식인 또는 신앙인들은 그 시원을 에덴동산에서 찾고자 하였다.

창세기가 오랫동안 우주의 기원을 알려주는 내용으로 읽히고 이해되어 온 측면이 있다. 교회가 우주 발생론의 수호자를 자처한 것은 좋은 예다. 그보다 삶의 기원과 세상의 원리를 탐구하고 있다고 봐야 한다. 창세기의 처음 낱말 ‘버레쉬트’(בְּרֵאשִׁית)가 라틴어 ‘인 프린키피오’(in principio)로 번역되는데 세상의 ‘처음’ 또는 세상의 ‘원칙’으로 옮길 수 있다. 다시 선악과로 돌아간다. 하느님은 에덴동산 가운데 생명 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두었다. 여자는 아직 창조되기 전이고 남자에게 말한 것인지 명확하지 없으나 나중에 선악과를 먹지 말라는 것과 먹으면 반드시 죽는다는 하느님의 경고가 뒤따른다(창세기 2:17). 에덴에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나무’로 대표되는 공간과 상징, ‘선악’으로 압축되는 내용과 지식을 암시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선악에 대한 호기심과 열망이 강할수록 반드시 죽을 것이라는 하느님의 경고를 어길 수 있다는 점이다.

솔로몬은 많은 백성을 재판할 수 있도록 ‘알아듣는 마음’(לֵב שֹׁמֵעַ)과 선악의 ‘식별력’(הָבִין)을 하느님께 요청한다(열왕기상 3:9). 솔로몬의 알아듣는 마음이 <개역한글>의 ‘지혜로운 마음’이나 <흠정역>의 ‘understanding heart,’ <굿뉴스바이블>의 ‘wisdom’ 정도로 알려지기도 했으나 최근 <새한글성경>은 히브리어의 의미를 잘 살렸다.(1) 지금은 한자 ‘들을 청’(聽)의 파자(破字)를 통하여 ‘알아듣는 마음’을 푼다. 그것은 곧 왕의 귀(耳), 열 개의 눈(目), 하나의 마음(心)으로 상대에게 집중하는 행위다. 곧 두 귀를 쫑긋 세우고 상대의 표정을 놓치지 않으며, 마음을 한군데로 모아서 듣는다. 그렇다면 ‘선악의 분별’은 어떨까? 우선 다음 모리츠 에셔(M. C. Escher(1898-1972)의 판화를 보라.(2) 

 

"Circle Limit IV (Heaven and Hell)" Woodcut. 1960.
Circle Limit IV (Heaven and Hell)" Woodcut. 1960.

에셔는 테셀레이션 기법을 활용하여 2차원 평면에 틈 또는 겹친 부분 없이 연속되는 기하학적 문양을 네 방향으로 무한 반복한다. ‘수학자의 화가’로 불릴 정도로 수학에서 영감을 얻었을 뿐 아니라 수학계의 흥미를 끌기도 했다.(3) 에셔의 작품 세계는 본질적인 인문학의 질문과 성찰의 결과물이다. 위의 판화 <서클 리미트 Ⅳ>는 지구 같은 둥근 표면에 세 천사가 날개를 펴고 짝을 이루고 있는데 시선을 옆으로 옮기면 신기하게도 박쥐 형상의 악마들이 뿔을 잔뜩 세우고 있는 모습이다. 중심에서 멀어질수록 천사와 악마의 크기가 점점 작아지면서 끝없이 이어진다. 에셔에게 이 세상은 천사와 악마가 촘촘히 이어지다 이따금 밝은 면이 도드라지고 또한 어두운 면모가 드러나는 곳이다. 다음 판화 1938년 작 <하늘과 물>은 창세기의 천지창조, 선악과? 모티브와 닮았다. 

 

"Sky and Water I." Woodcut 1938.
"Sky and Water I." Woodcut 1938.

하늘의 새 한 마리가 날갯짓하며 날고 땅에 가까울수록 개체가 많아진다. 땅이 수면과 닿은 지점에서 새의 모습은 물고기 모양으로 바뀌고 물이 낮아질수록 개체는 적어지며 짙은 색으로 변한다. 꼭대기의 새와 바닥의 물고기는 명확하나 빛과 그늘이 맞닿은 경계에 새와 물고기가 공존한다. 사람에게 허용된 공간은 그 경계다. 사람이 새와 물고기의 양면을 갖는 것은 그 경계선에 있기 때문이다. 새와 물고기를 선과 악으로 바꾸면 창세기 ‘선과 악을 아는 나무’가 된다. 선과 악의 구분은 명확하지 않으며 더러 혼란스럽기도 하다. 이 그림이 보여주고 있는 심리학적 진실은 이렇다. 세계는 선과 악으로 가득하다. 선과 악의 경계는 모호하고 불완전하다. 천사가 악마로 될 수도 있고, 악마가 천사로 될 수도 있다.

솔로몬 시대 문화적 역량과 인문학 성숙이 ‘선과 악’의 공존 또는 출현에 대한 깊은 성찰을 이루어냈듯, 20세기 두 차례 세계대전을 경험한 현대 인류는 폭력적 현실과 신앙적 이상 앞에서 깊은 고뇌의 인문학을 여러 방면에서 길러냈다. 이 주제가 특정 시대에 갇힌 질문이 아니라 삶의 본질을 탐구한 결과물로써 그 의의와 가치를 찾을 수 있다. 시인 오든(W.H. Auden)이 말한다. “악은 눈에 띄지 않고 언제나 인간적이며, 침대를 함께 쓰고 식탁에서 같이 먹는다.” 우리는 악의 현실을 부정할 수 없다. 식별을 위해 무뎌지지 않도록 끊임없이 경계해야 한다. 솔로몬 시대 지식인들은 선과 악의 흐릿한 공존에 대한 두려움을 갖고 구별하기 위한 섬세한 지식을 추구하였다. 한 가지 지식의 추구와 향연에 매몰되지 않으려는 장치로서 하느님의 마음을 제시한다. 그것은 곧 하느님이 다윗에 주었던 “진실과 공의와 정직한 마음”이다(열왕기상 3:6). 선과 악을 주장하는 날 선 공방만 여기저기 난무할 뿐 정작 둘 사이를 명쾌하게 가를 지식은 보이지 않는다. 에셔의 ‘하늘과 물’처럼 중립 지대에 수많은 사람이 아웅다웅 다투는 소리가 소음처럼 크게 들린다.

#선악과 #솔로몬 #지혜서 #에셔 #엑시스문디 #생명나무

 

(1) 대한성서공회가 2024년 발행한 <새한글성경>은 ‘알아듣는 마음’으로 옮겼다.
(2) “환상의 에셔전: 에셔의 방”이 지난 2020년 1월 10-5월 31일까지 서울웨이브 아트센터에서 열렸다. 
(3) Doris. Schattschneider, "The Mathematical Side of M.C. Escher." Notices of the American Mathematics Society 57/6 (2010): 706-18.

 

글·김창주
한신대 신학부 교수. 히브리 유산을 인문학으로 푸는 글을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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